#21 묘한 눈빛, 불편한 관심 (2/2)

독일의 유부남이 치근덕거릴 때

by 뿌리와 날개

보내야 할 우편물이 있었는데 편지봉투와 우표가 없었다. 평소 같으면 우체국에서 필요한 것들을 사서 바로 봉투에 넣고 그 자리에서 부치면 그만이었지만, 코로나 때문에 우체국 안에서 그런 일을 할 수 없도록 규정이 바뀌었다.


생각하다가 우체국에서 봉투를 사서 바로 옆 dm의 포장 매대에서 주소를 쓰고 다시 돌아와 부치기로 했다. 그럼 집에 오고 가는 수고를 덜 수 있으니까.


그렇게 dm 마트에 발을 들였을 때 누군가 나에게 아는 척을 했다. 마스크를 썼지만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 그 남자는 다시 그곳에서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 년 만에 갑자기 나타나 반갑게 인사하는 그 남자에게 또다시 반사적으로 인사를 하고 말았다. 나는 그를 지나쳐 근처 포장 매대로 가 등을 돌리고 바삐 할 일을 시작했다. 그 남자가 아는 척을 하지 않고 나를 지나쳐 하던 일이나 마저 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바로 내 등 뒤에 선 남자는 박스 뜯는 일을 하며 마스크 아래로 혼잣말을 하듯 웅얼웅얼, 그러나 내가 듣기에 충분한 소리로 말을 했다.



“So wunderschöne Augen hat sie…. oh…(오, 저렇게 아름다운 눈을 가진 그녀라니!)”



그 작은 마트에 그 시간대에 손님은 거의 없다. 나에게 인사를 건넨 뒤 바로 내 등 뒤에 서서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은 나 들으라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고도 그는 계속해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나는 못 들은 척 하던 일을 계속했지만 심장은 쿵쾅거렸고, 글씨를 쓰는 손은 떨리기 시작했다.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고 싶었다.


식은땀까지는 아니더라도 등 쪽의 피부가 따끔거리는 게 느껴졌다.


집에 돌아와 곰곰이 생각했다. 나는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할까.








얼마 뒤 다시 그 마트에서 장을 봐야 할 일이 생겼다. 심호흡을 하고 들어갔다. 만약 오늘도 나에게 불쾌감을 준다면 정확하게 싫다는 의사표시를 하고 오리라….


여성용품과 주방용품, 티슈가 필요했지만 여성용품은 일부러 고르지 않았다. 그가 계산대에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물건을 내려놓자 그는 즐겁고 힘찬 목소리로 말하며 계산을 시작했다.



“Na, wunderschöne Frau! Sind Sie fertig? (자, 아름다운 여성분! 끝나셨나요?)”



독일어권 국가에 10년 가까이 살았고, 나도 상당히 사교적인 성격이지만 고객의 입장에서 이런 경우는 처음이다.


내가 거의 매일 다니는 마트 직원들과는 이제 다들 몇 년씩 보는 사이라 길거리에서도 오다가다 마주치면 반갑게 인사를 할 뿐만 아니라 계산하며 간단한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남자도 있고 여자도 있으니, 이것은 성별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적당한 거리의 문제다.


계산을 마치고 최대한 침착하고 친절한 목소리로 그 남자를 쳐다보며 말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뭔데요?”


“당신이 친절하고 사교적인 것은 알겠지만, 저는 그런 게 좀 불편해요.”


“제가 뭘 어쨌다구요?”



그는 마스크를 내리고 내 쪽으로 몸을 기울여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아, 그랬느냐 뭔가 오해하신 거 같은데 불편했다면 유감이다라고 했을 것이다. 나는 일부러 신경 써서 말을 더 부드럽게 했는데 곧바로 뭘 어쨌냐고 되묻는 태도에서 이 남자가 당황했다는 것을 감지했다.


나는 한번 더 또박또박, 그러나 여전히 침착하고 부드럽게 말했다.



“당신의 행동이 저한테는 좀 과하다고요. 앞으로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저는 남자 친구가 있습니다.”



그때 중년의 여성고객이 계산을 하기 위해 계산대로 걸어왔다. 그 남자는 잠깐 그 고객을 의식하더니 말했다.



“제가 도대체 뭘 어쨌다는 건가요? 저도 집에 아내와 아이들이 있습니다. 결혼했다고요! 당신한테 흥미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는 두 팔을 뻗어 자신의 무고함을 내비치는 제스처를 취했다. 나는 당황스러웠지만, 호흡을 가다듬고 잠시 생각했다. 이 남자는 당황하고 있고, 내 목적은 이런 불쾌한 일을 다시는 당하지 않는 것에 있지 이 남자에게 망신을 주고 싶다던가 강하게 항의해 이 남자로부터 사과를 받아내려는 것에 있지 않다.


그리고 또한, 남자가 당황스러운 마음에 해코지를 할까 봐 두려운 마음도 있었다. 언젠가 구성애 선생님의 강의에서, 서울의 한 지하철에서 성추행을 당한 여자가 남자의 뺨을 때리며 사과하라고 대차게 나가자 남자가 당황해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려고 여자를 흠씬 때렸다는 내용을 들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때 이후로 나는, 여러 사람 앞에서 누군가에게 모욕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일, 특히 상대가 파렴치한 사람들일수록 상식을 벗어나 어떤 돌발행동을 할지 모르기 때문에 그런 극단적이고 공격적인 상황은 될 수 있으면 피하려고 한다.


그렇다면, 당신이 일 년 전부터 이래저래 나에게 치근덕거리지 않았느냐 하고 되물어 따질 필요는 없다. 와이프와 자식 보기 부끄럽지 않냐는 말도 할 필요가 없다. 그냥 나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전하기만 하면 된다.


내 양쪽 귓가까지 울리도록 쿵쾅거리는 심장을 느끼며, 눈을 똑바로 뜨고 그 남자를 쳐다보며 다시 한번 또박또박 말했다.



“잘 됐네요. 내가 지금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당신의 행동으로 인해서 제 마음이 불편하다는 거예요. 분명 친절한 것은 맞지만 저는 그런 행동을 더 이상 원하지 않아요. 불편합니다. 선을 지켜주세요.”



그 남자는 씩 웃으며 내 뒤의 여성고객을 향해 고개를 살짝 절레절레 흔들었다. 마치 저 여자가 공주병이라도 걸려 한 가정의 아버지이자 남편인 무고한 나를 치근덕거리는 치한 취급이라도 했다는 듯이.


나는 할 만큼 했다. 더 이상 얽히고 싶지 않아 물건을 챙겨 가방에 담아 나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심장은 여전히 쿵쾅거리고 있었다. 왜 항상 이런 일을 당하고 나면 심장이 벌렁거리고 다리가 후들거리는 것일까. 나는 잘못한 것이 없는데.


그래도 뭔가 속이 후련했다. 드디어 그 남자에게 싫다는 의사를 정확하게 표시한 것에 속이 더없이 시원했다.


그 남자가 내 인종에 상관없이 그런 짓거리를 한 것인지, 내가 동양 여자라서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내가 동양 여자의 가죽을 썼기 때문에 더 만만해 보였을 여지 정도는 충분하다는 것이다.


언젠가 한 번은 말하고 싶다. 여기 독일 남자들에게, 또는 서양 세계에서 동양의 여자가 어떤 대상으로 그려지는지. 대충 짐작은 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들이 입 밖으로 내지 않는 정확한 그 속내는 어지간해서는 알기 어려우니까.








그 일이 있고 나서 바로 남자 친구의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그의 엄마와 나는 꽤 좋은 친구라 사적으로 종종 연락하고 지낸다.


나는 그녀에게 조금 전 있었던 일을 설명하며 흥분을 가라앉혔다.


그녀는 나에게 말했다.



“잘했어. 살다 보면 그런 일 종종 있지. 유부남이 치근덕거리는 거. 나는 그럴 때 이렇게 얘기해. ‘그래요? 같은 여자 입장에서 보자면, 당신의 행동은 와이프가 알면 그리 썩 좋아할 것 같은 처사는 아니에요. 집에 있는 당신 와이프도 나만큼이나 아름답고 끝내줄 텐데. 유부남이면 유부남답게 당신 아내를 좀 더 존중하면 좋을 것 같군요.’ 하고 말이야.


그럼 그 순간 나와 그 남자의 아내는 같은 여자라는 연대의식을 가진 동지라는 개념으로 묶이는 거고, 그 남자는 더 이상 헛소리를 지껄이지 못해. 그 말에 반했다가는 자기 아내를 존중하지 않는 남자가 되어버리니까. 그렇게 그 남자의 아내와 나 자신을 깎아내리지 않으면서도 그 남자에게 할 말을 하는 거지.


유부남이면서 밖에서 다른 여자한테 기웃거리는 주제에 와이프와 아이들을 들먹이며 내빼려는 머저리들은 그렇게 코를 납작하게 밟아줘야 해.”



와! 언제 봐도 멋진 여자다, 그의 엄마는! 이렇게 완벽하고 우아한 솔루션을 주다니!


나도 그 비슷한 말을 할까 싶기는 했지만 삼켰다. 왜냐하면 굳이 그 상황에서 그 남자의 체면을 구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마음 밑바닥에는 혹시라도 해코지당할까 봐 두려운 마음도 있었다. 이 얘기를 하자 그녀가 말했다.



“여기는 독일이니까 한국이랑 비교하는 것 따위는 이제 그만 집어치워. 물론 문화적 차이도 무시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독일 교육을 받고 자란 남자라면 그런 상황에서 절대 너에게 함부로 못해. 그런 인간들은 그저 집에 와이프 두고 밖에서 말랑말랑해 보이는 귀여운 여자들이랑 재미나 한번 보고 싶은 거지, 체면 때문에 뒤에서 보복하거나 그런 생각 같은 거 안 하니까 기분 나쁘면 맘 놓고 할 말 해도 돼.”



독일 사람들 사이에서는 이런 것이 암묵적인 사회적 합의인가 보다. 주변의 유럽인 여자들과 대화를 해봐도, 클럽 같은 곳에서 추행이나 희롱을 당했을 때 바로 꺼지라고 하던가 그래도 안 꺼지면 가운뎃손가락을 올리라는 조언을 들었다.


심지어 계속 귀찮게 굴면 따귀를 갈겨도 된다는 여자도 있었다. 여자한테 함부로 대시했다가 트라우마로 남아 다시는 다가가지 않는다는 젊은 독일 남성들이 속속 등장하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되려 남자에게 얻어맞을 걱정이나 보복 따위를 계산하지 않고 할 말 다 하고, 대차게 나간다는 것이 나는 아직도 적응이 안된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데이트 폭력으로 사망하는 여자들을 기사로 심심치 않게 접하며, 리벤지 포르노라는 용어로 여자를 협박하는 것이 여전히 통하는 사회에서 나고 자랐으니까.


초반에 비해 이런 일에 대응하는 것이 많이 나아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쉽지 않다. 하지만 이런 일이 생겼을 때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무시하고 피하거나 참지 않고 반격하는 이유는 이것이 나 하나를 위한 일 일뿐만 아니라 다른 여성들, 특히 이곳에서 살아가고 있는 같은 동양 여성을 위한 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어리고 수줍은 동양 여자들이 그런 추태에 불쾌함을 내색하지 못하고 발그레해진 귀여운 얼굴로 살며시 돌아나가 울어야 했을까. 나도 그런 시기가 있었다. 그래서 그런 이들을 대신해 연차가 있는 내가 나서는 것이다.


그 남자가 몇 명의 여자에게 그런 추태를 부렸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그중의 한 명인 ‘나’는 제동을 걸었다. 본인이 원한다면 이 일을 통해서 배운 것이 있을 것이다. 다음번에 그런 추태를 부리고 싶어질 때 적어도 나를 기억할 테니까.


이것은 비단, 인종이나 성별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약자에 대한 강자의 폭력이기도 하다. 그 사람의 머릿속 안에 들어있는 약자가 무엇인지는 나도 모른다. 사람마다 약자에 대한 무스터는 다 다르기 때문이다.


그것은 동양인일 수도, 동양 여자일 수도, 그냥 여자일 수도, 또는 체격이 작은 여자나 상냥한 여자, 옷차림이 여성스러운 여자일 수도 있다.


다만 내가 그 사람에게 내 불쾌한 감정을 담담하게 전달하는 것으로 그의 머릿속 안에 있던 “약자”라는 무스터에 빨간 불을 한번 켜 준 셈이다.








다음에 다시 그곳에서 장 볼 일이 생기면 나는 철판을 깔고 그 남자에게 계산을 맡겨야 한다. 생각만 해도 피곤하다.


하지만 어쩌랴, 내가 도망갈 이유는 없다. 나를 보고 불편해야 할 것은 그 남자이지 내가 아니다. 어렵지만 그렇게 마음을 추스른다.


그럴 것 같지는 않지만, 만약 이런 일이 있고서도 나에게 치근덕거린다면 그때는 그 남자의 상사에게 정식으로 클레임 거는 수밖에 없다. 고객을 희롱하는 직원이라니.


하…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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