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빈이 외증조할머니께서 돌아가셨어요. 저의 전 시어머니의 어머니이자, 제가 사랑하는 시이모님의 어머니이자, 또 제 전남편의 외할머니인 레네할머니입니다. 작년 크리스마스 때 뵈러 갔었던 걸 영상으로 남기기도 했죠.
그때까지만 해도 그래도 정정하셨는데, 노인분들 건강은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르다더니 정말 그렇더라고요. 코로나 전까지는 정말 건강하셨는데 2020년에 코로나 터지면서 못 뵈러 간 3년 사이에 기력이 정말 많이 쇠하셨어요.
특히 마지막 1년 동안은 사다리에서도 떨어지시고, 여러 번 넘어지셔서 병원에 실려가시고 그러면서 팔도 부러져서 큰 수술도 하셨고, 눈도 확 나빠지시면서 한쪽만 먼저 수술해 놓고 다음 수술까지 몸이 회복되기만을 기다리시던 중이었거든요.
그런데 다치실 때마다 회복기간도 점점 길어지고 그러면서 팔 수술한 작년 여름 무렵부터는 잘 거동을 안 하시려고 한다 그랬었거든요. 그렇게 한시도 가만히 못 계시던 분이… 그러다가 1월 중순쯤 연락이 와서는 할머님이 또 넘어지셨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번에는 상태가 좀 심해서 병원에 입원하셔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지난 1년 동안 거의 두세 달에 한 번씩 사고가 났다는 연락을 받아서 꾸준히 걱정이 되기는 했지만 이렇게 빨리 가실 줄은 몰랐어요. 이번에는 좀 다르셨던 게 원래 퇴원날짜가 됐을 때 퇴원을 못하시고 그때부터 상태가 계속 안 좋아지셨어요.
심장마비도 한 번 왔다 그러고, 그렇게 며칠 있다가부터 전신에 통증도 심해지시면서 약물 투여량도 많아지고, 쇼크도 좀 있으셨고, 그러더니 돌아가시기 2주 전부터는 기력이 없으셔서 곡기를 끊으셨다 하더라고요. 그때 좀 감이 왔죠. 아, 까딱하면 상 치를 수도 있겠구나…
그러면서 상태가 급속도로 나빠지셨고, 나중에는 모르핀 때문에 거의 며칠을 그냥 잠만 주무셨는데 정신이 드셨을 때 모르핀을 끊어달라고 하셨다 하더라고요. 그렇게 모르핀 끊고 일주일 정도 더 지내시면서는 아예 말씀도 못하시고 빼싹 말라서, 저희가 보이스메시지 보내면 듣고 웃으시기는 하셨다는데 영상 통화는 더 이상 불가능했고요.
밤에는 헛것도 보시고, 돌아가신 본인 어머니 찾으시고, 어머님이 할머님을 낳으실 때 돌아가셨다고 했거든요. 그러니까 엄마 얼굴을 모르고 자라신 거예요, 할머님은. 그런데 그런 어머님도 찾으시고.
본인이 낳은 자식들 하나씩 수도 헤아려보시고 하시다가 돌아가시기 이틀 정도 전부터는 그냥 잠만 주무셨고 그렇게 돌아가셨어요. 돌아가시기 일주일 전부터는 모르핀 없이도 통증을 못 느끼셨다고 해요.
저희 이모님은 돌아가시기 이주 전부터 아예 한 달 휴가 내고 어머님 곁에서 계속 병간호하셨고, 할머님이 마지막에는 입원상태로 코로나까지 걸리셔서 이모님이 마스크에 장갑에 그 우주복 같은 거 입고 그 상태로 병실에서 자고 낮에는 또 다른 이모님이랑 교대하시고 그러면서 간호하셨거든요.
올 초에 여든일곱 번째 생신잔치를 하셨는데, 그때까지는 그래도 괜찮으셨어요. 거동이 조금 느리셨을 뿐이지 괜찮았는데 이렇게 단 시간 내에 건강이 급속도로 악화돼서 돌아가셨다는 게 아직도 좀 실감이 안 나고. 그래도 이번 생신잔치 때 자식들이 다 모였거든요.
제가 이혼을 하면서 이 집안에도 큰 폭풍이 닥쳤을 거 아니에요. 우리 편을 들어주는 식구들이랑 아닌 식구들이랑. 그러면서 제 전 시어머니랑 다른 형제들이 서로 등을 돌렸거든요.
할머님이야 형제들 엄마니까 할머님 하고는 다들 왕래를 했지만, 지난 8년 동안 제 전남편도 할머님과 왕래를 끊었고, 제 전 시어머니랑 시이모님도 절연을 했단 말이에요. 그런데 이번 생신 때는 서로 불편해도 참고 모여서 정말 즐겁고 행복한 생신 잔치를 해드렸대요. 다행이죠.
저희는 작년 크리스마스 때 찾아뵌 게 마지막이었고, 어차피 그다음 주가 할머님 생신이라 이모님은 또다시 방문할 예정이셨어서 저희가 머물던 둘째 이모님 댁에서 바로 출발을 하기로 했는데 제가 그래도 한번 더 할머님 뵙고 가자고 해서 고속도로 타기 전에 한 번 더 들렸었어요.
그 연세에는 진짜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고, 또 이번에 가면 빨라도 여름휴가 때나 뵐 텐데 혹시 모르는 거잖아요. 그래서 잠깐 인사만 드리고 가려고 했는데 마침 핸드폰 충전기를 머물던 집에 놓고 온 거예요.
그래서 차로 15분 거리 정도 되는데 둘째 이모님이 그걸 챙겨서 갖다 주러 오셔서는 그 덕에 같이 차 마시고 케이크 먹고 하면서 예정보다 2시간 정도 더 있다가 작별하고 출발을 했죠. 그러니까 그게 마지막이 된 거예요.
인생이 참 그렇죠? 여름휴가도 되기 전에 이렇게 빨리 돌아가실 줄도 몰랐고, 그때 제가 한 번 더 들리자고 안 했으면 크리스마스가 저희는 마지막이었을 거고, 휴대폰 충전기를 놓고 온 덕에 2시간 정도 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던 거잖아요.
그러니까 세상에 나쁘고 좋은 일은 정해진 게 없는 거예요.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거죠. 그래서 항상 함께 할 수 있는 지금 이 순간을 즐겨야 하는 거고.
돌아가시면서 이 가족에게는 이제 큰 숙제가 남게 됩니다. 바로 장례식이죠.
사실 저는 그렇게 크게 고민은 하지 않았어요. 할머님 연세가 연세이신지라 언젠가 제가 인연을 끊은 전 시댁사람들, 그러니까 제 전 시부모님과 시누이 그리고 전남편을 다시 만나는 날이 있다면 그건 할머님 장례식이 될 거라고 항상 예상을 해왔었기 때문에 그거에 대한 마음의 준비는 언제나 하고 있었죠.
그런데 장례식에 참석하려고 기차표도 보고 짐을 쌀 준비를 하고 있는데 저희 시이모님께서 전화를 하셔서는 울먹거리면서 그러시는 거예요. 너희들이 장례식에 오면 수지가 안 오겠다고 했다고. 참고로 수지는 제 전 시어머니 이름입니다.
순간 멍하더라고요. 뭐지, 지금 이 상황이?
그니까 할머님이 돌아가시고 오 남매가 테이블에 모였을 거 아니에요. 일단 제일 먼저 장례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치를지 논의를 해야 되니까. 제 전 시어머니는 1남 4녀 중에 둘째고 저와 저의 아들은 시어머니를 제외한 전남편의 모든 외가 쪽 식구들과 잘 지내고 있습니다.
막내 이모님은 스위스에 사시고 건강이 안 좋으셔서 거의 못 뵈지만, 그 외에는 형제 중에 첫째이신 시삼촌, 셋째이신 우리 이모님 이분은 저의 독일엄마나 마찬가지예요, 그리고 넷째이신 또 다른 이모님, 이 분 댁에서 항상 크리스마스 휴가를 보내거든요, 저희가.
영상에서 보셨던 벽난로 있고 라클렛 해 먹던 집이 그분 댁이에요. 그래서 저희가 장례식에 오는 건 굉장히 당연한 일이에요. 저야 이혼을 한 손주며느리니까 올 필요 없다고 해도 저희 아들은 하나밖에 없는 증손주잖아요, 할머님이 예뻐하신.
그런데 지금 저희가 온다고 하니까 수지가 그런 말을 한 거죠. 정말 충격적이었어요. 아니, 우리가 장례식에 온다는 게 그렇게 싫을 일인가?
제 전남편은 저랑 이혼한 뒤로 8년째 외가랑 모든 인연을 끊었고, 자기 외할머니한테도 전화 한 통 안 한다고 들었거든요. 심지어 본인 엄마도 보러 오지 않고 통화만 하는 걸로 알고 있어요.
차를 운전해서 가도 거리가 600킬로가 넘어요. 저희 사는데서 전남편 고향까지. 제 전남편도 저희랑 가까운데 살거든요. 그니까 마음이 없으면 정말 자주 가기 힘든 거리예요 이게. 그러니까 제 전남편도 이혼하고 아예 자기 고향 쪽에 발길을 끊은 거죠.
그런데 저희는 지난 8년 동안 꾸준히 왕래를 했단 말이에요. 여름휴가 때도 보고, 연말연시에도 보고. 생일카드, 크리스마스 카드 항상 보내고. 아이 사진도 모아서 앨범으로 보내드리고. 그래서 아무리 이혼했다지만, 이렇게 잘 지내고 있는 시외할머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는다는 건 저는 정말 상상도 못 하고 있었거든요.
게다가 제가 사랑하는 우리 시이모님의 엄마잖아요. 저도 물론 슬프지만, 아무렴 이모님만 하겠어요? 이모님이 가장 힘들고 아프실 때 제가 자식 된 도리로 곁에 있어드리는 건 너무나 당연한 거죠.
그런데 그 전화를 받고.. 음.. 저랑 저희 시이모님 하고는 거의 매일 통화하거든요? 할머님 쓰러지신 뒤로는 매일 통화했어요. 그래서 상황을 다 알잖아요, 그동안 얼마나 많이 우시고 할머님 돌아가실까 봐 노심초사하셨는지…
그런데 거기다가 이런 말씀까지 저한테 하셔야 되니까 얼마나 마음이 아프시겠어요. 제가 못 오는 것도 속상하실 텐데…
수지가 너 때문에 안 온다니까 오지 말라고 하실 수도 없고, 그렇다고 여기 신경 쓰지 말고 오라고 하실 수도 없을 거고, 그래서 그 짧은 2,3초 순간에 이 모든 생각과 계산이 머릿속에서 스치면서 바로 말씀드렸죠.
괜찮아요.
저희가 안 갈 테니까 그냥 장례식 편하게 준비하세요.
그랬더니 이모님이 오열을 하시더라고요. 너무너무 미안하다고. 나는 정말 수지 대신에 너희가 왔으면 좋겠다고. 그런데 일이 이렇게 돼서 정말 미안하다고. 그래서 무조건 괜찮다고 했죠. 안 그래도 상심이 크실 텐데 더 속상하게 해 드려서 뭐해요, 그렇죠?
그런데 말은 그렇게 담대하게 했지만, 전화를 끊고 나서 저라고 왜 속이 안 상했겠습니까. 내가 아직도 이런 대접을 받는 사람인가? 이혼한 지 8년이나 지났는데도 나는 수지가 오지 말라고 하면 못 오는, 그렇게 힘이 없는 사람인가? 그런 생각이 드니까 슬금슬금 화가 나는 거예요. 속도 상하고. 별의별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죠.
그런데 이렇게 많은 생각과 감정이 솟구치는데, 그 와중에 또 마음이 아픈 거예요. 상처받은 기분. 아니, 이것도 저는 잘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내가 왜 지금 상처를 받지? 아 그래서 그날은 정말 마음도 머리도 너무 복잡했어요. 그래서 하루 종일 하나씩 정리를 하기 시작했죠.
일단 수지가 오지 말란다고 장례식에 못 가서 화가 나는 거. 여기에는 두 가지 포인트가 있어요. 하나는 내가 화가 나는 거, 또 하나는 내 마음에 아쉬운 생각이 든다는 거.
<화가 났던 첫 번째 이유와 해결>
그런데 사실 정확한 워딩은 수지가 오지 말라고 한 게 아니라 우리가 오면 자기가 엄마 장례식에 안 간다고 한 거죠. 우리가 가겠다고 하면, 수지가 말릴 수 있는 방도는 없어요. 빈이는 할머님 증손이고 무엇보다 지난 8년 동안 고인과의 관계가 무척 좋았기 때문에.
게다가 자기를 제외한 모든 식구들과 화목하게 잘 지내잖아요, 저희가. 그러니까 자기 입장에서는 극단의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장례식에서 우리를 반드시 봐야만 하는 거죠. 그러니까 안 오겠다고 한 거예요.
얼마나 유치합니까. 세상에 나이 육십이 넘은 사람이 자기 엄마 장례식에 이혼한 며느리가 손주 데리고 오는 꼴이 보기 싫어서 장례식 참석여부를 내걸고 싫다는 의사를 표명했다는 게.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봤을 때, 제가 할머님 입장이라면 아무리 증손주가 예뻐도 이혼한 손주며느리랑 증손주가 오는 것보다는 친 딸이, 그것도 내가 각별하게 아끼던 맏딸이 오는 게 더 좋을 것 같았어요.
무엇보다 제가 기어코 그 장례식에 가면 그 분위기가 얼마나 싸하겠어요. 제가 간다고 하면 저희를 위해서 남은 가족들이 제 전 시어머니랑 싸워야 되잖아요. 아무리 사이가 좋았다고는 해도 나는 남이고, 그쪽은 친 딸인데. 우리야 안 와도 사실 티가 안 나지만, 형제끼리 싸워서 큰 딸이 안 오는 대신 우리가 가면 참 그렇죠.
안 그래도 거의 등 돌린 사람들이고 장례식 끝나면 또 유산 분할 하려고 계속 모이고 해야 할 텐데. 그렇게까지 편가르게 하며 우리가 가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더라고요. 어차피 장례식이라는 게 할머님을 기리고 그 가족들의 상심을 위로하기 위한 거잖아요.
그러니까 돌아가신 할머님 마음이 편하신 게 가장 중요하고, 그다음은 남은 가족들 마음이 편한 거죠. 슬픔은 할머님 잃은 거 하나로 족하잖아요. 그래서 그런 대의를 위해서 제가 안 가기로 결정한 거고요.
수지는 그냥 본인의 의사를 밝힌 거예요. 걔네 오면 난 안 오겠다. 그리고 저는 그에 대한 저의 의사를 밝힌 거죠. 그렇다면, 할머님과 가족들을 위해서 내가 안 가겠다.
무슨 솔로몬의 재판 같죠? 아기를 반으로 나눠서라도 달라는 가짜 엄마랑, 내가 못 키워도 되니까 아이를 저 여자에게 주라는 진짜 엄마. 이것이 제가 원하는 저의 결정이라는 걸 명확하게 파악하고 나니까 화는 더 이상 나지 않았어요.
<화가 났던 두 번째 이유와 해결>
아쉬운 건 제 마음속에 그런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나 이렇게 번듯이 잘 살고 있다는 걸 한 번쯤 그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 특히 내 아들. 늬들이 외면한 내 아들, 그때는 젖먹이라 아무것도 몰랐지만 이제는 이렇게 멋지게 커서 이모님 하고 내 옆에 든든하게 서있는 걸 보면 너희들 얼마나 아쉽겠냐 하는 그런 마음이 있었던 거예요.
저 이혼할 때 시댁 사람들이랑 전남편 때문에 정말 비참했거든요. 그때 시어머니한테 제가 연락 끊기 전에 마지막으로 그렇게 문자를 보냈어요, 말도 안 되는 엉터리 독일어로. 지금은 당신네들이 이렇게 당당하지만, 시간이 가면 다 알게 될 거라고, 당신들이 얼마나 부끄러운 짓을 했는지.
그걸 저는 항상 기억하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장례식이 그런 기회라고 생각하는 마음도 있었어요, 옹졸하지만. 제가 뭐 천사는 아니잖아요. 저도 그냥 한낱 부족한 인간일 뿐입니다. 그래서 그걸 못하게 된 게 화가 나는 마음 가운데 알맹이처럼 이렇게 있었어요.
그런데 내가 그런 마음을 품고 있었다는 걸 그동안은 인지를 못하고 있었던 거죠. 그러다 이번 사건으로 그걸 의식적으로 깨닫게 됐고, 깨달은 순간 동시에 참 부끄럽더라고요. 할머님이 돌아가셨는데 그런 마음을 품었다는 게. 그래서 바로 내려놨죠, 뭐.
그런 부끄러운 마음을 더 품고 있으면 뭐해요, 쓸모도 없는데. 장례식 장이 무슨 뽐내기 장도 아니고. 수지가 알든 모르든 나는 나대로 잘 살고 있고, 우리 아들도 잘 크고 있어요. 수지한테 우리가 잘 사는 걸 보여줘서 내가 더 행복해지는 것도 아니고, 못 보여준다고 불행한 것도 아니니까요. 그렇죠?
그리고 이제 상처받은 것 같은 기분. 마음이 아픈 거. 이게 저는 잘 이해가 안 되더라고요. 아니, 저는 전남편에게 더 이상 악감정도 없고, 잘 살고 있고, 전 시부모와의 교류도 8년째 전혀 없는데 어떻게 이게 마음이 아프지? 그래서 제가 제 마음을 가만히 살펴보니까 여기에도 또 두 가지 이유가 있는 거예요.
하나는 저를 위해서 강력하게 싸워주지 않고 울먹거리던 이모님한테 서운한 마음이 있었고, 또 하나는 이게 지금의 상처가 아니라 8년 전의 상처가 건드려져서 아픈 거더라고요.
<상처받은 것 같은 마음의 원인과 해결, 첫 번째>
8년 전에 그렇게 갑작스럽게 이혼을 당하면서, 제가 믿고 의지하던 시어머니한테 정말 큰 배신감을 느꼈다고 했었잖아요. 저는 남편의 변심도 충격적이었지만, 그 시부모님 그중에서도 제가 그렇게 좋아하던 시어머니가 저한테 그렇게 매몰차게 돌아섰다는 게 정말 충격이었거든요.
이렇게 말하면 나쁜 사람 같죠? 아니에요. 아이 만삭 때 제가 한밤중에 입이 궁금하다고 하니까 얼른 주방 가서 제가 좋아하는 먹을 거 만들어다 과일이랑 치즈랑 올려서 갔다 주시고, 아이 낳을 때도 모자랑 옷이랑 양말이랑 두 세트씩 해서, 아기 감싸는 이불보까지 직접 다 뜨개질로 만들어서 선물해 주시던 분이고.
제가 남편 만나서 생천 처음으로 독일, 시댁에 인사 왔을 때 첫날 낮에 도착해서 옷을 벗어놨는데 저녁에 잘 때가 되니까 바구니를 주시는데 세상에 그 몇 시간 사이에 세탁에 건조까지 다 마쳐서 그렇게 곱게 개켜서 잡지에서나 보던 라탄 바구니에 차곡차곡 담아주셨는데 빨래에서 너무 향긋한 섬유유연제 냄새가 나는 거예요.
제가 그거를 받아 들고 눈물이 터졌었거든요, 너무 좋아서. 저희 엄마는 항상 맞벌이셨기 때문에 집안일도 저랑 동생이 나눠서 했고, 그 전형적인 가정주부가 아니셨어요 저희 엄마는. 학교 끝나면 항상 저 혼자 문 따고 들어가고, 밥 혼자 데워 먹고. 그래서 그런 살림하는 엄마에 대한 그리움이 있단 말이에요.
그런데 그 빨래에서 향기가 나는 거를 맡는 순간, ‘아, 이게 바로 엄마가 있는 집의 냄새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눈물이 팍 터졌어요. 그 집 자식들은 엄마가 가정주부라고 그렇게 무시를 하는데, 그래서 자식 둘, 제 전남편이랑 제 시누이는 정말 사회적으로 성공해서 돈을 잘 버는 사람들입니다. 굉장히 똑똑해요.
그런데 자기 엄마를 그렇게 무시해요. 그런데 저는 그런 시어머니가 너무 좋았어요. 살림하는 엄마, 내가 꿈에 그리던 엄마다운 엄마라서. 그런 시어머니였기 때문에 남편에게 유리한 소송을 위해서 저한테 거짓말을 하고 등을 돌리고 한 게, 그리고 이혼을 하고서 손주도 나 몰라라 하고 산다는 게 정말 큰 상처였는데 그걸 잘 덮고 살아온 거죠, 제가.
그동안 잘 살아오기도 했고요. 그런데 상처가 내버려 두면 그냥 알아서 낫고, 괜찮아지는 줄 알았지 이게 건드렸을 때 아직도 아플 줄은 몰랐거든요? 저는 나중에 수지의 입장도 충분히 이해를 했기 때문에.
근데 그게 아니더라고요. 그동안 그 상처가 드러날 기회가 없어서 그냥 티가 안 났던 거지 이번 사건으로 인해서 이게 톡 건드려진 거예요. 그러니까 욱신 한 거죠. 그니까 내가 지금 상처받은 이 기분은 지금이 아니라 8년 전의 경험 속에서 잠자고 있던 상처인 거예요.
지금은 상처를 받을 수가 없어요. 왜냐면 상처라는 게 나랑 관계가 없는 사람한테는 받을 수가 없는 거거든요. 항상 나를 아끼고 내가 아끼고 사랑하고 가깝게 느끼는 사람들이 나를 상처 줄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저의 전 시어머니는 더 이상 저에게 상처를 줄 수가 없는 사람이에요. 우리는 아무 사이가 아니기 때문에. 그런데 8년 전의 내가 아파하고 있는 거죠. 그걸 깨닫고 나니까 그 격했던 감정이 사그라들면서 좀 진정이 되더라고요. 그때 내가 정말 많이 고통스러웠었구나 하는 거를 또다시 느꼈고.
<상처받은 것 같은 마음의 원인과 해결, 두 번째>
그리고 이모님에게 서운한 거. 이것도 참, 제가 모자란 사람인 거예요. 생각해 보면 이모님 입장에서는 얼마나 난감하겠어요, 중간에 끼어서. 제가 이모님이라면 제 성격에 저는 저를 오라고 했을 거 같아요. 언니는 지가 안 온다니까 필요 없고 너는 애 데리고 꼭 오라고.
그런데 우리 이모님은 제가 아니잖아요. 이모님은 그런 성품의 사람이 아니란 말이에요. 평화주의자이고, 싸우지 않을 수 있다면 본인의 모든 것을 내어주는 그런 분이세요. 그러니까 울먹거리면서 본인이 더 저한테 미안해하시잖아요.
그리고 저는 이모님을 사랑하고. 그런데 사랑이 뭐예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 마음이 편안하면 내 마음도 편안한 게 사랑이죠. 그래서 저는 이모님 마음을 편안하게 해드리고 싶었어요. 안 그래도 엄마를 잃어서 많이 슬프실 텐데.
그리고 무엇보다, 지난 8년 동안 이모님이 저희한테 잘해주셔도 보통 잘해주신 게 아니기 때문에 그런 이모님께 받은 사랑과 은혜는 죽을 때까지 갚아도 다 못 갚을 그런 거라서. 이런 걸로 서운했다고 그 사랑의 잔고에서 차감을 하고 하고 또 해도, 그래도 차고 넘치는 잔고를 이미 충분히 저금해 놓으셨습니다 제 마음속에.
그래서 그것도 다 털었고요. 이렇게 마음과 머리를 다 정리하는데 한 3일 걸렸고, 사실 장례식에 안 가서 좋은 것도 많아요. 한 번 볼까요?
일단 기차값이 줄었죠. 왕복 500유로, 한화로 한 70만 원 돈이 굳었습니다. 원래 빚내서 갈라 그랬어요 돈이 없어가지고. 아시는지 모르겠는데 저는 지금 경제적으로 많이 힘듭니다. 하하! 그리고 빈이 학교에 결석계를 낼 필요가 없죠. 그것도 또 독일어로 쓰려면 골치 아픈데.
그리고 가는데만 8시간이에요. 기차 막 갈아타고. 시간 굳었죠. 이 추운 날씨에 멀리 안 가도 되니까 짐도 안 싸도 되고, 몸도 편하고, 아이 카니발 축제며 저도 하는 일도 많고 해야 할 일도 많아서 정말 정말 바쁘거든요. 그런데 안 가게 됐으니까 사실 여러모로 편하죠.
할머님 덕분에 이렇게 제 마음속에 있던 찌꺼기, 응어리를 또 발견하게 돼서 그 덕에 의식 밑에 숨어있던 상처를 또 하나 치유했습니다. 가시면서 저한테 정말 큰 선물을 주고 가셨어요.
아무리 장례식에 못 간다고 해도 저희에게는 정말 의미가 있는 분이셨고, 특히 빈이는 특히 처음 겪는 죽음이라 그런 장례의식도 중요하다고 생각을 해요, 저는. 그래서 저희끼리라도 작게 추모를 하고 싶어서 좀 알아보니까 프리드호프라고 하죠? 한국식으로는 납골당 공원 같은 거예요.
납골당공원마다 무명의 비석이 있대요. 보통 비석마다 주인이 있고 방석만 한 그 땅에 꽃이며 양초며 꾸며놓고 찾아뵙거든요. 그런데 그 비석은 이름이 없어서 아무나 가서 누구든지 고인을 기려도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거를 해야 되겠다고 조금 알아보니까 요즘 저를 가르쳐주시는 목사님께서 우리 교회에서 초를 켜도 된다면서 그렇게 하는 게 어떻겠냐는 거예요. 저는 작년 10월부터 신앙생활을 하고는 있지만 교회를 정식으로 다니는 건 아니거든요.
다만 이 교회 하고는 요한나 아줌마도 있고 빈이 유치원부터 해서 인연이 깊어서 이 교회에서 세례를 받기로 결정했고, 그래서 그때까지 2주에 한 번씩 목사님이랑 성경 공부도 하고 주로 토론이죠, 저는 궁금한 게 워낙 많아서.
그렇게 작년 10월부터 만남을 갖고 있는데 그렇게 배려를 해주셔서 너무 감사했어요. 오늘 이제 슈바르츠발트(할머님 사시는 곳)에서도 할머님 장례식이 있었거든요. 우연히도, 또 감사하게도 같은 날. 알고 정한 건 아닌데 우연이 겹쳐가지고, 오늘 저희도 교회에 가서 목사님이랑 빈이랑 요한나 아줌마랑 저랑 넷이서 레네 할머니를 기리는 시간을 가졌고요.
영상도 찍었어요. 나중에 그것도 편집을 해서 보여드릴게요. 여기 보시는 이 꽃이 제가 가져간 꽃이고요. 독일에서는 장례식 때 이렇게 예쁜 색깔의 꽃을 헌화합니다. 신기하죠? 그래서 제일 예쁜 꽃다발을 골라봤고. 저희의 작은 장례식을 마쳤습니다, 무사히.
그래서 오늘은 돌아가신 할머님께 인사를 드리면서 마칠게요.
Hallo, Oma! Das war sehr schöne Zeit mir dir.
안녕, 할머니! 그동안 함께해서 즐거웠어요.
Und vielen Dank dafür, dass du Betti und Susi geboren hast.
그리고 이모님과 전 시어머니를 낳아주셔서 감사해요.
Dank deiner Kinder konnte ich meinen Kleinen bekommen.
할머니의 아이들 덕에 저도 제 아들을 만날 수 있었어요.
Hoffentlich hast du jetzt dort keinen Schmerzen mehr
이제는 그곳에서 더 이상 아프시지 않기를 바라요.
und triffst wieder mit deiner lieben Mama und deinem Mann
그리고 할머니의 사랑하는 엄마랑 남편도 다시 만나서
und bleibst weiterhin glücklich.
계속해서 행복하시길 바라요.
Ich werde Dich nie vergessen.
할머니를 절대 잊지 않을게요.
Und ich werde auf deine Tochter auch gut aufpass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