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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ot Oct 10. 2023

처음오름

처음으로 오른 오름은 새별오름

  새별오름 입구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나면 일단 왼쪽과 오른쪽의 갈림길에 서게 된다. 여기서 오른쪽 길로 가야만 쉽게 오를 수 있다. 왼쪽길은 급경사인데 비해 오른쪽길은 완만한 경사를 가졌기 때문이다. 오른쪽 길로 올라서 정상을 통과해 왼쪽 길로 내려가면 올라오는 사람들의 표정이 거의 수직으로 내려다 보인다. 그리고 그 표정을 보면 인생의 갈림길에서 본인이 얼마나 현명한 선택을 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미리 얻은 정보 덕에 완만한 경사를 선택해서 관절은 지켰지만 바람을 간과했다. 90도로 반듯하게 허리를 굽히고 겸손하게 올라야 했다. 인생 첫 오름의 바람은 그 정도로 강했다. 새별오름은 초보자도 쉽게 오를 수 있는 곳이라고 해서 얕본 것도 한몫했다. 

  밑에서 올려보니 저 멀리 역시나 겸손하게 허리를 숙이고 올라가는 실루엣이 보였다. 상체가 거의 땅에 닿을 지경이다. 


  날아갈 듯한 모자를 손으로 누른 채 발걸음을 옮겨 정상을 향해 내딛다가 뒤를 돌아보고 깨달았다. 무성하게 자란 나무들에 가로막힌 채 오르던 일반적인 등산과 달랐던 것이다. 사방이 뚫려있었다. 이미 시작점에서부터 정상이 보였고, 정상에서도 내가 지나온 길이 보였다. 오르다가 뒤를 한 번씩 돌아볼 때마다 새로운 풍경이다. 돌아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사정없이 귀를 때리는 바람 소리가 익숙해질 무렵 정상에 도착했다. 동서남북이 모두 뚫려있는 360도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위에서 내려다보니 서로 자기가 최고라는 듯 뽐내는 오름들이 사방에 솟아 있다. 그중 단연코 최고는 역시 이 모든 오름의 어머니, 바로 한라산이다. 오름은 아니지만 오름을 만들어 낸 장본인. 날씨가 흐렸으면 안보일 수도 있을 정도의 먼 거리였지만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조물주가 도예가라서 찰흙 덩어리를 아래에서부터 침착하게 손으로 쓸어 올려 빗어낸 듯하다. 원래는 원뿔처럼 정상이 뾰쪽했지만 실수로 부러뜨린 걸까.  


  잘못 만든 작품 앞에 오래 머물지 말라는 듯, 바람이 전혀 사그라들 생각이 없었다. 버티는 육체 보다 귀를 때리는 공기 소리가 더 힘들었다. 내려가기로 마음먹고 주변을 한번 더 둘러보며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그대로 한참을 더 찍었다. 정신을 차리고 발걸음을 떼었을 땐 이미 나만 남아 있었다. 지인들은 반 정도 내려간 상태였고 그 모습이 정상에서 보였다. 

  내려가는 길에 아쉬움에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니 다른 풍경이 계속 펼쳐진다. 주차장에 도착해서야 셔터 누르는 걸 그만뒀다.

 

  사진가들이 어째서 제주도에서 벗어나질 못하는지 알 것 같다. 오름의 부드럽지만 강해 보이는 형체와 시시각각 변하는 풍경들, 그리고 생전 처음 보는 바다색이 나를 놓아주질 않는다. 잠깐 놀러 가서 돌아오지 않는 지인들이 하나둘 늘고 있다. 혹시 나도 다음에 가면 돌아오지 못할까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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