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간장 인연

Morocco Diary / Ifrane

by 이인

“이프란(Ifrane)에 도착하면 사자상 앞에서 만나”


Tomas와 통화를 하고 짐을 꾸렸다. 이번엔 Tomas와 Fazia가 초대한 '이프란'이라는 동네에서 잠시 머물러 보기로 했다. 천 개가 넘는 페즈의 골목에서 수 천 가지의 색깔과 냄새와 사람 그리고 당나귀들을 질릴 만큼 보았으므로 더 이상의 미련 없이 그 미로를 빠져나와 택시에 올라탔다. 택시에 앉아 잠시 론리 플래닛을 펼쳐보니 이들 부부가 사는 곳은 현지인들도 딱히 갈 일이 없는 동네였다. 하지만 워낙 눈이 많이 오고 그 때문에 건물 양식이 독특해서 나름 유명세가 있는 곳이라고 했다.

이프란(IFRANE)으로 향하는 쁘띠 택시의 운전기사와 창밖 양떼들

Tomas가 만나자고 했던 마을 입구의 사자상은 이곳의 랜드 마크를 담당하고 있는 것 같았다. 사자상 앞에서 Tomas와 Fazia를 기다리며 동네를 휘 둘러보니 다른 곳들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동화책에 나올 것 같은 뾰족한 지붕이 특징인 이 곳은 론리 플래닛의 설명을 빌리자면 미들 아틀라스 근처에 위치하고 있는 까닭에 아프리카의 스위스라 불리며 모로코 현지인들 보다는 외부인들이 더 많이 거주하는 지역이라고 한다.

어쩐지 그래서 몇 벌 없는 옷을 죄다 껴입었는데도 오들오들 떨 수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1930년대 프랑스인들에 의해 형성되기 시작한 유럽 스타일의 도시로 눈이 많이 와서 스키를 타기 위해 관광객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라니 이들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아마 이 동네는 생각할 것도 없이 그냥 패스해버렸을것이다.

나의 옷차림만큼이나 황량했던 이프란의 황량한 택시 정류장
이프란에서만 볼 수 있는 뾰족한 지붕의 집들

‘Hey!”


십 여분이 지났을까, 며칠 만에 Tomas와 Fazia를 다시 만났다. 그들은 여전히 따듯한 미소로 마트에서 보다 더 형편없는 차림으로 사자상 앞에서 떨고 있는 나를 반겨주었다. 집으로 이동하는 중에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어보니, 그들은 여행 사이트를 운영하며 지금은 모로코에서 여행 가이드를 하고 있는 부부였다.


“여기야, 여기에서 지내면 돼.

짐은 여기 내려놓고 원하면 샤워부터 해”


집에 도착하자 Tomas는 내게 안방을 내어주며 말했다. 금전적인 이유로 늘 좋은 호텔보다는 저렴한 숙소를 찾아야 했던 지난 몇 개월은 종잇장 같은 이불에도 깨끗하기만 하면 감사했고 수도꼭지에서 따듯한 물이 나온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한 날들이었다. 하지만 지금 내 눈 앞에는 지난 몇 개월간 모로코에 오직 적응하느라 욕심 부리지 않았던 그 모든 것들이 펼쳐져 있었다.


보송보송 소리가 날 듯한 새하얀 침구. 따듯한 라디에이터. 높은 천정과 세련된 인테리어. 아늑한 욕조. 정말 몇 개월 만에 만나는 아늑함인지. 게다가 간이침대는 자기네들이 쓸 테니 있는 동안에는 마음껏 침대를 쓰라고 내어주는 게 아닌가. 나는 예의상 두어 번 그들의 호의를 거절하다가 그냥 그 친절, 마음껏 즐기다 가겠다는 쪽으로 마음을 먹었다. 그리고 이 두 은인들을 위해 나의 특제 간장 닭볶음탕을 꼭 해주겠다는 결심도.


샤워를 하고 밀린 빨래를 돌리고 거실로 나오자 따듯한 저녁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 한 끼는 그간의 허기와 바닥에 깔려있던 외로움과 서러움을 다 채워주는 저녁 식사였다. 그리고 오래간만에 단어와 단어의 나열이 아닌 장시간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나고 또 나의 직업까지도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 참으로 간만에 이런저런 수다를 떨었다. 마치 미국에 있는 언니네 식구를 방문한 것처럼 편하고 또 따듯한 분위기에 허락도 없이 혼자 마구 정을 주고 있었다. 얘기 중에 Tomas는 제주도에서 일 년간 영어를 가르친 적이 있다고 했다.


“직감적으로 한국 사람인 것 같아서 말을 걸었지.

그래서 흔치 않은 일이지만 초대까지 한 거야”


“페즈의 친구들에게 간장으로 닭요리를 해주려고 처음 마르쟝엘 간건데, 넌 말 그대로 내 구원자였지"

함께 씻겨지고 싶었던, 여행 중 처음으로 세탁기를 돌렸던 날.

다음날 Tomas와 Fazia는 산 위에 위치한 호수를 보여주겠다고 했다. 큰 기대를 갖고 길을 나섰지만 엄청나게 쌓여있던 눈이 녹아 산길은 그야말로 진창이었다. 낡은 컨버스로 진흙 길을 통과하고 통나무를 넘고 서너 마리의 산 다람쥐를 본 다음에야 그들이 얘기한 그 이색적인 풍경을 맞이할 수 있었다. 꽤 넓은 운동장 같은 원형의 공간인데 바닥은 갈라져 있었고 아무것도 없는 곳이라 처음엔 꽤나 당황했지만 Tomas의 말에 따르면 이곳은 원래 엄청난 크기의 호수였고 지금은 호수가 바짝 마른 상태라 주로 운동선수들이 운동하러들 오는 곳이라고 했다.


“와, 이 정도 크기의 호수라면 정말 컸겠는걸?”


나는 푸른 물이 가두어져 있었을 이곳을 상상하며 앞서가는 그들을 향해 말했다.


함께 산책했던 호수 자리의 풍경
앞서 걸어가는 Tomas와 Fazia 그리고 나

그때, 저 멀리 내 눈을 의심케 하는 먼지바람이 보였다. 아니, 가만히 보니 말을 탄 기병대들이었다. 언젠가 제주도에 갔을 때 말을 키우는 누군가가 그런 이야기를 해주었다. '말은 아랍의 말들이 최고지, 뼈대가 다르다고. 무식하게 덩치가 크지도 않고 미끈하고 탄탄하거든.' 저 멀리서 그 이야기 속의 말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미끈하고 탄탄한 기병대들이 올라탄, 미끈하고 탄탄한 대여섯 필의 말들이 우리 주위를 감싸고 섰다.


Forest Ranger. Tomas가 이들은 숲을 지키는 경찰관 같은 사람들이라며 인사를 시켜주었다. 그들은 혹시 무슨 일이 있나 해서 저 멀리서 여기까지 달려온 거라며 싱긋 웃어주었다. 그리고는 영화에서 보듯 절도 있게 거수경례를 하더니 경기에라도 출전하듯 앞다투어 저 멀리 지평선으로 흩어졌다. 낯선 풍경에 한참을 눈을 떼지 못하고 먼지 바람이 사라질 때까지 그들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리고 그들을 찍었던 2500원짜리 토이 카메라를 만지작거리며 흥분이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Tomas와 Fazia에게 말했다.


"나중에 이 사진이 나오면 이런 제목을 붙여야겠어. Hello, Forest Strangers!"

지도를 잠시 넣어두면
사람을 향해 걷게 된다.
사람과 사람을 이으면
나만의 지도가 그려진다.

1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