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염소 머리카락 _ Fez

Morocco Diary / Fez

by 이인


묵었던 호텔의 주인과 옥상 풍경

페즈(Fez)에서 며칠을 보내었지만, 어딜가든지 한 번에 길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늘 다니던 길도 며칠 안 가면 까먹는 내가 이 수백, 수천 개의 골목에서 길을 잃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며칠 전엔 시장을 걷고 있었다. 사람들과 당나귀들과 가죽 무두질 냄새가 뒤섞인 곳에서 맴돌다 보니 어느새 생각지도 않은 시장 중심부로 들어와 있었다. 머리 위 표지판에 Souk henna라고 적힌걸 보니 *헤나 용품을 파는 시장 같았다. 이곳에서도 역시나 구경하기 보다는 구경을 당하고 있었는데 제법 영어를 하는 한 상인이 가까운 곳에 영어를 잘하는 사람이 있다며 나를 안내했다. 길을 가는 동안에 짧은 영어로 나의 이름, 국적 따위를 물어보던 그는 한국에서 왔다는 대답에 반색을 표하며 지금 만나러 가는 이 사람도 한국인 친구가 있다는 얘기를 한다. 사실 그 사람이 한국인 친구가 있는지는 내게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그저 날 붙잡고 가는 이 사람이 그 택시 운전사처럼 인상 좋은 호객꾼이 아니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Salam.(안녕)'


그가 안내한 곳에 도착하자, 이 남루한 시장과는 어울리지 않는 용모의 한 남자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며 손을 내밀었다. 아직 그런 걸 한 번에 캐치할 정도로 오랜 인생을 산 것은 아니었지만 내게 인사를 건네는 그의 눈빛에 선함이 박혀있었다. 이름은 모하메드(46). 귀를 가까이에 대어야 또렷이 들릴 정도로 나지막하게 말을 하던 그는 유려한 영어 실력만큼이나 이야기를 잘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첫 만남 이후로도 자신의 가게에 종종 나를 초대해주었다. Souk henna 중심에 위치한 그의 가게는 아주 좁아서 한 사람이 지나가려면 한 사람은 밖으로 나가야만 하는 아주 조그마한 가게였다. 그리고 나는 거의 매일을 그 가로 네 걸음, 세로 한걸음 반 정도 되는 크기의 공간에서 소꿉장난처럼 소박하지만 감동적인 티타임을 즐겼다.

Souk Henna에서 만난 Mohammed 아저씨

나무 박스를 의자 삼았고, 어디선가 민트 잎을 띄운 아타이 주전자를 내어오고, 오래전 엄마의 찬장에 숨어있던 것과 비슷한 투명한 컵 두어 개가 딸려왔고, 큰 지우개 크기의 하얀 설탕 몇 덩이와 모로코 특유의 손으로 만든 과자가 서빙되었다. 가끔은 마라톤 주자가 꿈이라는 아주 아주 새까만 피부를 가진 아저씨의 나이 어린 친구가 그 대화를 끊어주기도 하였지만, 그는 매일같이 채 소화시키지 못할 정도로 많은 이야기를해주었다.


"아 그렇군요…. 아 그렇군요…."


봉인된 뚜껑의 마개가 열린 듯 쏟아지는 그의 이야기에 그렇게 대답해주는 것이 최선이었다. 대부분의 이야기는 자신이 왜 이곳에 꽂혀 있는지 무슨 연유로 한국인 친구를 두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의 신실한 믿음에 대한 것들이었다. 하루는 그가 지갑에서 자랑스레 무언가를 꺼내어 보여주었다. 그건 한국인 이름이 적힌 다양한 ‘친구들의’ 명함이었다. 아주 오래된 듯 꼬깃꼬깃 했지만, 그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의 입 꼬리는 빙그레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마, 이 친구들도 나를 이렇게 소중하게 생각할 거야.'라는 믿음이 담긴.


그 뒤로도 그는 내가 페즈에 머무는 동안 가는 길목마다 땅콩이나 해바라기 씨앗 같은 작은 선물을 쥐고 나타나곤 했다. 하지만 그것이 나를 좋아한다는 의미가 아니었음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다만 그가 며칠간 들려준 끝없던 이야기의 말미에 등장했던 한 한국 여자의 잔상이 내게서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했지만, 현실적인 문제로 다시는 만날 수 없었다고 했다. 짐작컨대 그녀는 나처럼 긴 생머리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하루는 그가 내게 이런 말을 했기 때문이다.


"우리네 머리카락은 양처럼 곱슬곱슬하지만

너희들의 머리카락은 염소의 털처럼 부드럽지. 정말 아름다워."


Mohammed 아저씨와 가게 주변 상인들 / Souk henna


* Henna

열대성 관목인 로소니아 이너미스(Lawsonia inermis L.)의 잎을 따서 말린 다음 가루로 만든 염색제. 오래전부터 잎은 모발 염색이나 문신 등에 사용하였고, 꽃은 향수 원료로 이용하였다. 문신을 할 경우에는 피부에 어두운 갈색으로 물들며, 일주일 정도 지나면 흔적이 사라진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