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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트임팩트 Jun 21. 2018

2회_[스페셜 스피치] 언니의 사(社)생활

여성의 일 |  이나리 Plannery 대표

루트임팩트는 여성의 날 주간을 맞이하여, 2018년 3월 10일 헤이그라운드에서 제 2회 체인지메이커 컨퍼런스 <시간을 달리는 소녀: 사라진 여성들을 찾아서>를 열어 여러 체인지메이커와 함께 여성의 일과 삶, 배움을 이야기하는 자리를 마련하였습니다. 일상의 삶 속 성역할에 대한 무의식적인 학습이 일의 선택과 지속에 영향을 줍니다. 성별을 떠나, 보다 통합적 관점으로 여성의 일과 삶, 배움에 접근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느낍니다. 미투, 경력단절, 성평등 격차 등의 이슈가 부각되고 다양한 의견이 모아지는 지금, 루트임팩트는 즉각적 혹은 단편적 대안의 제시보다는 조금 불편한 이야기를 통해 모두에게 유의미한 질문이 만들어 지기를 기대합니다.  그것이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체인지메이커의 지속가능한 여정에 힘을 싣는 방법 중 하나가 될 것입니다. 제 2회 체인지메이커 컨퍼런스를 글로 담아 공유합니다.


일을 하는 여성들은 한 번쯤 경력단절, 유리천장, 육아휴직, 임금차별 등을 고민합니다.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체인지메이커는 여성이 일하기 가장 좋은 환경을 짓고자 합니다. 여성이 소속감을 느끼며 일하는 그 곳이 곧 우리 모두가 일하고 싶은 곳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이번 강연은 ‘직장에서 여성의 수는 왜 점점 줄어드는가’ 라는 질문에서 시작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으로 일하는 여성의 성장과 연대를 위한 라이프 스타일 커뮤니티를 만들고 Plannery라는 회사를 창업하신 이나리 대표님의 이야기를 들어보려고 합니다.


현장의 목소리를 그대로, 20분간의 스페셜 스피치가 모두 궁금하시다면 (클릭/Youtube)




여성, 그리고 일



저는 대학교 1학년부터 지금까지 계속 돈을 벌었었고, 월급을 받는 생활을 시작한 것은 대학교 4학년 때부터였으니까 지금 거의 30년 가까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일을 쉰 적은 단 한번도 없습니다. 처음 20년 정도는 기자로 일을 했습니다. 그 후 3년 남짓은 비영리 재단에서 스타트업을 지원하고 투자하는 일을 했고, 최근 3년 동안은 대기업에서 신사업과 투자를 총괄하는 임원으로 일을 했습니다.

 

이렇게 쭉 커리어를 들어보면 뭔가 탄탄대로를 걸어온 것 같고, 금수저인 것 같은 느낌을 받으시는 분들도 많으실텐데, 실제로 그렇지는 않아요. 그 사이에는 잘려본 적도 있고, 비정규직의 설움을 겪어본 적도 있는 등 다양한 부침이 있었습니다. 그런 개인적인 특성, 성향, 환경등의 요인을 제쳐두고, 여성으로서 또 그 중에서도 특히 아이를 낳아서 키우는 여성으로서 일을 하는 도중에 겪었던 커리어 상의 위기가 몇 번쯤 있었을까, 이번 발표를 준비하면서 헤아려봤더니 큰 것만 따져서 약 9번 정도 있었습니다. 작은 건 다 뺀 겁니다. 


보통은 많은 분들이 여성이 경력단절이 되는 이유는 대부분 아이를 낳고 초반에 아이를 돌보기 굉장히 힘든 시기를 건너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많이들 말씀 하시는데, 저는 그것을 뛰어넘어 왜 사는 내내 곳곳에 어려움과 위기가 있을 수 밖에 없는지에 대해 제 경험을 바탕으로 말씀을 드리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하고 싶습니다.


이런 9번의 고비를 겪을 때마다 심리적으로 굉장히 많은 어려움을 겪었었는데요. 대단히 외롭고, 막막하고, 가족에게, 특히 아이에게 죄의식이 느껴졌습니다. 더이상은 나 자신으로 살 수 없을 것 같은 불안감, 그 다음엔 체념, 때로는 심지어 공포심에 가까운 감정을 느끼던 때도 있었습니다. 이런 많은 부정적인 감정들과 평생 싸우면서 일을 해왔습니다. 




여성이라 겪어야 했던 9번의 고비


#01

1991년: 갈 곳이 없어

제가 대학교 4학년 때 1991년이었는데요. 그 당시에는 정말 갈 곳이 없었습니다. 제가 여대를 나왔는데요. 그때 어떤 의류 신생 기업이 대졸여성 공채라는 것을 처음 냈습니다. 얼마나 갈 공채가 없었냐하면, 우리 학교 4학년의 절반이 그 회사에 원서를 냈다는 소문이 돌았고, 심지어 소문이 아니라 제가 볼 때 사실이라고 느꼈습니다. 왜냐하면 도서관에 있는 거의 모든 학생들이 그 원서를 쥐고 있었거든요. 심지어 그 회사는 교회에 다녀야한다는 조건이 있었는데 그것 때문에 급하게 세례를 받느라고 다들 난리가 났었습니다. 


지금은 당연하게 공채에서 여성들을 뽑는 대부분의 기업들이, 당시에는 전혀 여성들을 뽑지 않았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대학교 4학년 때 집이 조금 어렵다보니 하고 싶은 언론고시 준비는 하지 못하고 그냥 갈 수 있는 작은 회사에 일단 들어갔습니다. 이때 먹고살 수 없을 지 모른다는 공포에 한 번 크게 시달렸었습니다.


#02

1993년: 어이 아줌마!

그 다음에 제가 조금 일찍 결혼을 했습니다. 93년도에 결혼을 했는데요. 신랑과 제가 조금 없는 집의 맏이, 이렇다보니 시골에서 올라오신 시부모님을 모시고 한 집에 살게 되었어요. 생전 본 적도 없는 연세드신 분 들과 한 집에 살면서 24시간 회사갈 때를 빼면 같은 장소에서 시간을 보내야한다는 것이 상당히 어렵게 느껴지더라구요. 하지만 또 제가 그 때에는 며느라기인 관계로 잘 보이고 싶고, 잘하고 싶다는 욕구에 시달리느라고 더 힘들었습니다.


시어머니 모시고 시장에라도 가면 누가봐도 시어머님을 모시고 온 새댁이잖아요. 그러니까 시장에 있는 상인 분들이 ‘어이 아줌마!’ 이렇게 불렀습니다. 그게 그렇게 모욕적인 말은 아니었지만, 제 스스로는 이상한 충격을 받았어요. ‘아, 내가 회사를 다니지 않으면 그냥 아줌마구나. 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아줌마 아닌 다른 이름으로 불리면서 살고싶다.’ 어린 마음에 그런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 저는 어떤 신문사에서 노조를 만들었다는 이유로 잘리고, 또 다른 신문사에서 아르바이트 기자를 하고 있었는데요. 임신을 하면 잘리잖아요. 비정규직이니까요. 어떻게든 임신하기 전에 정식 직원이 되어야한다는 절박감 때문에 무척 고민을 했었던 기억이 납니다. 다행히 정규직이 되고 그 직후에 아기를 가졌다는 말을 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던, 그나마 행운이 따랐다고 할 수 있었던 상황이었습니다. 



#03

1995년: 애 낳는 게 벼슬이야?

95년에 드디어 아이를 낳았습니다. 아이를 낳는 그 시점이 보시다시피 지금부터 20년 정도 전이니까, 모성보호라는 것이 없는 시대였습니다. 일단 우리 애는 세상에 못 태어날 뻔 했습니다. 제가 헬리콥터를 타고 취재를 다녀오는 바람에 유산을 할 위기에 처했거든요. 병원에 응급실을 데려갔더니 의사가 이 아이는 이미 끝났으니 빨리 수술을 하자는 이야기를 했어요. 그러던 중에 그 옆에 있던 레지던트 분이 살짝 찾아오셔서는 아직 완전히 떨어지지는 않은 것 같으니 조용히 빠져나가서 이틀만 누워계시다 다시 오시라고 얘기하더라구요. 그런데 회사 때문에 이틀을 누워있을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하루 누워있다가 병원에 다시 갔더니 다행히 아이가 아직 자궁에 붙어있다고 했고, 그 아이를 보듬어서 10개월 후에 출산했습니다. 그게 제 유일한 자식인 아들입니다.


출산휴가가 두 달이었는데요. 그 두 달을 풀로 쓰기 위해서 정해진 날에 아이를 낳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애가 안나오는 거에요. 그래서 아이를 낳기위해 촉진제를 맞았습니다. 아직 안나오는 아이를 억지로 밀어내다보니 아이가 무척 힘들었나봅니다. 아침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진통을 했지만 결국 낳지 못해서 수술을 했습니다. 너무 속이 상했어요. 병원비도 일단 아까웠지만, 두 달밖에 안되는 휴가의 일주일을 병실에서 보내야했잖아요. 그리고 퇴원을 해서도, 저는 이미 친정 어머님이 돌아가시고 상황이 안좋았기 때문에, 시어머님이 산후조리를 맡아주셨어요. 어머님께 미역국을 계속 끓이게 한다거나 설거지를 하게 하는 것을 제가 가만히 앉아서 받아먹는 것이 어렵더라구요. 결국은 퇴원하고 이틀 후부터 집안일을 하고 아이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출산휴가가 끝날 때가 다 되었는데 마음이 너무 불안한 거에요. 두 달을 다 채우고 나가면 안될 것 같은 거에요. 뭔가 두 달도 다 채우지 않고 나와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되고 싶은 거에요. 그래서 며칠 앞당겨서 출근을 했어요. 그러면서 칭찬받고 싶었어요. 쟤는 출산 휴가도 다 채우지 않고 나와서 일하는 사람이다, 그런 말을 듣고 싶어 했던 못난 여성이었습니다.


아이의 나이와 떼놓을 수 없게된 엄마의 커리어

그리고 이제 없던 숫자가 생겼죠? 왼쪽 숫자는 우리 아들의 나이입니다. 그 옆은 저의 나이구요. 이때부터는 아이를 빼놓고는 제 커리어를 설명할 수가 없기 때문에 아들의 나이를 넣어버렸습니다.


#04

1998년 (4살/30살): 나쁜 엄마

아이가 4살이 되었어요. 그때까지 엄청나게 많은 일이 있었겠죠. 저는 정말 나쁜 엄마가 되었습니다. 일을 잘 하고 싶고, 또 직업이 기자였기 때문에 집에 잘 없었습니다. 아이는 엄마가 보고싶어서 보채는 단계를 넘어서서, 집에 가거나 집을 나와도 메달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런 상황이 약 2년 가까이 이어졌는데, 아이가 나중에 커서 이야기 하더라구요. 그렇게 해도 엄마는 갈 걸 알았기때문에 자기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저도 당연히 그런 느낌을 알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늘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강한 죄책감과 부담감에 시달리며 직장을 다녔습니다. 정말 회사를 그만두고 싶었어요. 그때 만약 경제적으로 상황이 괜찮았다면 저는 아마 그만둬버렸을 것 같아요. 실제로 이때쯤 정말 많은 여성들이 회사를 그만 둡니다. 


#05

2002년 (8살/34살): 왜 출근하는 걸까

그리고 아이가 8살이 되면 이제 학교에 갑니다. 다른 전업주부 어머님들과 제가 너무 비교가 되기 시작하는 거에요. 아이가 2학년 즈음 어느 학부형이 전화를 주셨어요. 5월에 특별활동으로 스케이트장에 갔는데 거기서 유일하게 반팔을 입고 스케이트를 타고 있었다는 거에요. 그래서 매번 다른 어머님들이 스웨터를 챙겨와서 입혀주곤 했는데, 어떤 어머님이 참다 못해서 전화를 하신 거에요. 어떻게 아들이 스케이트 장에 가고 하는데 그 추위에 반팔을 입혀서 아이를 보내냐고. 그런데 제 반응이 더 가관이었죠. ‘스케이트 장에 갔어요?’


가방도 잃어버리고 집에 오고, 숙제를 어떻게 하는 줄도 몰랐어요. 그런 사실을 깨달을 때마다 굉장히 깜짝깜짝 놀라고, 또 심각하게 고민을 했습니다. '그만둬야 하나? 그만두지 않아서 우리 아이가 너무 뒤쳐지면 어떻게 하지?' 이때 실제로 정말 많은 분들이 그만 두십니다. 아이가 학교에 들어가면.


 

#06

2005년 (11살/37살): 매일 사표를 쓰다

그 다음에 11살. 마의 4학년. 성적이 오픈됩니다. 대충 생각하죠. ‘내 아이인데 그래도 웬만큼은 하지 않을까?’ 못합니다. 그걸 발견합니다. 우리 아이가 4학년때 드디어 통지표를 집으로 보내주는 거에요. 충격적인 점수가 나오는데 역시나 엄청나게 갈등을 했습니다. 그만둬야 하는 거 아닌가. 그리고 이때는 커리어적으로도 굉장히 큰 고민에 빠져 있었습니다. 사실 34살 정도에 이미 시작이 되긴 하지만요, 여성으로서 위를 보는데 이때쯤 나이가 되면 사람이 없어지기 시작해요. 나보다 나이가 많고 적극적으로 잘 나아가고 있는 여자 선배가 있다면 그 분을 보면서 희망을 얻을텐데 그런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이렇게 아이를 내팽겨치고 뼈와 살을 태워서 일을 해도 결국은 앞으로 3년, 5년 후엔 나에게도 기회와 자리가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이 시작됩니다. 지금 이 일을 내가 정말 40, 50세 이후에도 해나갈 수 있는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게 됩니다. 개인적인 커리어에 대한 갈등, 미래에 대한 불안, 아이에 대한 죄책감 같은 것들이 결합되면서, 이때쯤 많은 분들이 커리어를 전환하는 것 보다는 사표를 내는 단계로 들어가게 됩니다. 일단 사표를 내고 보자. 그 다음에는 또 그 다음 일을 할 수 있겠지. 이렇게 자기위안을 하게 되죠.


#07

2009년 (15살/41살): 막막한 미래

우리 아이가 이제 15살이 되었습니다. 마의 중2병이 시작됩니다. 우리아이는 중2병을 심하게 앓지는 않았지만 저 때 속마음을 엄마에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제가 굉장히 놀란 것이, 아이가 초등학교 때 왕따를 당한 적도 있었고, 죽어버릴까 생각해본 적도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아이가 원하기도 했고 저도 너무 불안해서 소아 심리상담을 받았지만, 그 곳에 가는 것 조차 엄마인 저는 직접 데려다 주지 못하고 아이가 버스를 타고 가도록 했습니다.


그렇게 아이가 심리적으로 굉장히 어려운 중학교 2학년을 보내면서 저도 40이 넘었어요. 이제는 정말 저보다 선배가 거의 없는 그런 상황이 되었습니다. 아이는 이렇게 힘들어하는데 내가 또 회사를 계속 다니는 것이 맞나? 그리고 이때는 이미 커리어가 10년이 넘게 지났기 때문에 세상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세상이 바뀌어가는데 나는 그 속도를 따라가면서 살고 있는가? 이런 변혁의 시대에 하던 일만 계속 해도 될까? 그런 불안감들. 그래서 또 한번 우울증이라고 생각할만한 위기를 겪었습니다.


#08

2012년 (18살/44살): 뭣이 중한겨?

아이가 18살이 되었습니다. 대학 입시가 시작됩니다. 제가 아는 굉장히 유능한 삼성 그룹의 모 여성 임원이 있으신데요. 그 분도 아이가 저 나이가 되었을 때 결국 25년의 커리어를 접고 사표를 내셨습니다. 모든 곳에서 압박이 들어오더래요. ‘니가 아무리 회사다니고 잘나간다고 해도 니 아들이 대학 떨어지면 니 인생에 뭐가 남니?’ 이런 이야기들을 가족, 친척들이 아무렇지 않게 하고, 스스로도 ‘내가 아무리 성공해도 우리 아이가 좋은 대학 못가면 나는 그냥 실패한 엄마 아닌가?’ 그런 생각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저는 이 문제를 고민 끝에 가뿐히 해결했습니다. ‘아무 데나 가라.’ 그리고 아이가 잘하고 좋아하는 일을 하는 뒷받침은, 제가 돈을 버니까 돈으로 지원해주자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욕심을 버리고 아이가 원하는 길을 가게 하는 것으로 해결을 보긴 했습니다만, 역시 대단히 큰 위기를 였습니다.


#09

2017년 (23살/49살): ‘늙은 여자’가 되다.

그리고 2017년이면 작년이죠. 제가 드디어 늙었다는 말을 들어도 별로 할 말이 없는 나이에 진입하고 있더라구요. 이 당시에 제가 대기업에 임원으로 일을 하고 있었는데, 전체 임원 중에 여성이 딱 3명 있는 조직이었습니다. 걱정을 많이 하고 불안하기도 하고 속상하기도 했어요. 여기서 더 일을 하고 또 다른 회사에 옮겨가서 일을 해도 좋지만, 계속 조직에 속해서 일을 해가는 사람으로서 여성인 내가 또 어디까지 영향력을 행사하고 야망, 꿈을 이룰 수 있을까? 이 부분에서 답을 찾기가 굉장히 어려웠습니다. 그리고 제가 내린 결론은 ‘불가능하다’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최근에 회사를 그만뒀고 새로운 일을 시작했습니다. 제가 평생 할 수 있고 저라는 사람으로 계속 갈 수 있는, 회사를 다니지 않아도 그냥 아줌마나 할머니라고 불리지 않을 무언가를 만들기 위해 노력을 하고 있어요.




결혼과 출산, 여성의 커리어를 가로막다

상황이 이러다보니 ‘결혼을 꼭 해야하느냐’라는 질문에 대해서 이제는 단지 30%의 여성만이 결혼을 해야한다고 대답합니다. 2010년부터 약 6년 사이에 50% 가까이 되던 퍼센티지가 30% 가까이로 떨어졌구요, 그 짝이 될 남자 분들도 이제는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결혼을 하면 왠지 아이를 낳아야할 것 같고, 아이를 낳은 후에는 제가 지금까지 말씀드린 과정을 겪어야한다는 것을 주변 분들의 삶이나 이야기를 통해 이미 충분히 알고있으니까요.


요즘 뉴스에 많이 나오죠. 출산률 많이 떨어진다, 작년 대비 12% 감소했다, OECD 최저다. 저는 이런 말을 들어도 걱정이 된다기 보단 ‘내 이럴 줄 알았지’라는 생각이 듭니다. 여성들에게 돈 조금 더 주고 육아휴직 한 달 더 쓰게 해준다고 해서 과연 여성들이 아이를 낳겠다는 결심을 할 수 있을까요? 제가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저렇게 도처에 지뢰가 널려있는데 과연 그때 집중해서 뭔가를 더 해준다고 해서 아이를 낳을까? 저도 옛날에 똑똑했으면 안 낳았을 거에요. 그때는 정말 뭘 몰라서 아이를 낳았습니다. 물론 아들은 지금 저에게 너무나 큰 기쁨이지만, 제가 겪어온 과정들을 미리 알았다면 아마 결심을 하기 굉장히 힘들었겠죠.


그런데 제가 자료를 찾다가 재미있는 걸 발견했어요. 세종시는 출산률이 굉장히 높은 거에요. 거의 2명 가까이 아이를 낳습니다. 저기 누가 많죠? 공무원입니다. 여성이나 남성, 가족 구성원이 아이를 낳아도 계속 일을 할 수 있고 커리어상에 결정적인 불이익을 안볼 수도 있다는 확신이 든다면 우리는 아이를 낳을 수도 있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지금 젊은 분들이 공무원 하겠다고 달려든다고 해서 비난하는 것은 불합리하고 불공정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똑똑한 친구들이 왜 공무원을 한다고 생각을 하겠습니까.

보시면 이때 여성의 고용률이 크게 한번 떨어집니다. 아까 말씀드린 여러 고비들 가운데에서 이때가 바로 출산과 어린 아이의 양육이 필요한 시기입니다. 시어머니나 친정 어머님의 도움을 받지 못할 경우에는 거의 방법이 없는 그 시기로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다시 고용률이 오르는데, 이때는 직무환경이 굉장히 나빠집니다. 자료를 찾으며 놀란 것이 여성 근로자의 거의 절반 가까이가 비정규직인데, 그 중의 50%는 심지어 시간제입니다. 남성 근로자 같은 경우에는 26%가 비정규직이고 그 중의 25%가 시간제에요. 지금 여성들의 취업률이 높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지만 그 높은 취업률의 상당수는 바로 이런 불안한 직무환경에 처해있는 분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많이 이야기하죠. 여성 임금은 남성의 64.1%, OECD 최저. 사실 여기 계신 분들 중에서 대기업이나 안정적인 직장에 진입하신 분들께서는 이런 이야기가 별로 강하게 와닿지 않으실 수도 있어요. 하지만 세상에는 그렇지 않은 분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그리고 연봉이 올라갈 수록 한 번의 휴직에 큰 불이익을 받습니다. 육아휴직 한 번 할때마다 승진에서 늦어지고 고과에 반영되죠. 육아휴직 하고 돌아와서 최고 상위 고과 받을 수 있나요? 단언컨대 그런 회사는 없습니다. 육아휴직을 받고 돌아오면 그 팀에서 최하의 고과를 주는 경우가 거의 비일비재합니다. 그리고 그 부분에 대해서 항의할 수 있는 분위기가 전혀 아닙니다.


저도 고과를 주는 입장이 되어 그런 순간을 맞닥뜨렸을 때 많이 고민했고 또 괴로웠습니다. 왜냐하면 저 말고 누구도 이런 부분에 대해서 문제의식을 갖고있지 않은 상황에서 괜한 말로 저만 튀는 고과를 주기가 무척 힘들고, 또 이런 경우에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지에 대한 기준이 없거든요.




문제에 대한 공감이 터져나오다


작년 가을 즘에 어떤 기회로 여러가지 제안을 받았었습니다. 그러던 중 깨달은 것이 있었고 그 소회를 어느 일요일에 욱해서 페이스북에 올렸었어요. 옛날 얘기 한 거죠.  


몇 번을, 수 십 번, 수 백 번, 어떤 날은 하루에도 몇 번씩 관두려고 했었다. 그 때마다 또 출근 길에 올랐던 이유는 일차적으로는 월급 때문이었지만 더 솔직히는 어떻게든 ‘나’로 살고 싶고, 이 사회에 작은 내 자리 하나 정도는 꼭 갖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느라 내 가정, 내 아이를 희생하면서 살았다.

이런 스스로를 감추고 변명하고파 나는 또 내 자신에게, 또 상사, 동료들과 세상을 향해 평생 거짓말을 해왔다. 여자라서 못하는 건 없어. 아이가 있다고 폐 끼치는 일 없어. 나는 엄마, 아내, 맏며느리, 맏딸 역할을 다 하며 회사 일도 열심히 했고 그러니 아무도 날 비난할 수 없어!

그 날의 내 멍청하기 짝이 없는 대답은 아마도 이런 내 과잉적응 탓이었을 거다. 그렇게 스스로도 깜빡 속아넘어갈 만큼 나 스스로를 몰아붙이면서, 눈치보면서 살아온 헛똑똑이가 바로 나다. 나는 명예남성이었고 과잉적응하면서 살아온 바보였다


사실 여기서 말씀드리는 ‘그 날’이 있고나서 거의 그 일주일 후에 올린 글이었는데요. 일주일 동안 저는 그걸 잊어버렸다고 생각했는데 결국은 그 짧은 경험을 잊지 못하고 그동안 쌓여있던 마음이 폭발해버린 것 같아요.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 글에 100개가 넘는 댓글이 달리고 300회 가까이 공유되었습니다. 굉장히 많은 분들이 공감해주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얼떨결에 ‘이렇게 공감하시는 분이 많다면 우리 커피나 한 잔 마실까요?’ 라고 했다가 200명이 모였습니다. 그렇게 ‘일하는 여성들의 Plan C’라는 이름의 Meet-up을 만들고 행사 아닌 행사를 하게 되었죠. 비오고 추운 11월의 금요일 저녁이었기 때문에 아무리 온다고 해도 20명이나 오려나 했던 마음이었습니다만, 놀랍게도 거의 70명 가까운 분들이 오셨어요. 그리고 간증과 분노의 시간을 두 시간 동안 가졌었습니다.



관심사에 따라 7개 정도로 조를 나누고 이야기를 하게 했는데, 조별로 웃음과 탄성, 눈물 같은 것들이 터져나오는 것이 느껴지더라구요. 나중에 돌아가면서 해주신 말씀들 중에 이런 것들이 기억에 남았습니다. 저는 사실 다 아기있는 어머니들일 줄 알았어요. 그런데 오신 분들 중에 약 3-40%가 미혼이었구요, 나머지 기혼이신 분들 중에서도 절반은 아이가 없었습니다. 그럼 여기에 왜 와있느냐구요? 무서워서요. 결혼도 무섭고 아이 낳는 것도 무서워서, 다른 사람은 어떻게 하고 있는지 듣고싶어서 온 거였어요.


한국의 결혼제도에 편입되고 싶지 않아요.

출산, 육아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지레 움츠러들어서 자꾸 안정적인 직장을 찾게 되고 꿈을 버리게 돼요.

경쟁에서 밀려날까봐 육아휴직을 못쓸 것 같아요.

복직하고보니 나는 에이스였는데 더이상 팀장후보가 아니에요.

밀어주고 끌어주는 남성들의 카르텔에 도저히 낄 방법이 없어요.

어느새 내가 최고참 여직원인데 과연 나는 언제까지 회사를 다닐 수 있을까요?


마지막 말씀을 하신 분은 어느 공공 연구소의 박사이신 책임연구원이셨어요. 그 연구원 전체를 통틀어서 40대 중반인 본인이 최고령의 여성이에요. 그 분은 지금 세종과 서울을 오가며 너무나 힘든 가정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본인은 물론 아이들도 힘들어하기 때문에 직장을 그만두고 싶지만, 본인이 그만두면 다른 여성 연구원들이 너무 힘들까봐 그만두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말씀을 현장에서 들었고, 제가 앞에 쭉 말씀드렸던 것들이 사실이라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더 많은 '언니'들이 필요한 이유


그래서 정말 더 많은 언니들이 필요하고 또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보시면 일단 우리나라는 의사결정 권한을 가지고 있는 자리의 여성이 다른 나라와 비교하여 매우 적습니다. 여성임원의 비율이 2.7%, 등기임원 1.6%에요. 외국과는 비교할 수 없는 수치이죠. 이렇게 윗 자리에 여성이 없는데 어떻게 여성이 조직에서 일하는 환경이 만들어질 수 있겠어요?



지금은 트레바리라는 북클럽에서 ‘언니의 사(社)생활’이라는 독서모임을 하나 하고 있는데요. ‘일 잘하고 싶고, 오래 살아남고 싶고, 좋은 동료, 선배가 되고픈 우리’라는 슬로건으로 공지를 올렸더니 정말 많은 분들이 단시간에 모이셨습니다. 그래서 요즘 한 달에 한 번씩 재미있게 책을 읽으면서 이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고있어요.


그리고 저는 그 고민을 바탕으로 해서 ‘언니의 사(社) 생활’이라는 이름의, 일하는 여성을 위한 소셜클럽을 만드는 스타트업을 창업했습니다. 아지트와 커뮤니티와 프로그램이 같이 있는 클럽을 꾸려가려고 하고 있어요. 여러분들의 많은 조언 부탁드립니다.


사실 우리에게는 정말 많은 언니들이 필요합니다. 일단 숫자가 많아야해요. 많은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언니들이 필요하고, 무엇보다 서로 도와가고 연대할 수 있는 언니들이 필요합니다. 오늘 이 자리가 그런 언니들에게 꿈과 희망을 불어넣고 서로 손을 잡을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fin.



작성ㅣ루트임팩트 서소령 매니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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