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rocco Diary / Fez
며칠 전, 시장 골목을 걷다가 어디선가 흘러나온 짙은 장미향에 이끌려 나도 모르게 그곳으로 향했다. 잠시 후 멈춰선 곳은 한 옷가게 앞. 그 곳엔 내 또래 정도 되어 보이는 일행이 장미향의 물담배를 피고 있었고 그들은 쭈뼛거리는 날 향해 물담배를 들어보이며 가게 안으로 초대해주었다. 담배를 피는 건 아닌지라, 정중히 거절했지만 짙은 장미 향에 취한건지 어쨌는지 호기롭게 그곳에서 한 시간 여 수다를 떨고 나왔다.
그들 중 무늬르라는 친구는 이름만큼이나 좀 특별한 데가 있었다. 그동안은 사진을 찍으면 그들에게 한 장을 주고, 내가 한 장을 간직하고 그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받아 적고는 했지만 정작 무늬르의 이름은 외우지 못했었다. 그럼에도 이후로도 페즈를 몇 번 왔다 갔다 하는 동안 그는 꽤 여러 번 친구가 되어주고 도움을 주었었다. 자기보다 한참이나 어린 약혼녀의 공부가 끝나길 기다리고 있는 착한 남편이자 그녀가 보낸 사진 한 장에 설레어하는 순정파. 아이 같은 눈빛에 꼬불꼬불한 붉은 머리, 게다가 여행 중이거나 길을 잃은 서양인이 허물없이 대화를 틀 정도로 백인 같은 외모를 가진 장난기 많은 친구였다.
오늘은 그 무늬르 일행을 초대하기로 한 날이다. 호텔 주인장에게 부엌은 허락을 받았고 궁리 끝에 간장 닭볶음탕을 준비하기로 했다. 그간 다양한 한국 음식을 시도해 보았지만 재료가 마땅치도 않았고 닭은 범세계적으로 사랑받는 고기이며 간장 역시 달콤 짭조름한 것이 여기서 먹어본 음식들과도 좀 비슷하겠다 싶어서 고심 끝에 고른 메뉴였다. 마침 프랑스 기업에서 운영하는 두 개의 대형 마트 브랜드 중 하나인 마르쟝(Marjan)도 지금 숙소와 가까운 곳에 있었다. 어느 도시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마트가 아니었고, 골목골목의 오래된 풍경들과 당나귀들의 느린 걸음과 길바닥의 똥들에도 살짝 지루해질 즈음이라 오래간만에 현대 문물에 심취한 신여성의 심정으로 그곳을 향했다. 없는 예산을 쪼개고 계산기를 두드려가며 사야 할 것들의 리스트를 작성하고 호텔을 나섰다.
서울에서 늘 하던 대로 익숙하게 대형마트에 들어서긴 했지만 겨우 세 벌의 옷을 돌려 입으며 몇 개월을 지내고 있는 나의 행색은 남루해져 있었다. 마트의 밝은 조명이 나를 내리쬐자 거울 속 내가 확연히 보였다. 잠시, 생각이 거울 속에 멈췄다. 그리고 이내 ‘맞다, 간장. 간장이나 사서 빨리 돌아가야지’라는 생각이 들어 다시 마트 이곳을 훑고 다니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국산도 아니고 중국산만 있다는 그 소이 소스, 간장이 아무리 찾아봐도 눈에 뵈질 않았다. 그래서 몇 명의 점원을 붙잡고 물어보기까지 했지만 지금 이 여자가 하는 말이 한국말인지 중국말인지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한두 마디 섞고는 자기 갈 곳으로 흩어지기만 할 뿐 당최 의무감을 가지고 ‘아, 간장이라면 이곳으로 오세요!’ 하는 사람은 한명도 없었다. 간장 닭볶음탕을 해야 하는데 간장이 없다면 대형 마트가 다 무슨 소용이람. 차라리 구 시장을 이 잡듯 훑어봐야겠다는 생각으로 발길을 돌리려던 그때, 복도 저 끝에서 구원의 영어 한줄기가 나를 비추었다.
“Uh... You need soy sauce?”
목소리와 함께 코너를 돌아 나오는 금발머리의 백인 남자와 가무잡잡한 피부의 여자. 긴 대화를 나누진 않았지만 무척 선해 보이는 선남선녀 커플이었다. 나는 (지금 내 꼴은 이렇지만) 한국에서 왔고, 지금은 잠시 페즈에 머무르고 있다고 설명했고 그들은 여행 가이드를 하며 모로코에서 지내고 있다며 혹시 시간이 된다면 자기네 동네가 있는 곳으로 놀러 오라고 또 이 남루한 행색의 여인네를 초대해 주었다.
그들이 지내고 있다는 이프란(IFRANE)이라는 곳은 론리 플래닛에 잠깐 언급이 되어 있긴 하지만 이런 우연이 없었더라면 어쩌면 그냥 지나쳐버릴 수도 있었을 작은 동네였다. 페즈에서의 남은 일정을 보내고 바로 그곳으로 가겠다고 했다. 서로 약속을 확언하며 일단 그곳에서 우리는 헤어졌다. 내게 친히 간장을 찾아 하사하시고 그들의 주소까지 내어주며 친절히 내 여행의 다음의 루트까지 정해준 마르쟝 마트의 소이 소스 인연, Tomas과 Fazia. 고맙게도 나의 모로코 여행은 이렇게 우연이라는 희박한 확률이 만드는 인연들의 연속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간장을 샀고 시장에서 온기가 채 가시지 않은 갓잡은 닭도 준비했고 바디 랭귀지로 당근이며 양파며 감자 등을 사서 호텔로 돌아왔다. 무늬르는 전화를 걸어와 친구들을 더 데려가도 되겠느냐고 물어봤다.
“그럼, 여러명이면 좋지. 참, 빵 두어개만 사올래?”
“좋아! 오케이!”
여섯 시 즈음, 나의 모로코 여행의 처녀작 요리인 간장 닭볶음탕은 인터넷 레시피의 도움을 받아 어설프게 완성되었고, 호의인지 진심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간장이라는 소스 맛을 처음 본다는 무늬르와 일행의 반응도 굉장했다. 어제와 같은 하루를 시작했지만 어제와 달리 또 놀라운 일들과 놀라운 인연을 만들어준 페즈에서의 하루가 감사히 저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