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목욕탕 입장료, 900원

Morocco Diary / Fez

by 이인

카사블랑카에서 에싸웨라로, 에싸웨라에서 샤오엥으로 그리고 다시 이곳 페즈로. 내 키만한 백팩을 메고 이곳저곳 탐색하며 다니는 동안 옷들이며 행색이며 머리 속엔 어느 새 잡념 같은 흙먼지들로 가득했다. 늘 가장 저렴한 것만 찾다 보니 대부분의 숙박 시설은 수압이 약해 샤워만으로는 뭔가 부족했지만 어쩔 수 없이 몇달 째 여행자의 근질근질한 비늘을 달고 다녀야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간 눈인사만 나누던 호텔 주인의 친척 뻘 되어 보이는 청년과 얘기를 나누다가 솔깃한 정보를 듣게 되었다.


“한국에만 있는 게 아냐,

여기도 목욕할 수 있는 데가 있어,

함맘 (hammam)이라고”

“하막이라구?”

“하하, 아니, 그건 바보라는 뜻이고,

함맘 (hammam)이라고.

저 꼬마를 따라가면 알려 줄 거야"


HAMMAM을 알려준 호텔 주인의 먼 친척

입장료는 9dh (한화 약 1000원). 마사지 및 물 서비스 50dh. 마치 역사 속의 터키탕으로 시간 여행이라도 온 듯한 큰 정사각형의 실내. 천고는 높았고 수증기로 가득했으며 다리긴 여자, 덩치 큰 여자, 하얀 피부의 여행객, 검은 피부의 아줌마, 빨간 양동이와, 구멍 난 양동이들, 아이들의 울음소리와 아줌마들의 거센 모로칸 엑센트와 웃음소리가 그다지 넓지 않은 그 공간에 뒤 엉켜 있었다.


일단, 진정하자. 말이 통하는 사람은 없어 보였고 지금부터는 무조건 눈치와 바디 랭귀지다. 분위기를 파악하느라 입구에서 정지화면처럼 서 있자니 이윽고 내게 꽂히는 시선들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나는 나와 함께 입장한 여자가 하는 행동들을 눈치껏 따라하며 그 생경한 풍경 속에 괜히 익숙한 척 나를 집어넣고 있었다.


한국에서처럼 일단 옷을 벗어 옷장에 넣었다. 당연한 듯 팬티를 내리려고 하자 순간 사람들의 시선이 그러지 말라며 말리는 눈빛이다. 그러고 보니 다들 브래지어는 벗어도 팬티는 입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팬티를 다시 올렸다. 그리고 눈치껏 양동이 하나를 받아 들고는 엉덩이를 붙일만한 자리를 물색했다. 그 사이, 나와 함께 입장한 여자는 다른 여자들 틈에 뒤엉켜 사라졌고 나는 이제부터 또 뭘 해야 할지 몰라 좌우로 눈알만 굴리고 있었다.


그러자니 옆의 아주머니가 자신의 물을 쓰라며 양동이를 내쪽으로 밀어주었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수도꼭지를 가리키며 저기서 물을 받아와서 바가지로 퍼서 씻어야 한다는 뜻의 팬터마임을 보여주었다. 나는 시키는 대로 순서를 기다려 양동이에 물을 받아왔고 물을 끼얹고는 있었지만 이게 얼마만의 목욕인데, 이래 가지고는 제대로 씻을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래, 여기도 때 밀어주는 아주머니가 있겠지.'


나는 고개를 뽑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때 낯선 시선들 목소리 속에 영어가 섞여 들리는 듯했다. 한 아주머니가 아주 유창한 영어를 하며 내게 다가온 것이다. 그녀에게서 얘기를 듣자니 때를 밀고 싶다면 돈을 더 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다시 카운터로 나가 돈을 내고 탕으로 들어왔더니 덩치 큰 두 명의 여인이 양동이 세 개와 타월을 들고 내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리고는 다짜고짜 그 바닥에 나를 눕히는 게 아닌가. 이미 내 몸은 이 탕 속의 모든 여자들에게 스캔이 끝난 상황이었지만, 내가 바닥에 눕자 포획된 길 고양이라도 구경하듯 내게 시선이 꽂혔다. 그리고 그 두 명의 여인은 내 몸을 반으로 나누어 각자의 영역에서 때를 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말릴 틈도 없이 그대로 뒤집혀 또 때를 밀렸다. 마무리는 양동이 두 통의 물로 끝. 비누 거품이 머리를 감는지날 구경하는 눈빛들로 머리를 감는지도 모른 채 어쨌거나 무사히 씻고 정신없이 타월을 두르고 나왔다.


일러스트레이터 노준구 작가의 HAMMAM 일러스트


'휴...'


이 상황에 겨우 적응하며 한 숨 돌리러 나오는데 아까 도와주셨던 아주머니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일본 사람이야? 함맘은 처음 인가 봐?”

“네, 한국사람이에요. 휴…. 정신없네요”

“아, 한국사람. 영어는 곧 잘 하네,

언제 우리 집에 밥이라도 먹으러 오렴”

“아, 감사합니다.”


상황은 정신없고 장소는 더 어이가 없었지만 여행을 하다 보면 이런 초대 하나하나가 감사한 일이 된다. 게다가 엄마가 해 준 따듯한 밥도 그립던 터였고. 어쨌건 이런 정신없는 와중에도 이런 고마운 초대와 배려는 무조건 감사하게 여기고 받고 보아야 한다. 물론 받았다면 그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이 도리이고. 그녀는 옆의 아이를 시켜 가져온 누런 종이에 그녀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적어 건네주었다. Zakia. 좀 억척스러워 보이기도 한 그녀의 외모와 조금 닮은 데가 있는 이름이었다. 그녀는 그 종이를 전해주고는 쿨하게 집으로 돌아갔고 나는 여유분의 속옷을 미처 준비하지 못한 터라 먼지 냄새 풀풀 나는 카고 바지를 맨 살에 걸쳐야 했다. 어차피 다시 먼지투성이가 될 몸일지언정 상쾌한 날이었다.


이곳을 여행하는 것이 어떤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발길 가는 대로 다니고 또 어떤 곳에서는 잠시 머물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것이 그저 이 나라의 겉만 핥고 가는 것 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그래서 '어, 나도 그 나라 가봤어.' 라는 생색만 낼 수 있으면 된다는 뜻은 아니었다. 좀 더 들여다보고 좀 더 많이 부딪혀 보리라는 의지만큼은 확고했다. 그리고 내 속살까지 보인 오늘, 이 나라와 조금은 더 가까워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스스로를 기특히 여기며 구불구불한 골목길들을 돌아 다시 호텔로 돌아왔다.


Hammam에서 만난 ZAKIA로부터 받은 연락처
그 날의 정신 없음을 기록해둔 일기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