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압두라힘의 샤넬 시계

Morocco Diary / Rabat

by 이인

배낭 여행자로 하릴없이 매일을 보내는 나를 제외하고 이 집의 8명의 친구들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대학원에 수업을 갔다가 점심이 되면 시간을 쪼개어 집에 들러 간단히 요기를 하고 돌아가곤 했다.


오늘 점심때도 이 풍경은 마찬가지였다. 없는 시간을 쪼개어 요기를 하러 온 압두라힘은(Abedulahim) 점심은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내게 말을 건넸다. 오늘 저녁엔 고향에 있는 피앙세를 만나러 간다고. 그것이 얼마나 설레는 일인지는 압두라힘의 눈빛이 이미 말해주고 있었기에 그를 보는 나도 입꼬리가 쓰윽 올라갔다.


압두라힘은 함께 지내는 친구들 중, 유난히 눈이 맑고 예쁜 데다가 마음 씀씀이 마저도 그러해서 '예쁜이'라 부르고 있는 친구였다. 저녁 즈음 수업을 마치고 돌아온 압두라힘은 주섬주섬 다시 옷을 챙겨 입고는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곧 돌아왔다. 갑자기 내렸던 보슬비를 피하지 못해 머리며 외투 위에 송골송골 빗방울이 맺힌 채로 돌아온 그의 손에는 작은 비닐봉지가 들려있었다. 그리고는 활짝 웃으며 이 집에서 유일한 여자인 내게 내보이며 물었다.


"내일 피앙세 만나면 주려고 샀는데, 어때?"


그가 내민 건, 샤넬 시계였다. 시장에서 만원도 채 하지 않았을 짝퉁 샤넬 시계였다. 나는 잠시 멈칫했다가 압두라힘을 향해 미소 지으며 답했다.


"와, 시계네?"

"응. 그녀가 아직 학생이라 ... 시계가 없거든."


그래. 샤넬이냐 짝퉁이냐 따위는 중요치 않은, 압두라힘의 마음이 담긴 소중한 선물. 그가 내게 내민 것은 샤넬 시계가 아닌, 시계였다. 나는 그제야 그녀도 분명히 좋아할 거라며 압두라힘의 반짝이는 눈을 보며 함께 활짝 웃었다.


"압두라힘, 너 사진도 같이 선물하면 어때?


나는 즉석카메라를 꺼내 (내가 시키긴 했지만) 쑥스럽게 손으로 하트 모양을 가슴에 품고 있는 압두라힘의 사진을 찍어 주었다.


여행 중의 나는, 사회에서 규정 지어준 껍데기를 버리면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다. 광고계에선 꽤나 이름 있던 회사명도. 특별하다고 여겨온 나의 직업도. 그건 샤넬을 알지 못하는 압두라힘처럼, 누군가에는 아무 의미도 없는 것들이었다. 이 낯선 땅에서 내가 값비싼 명품 가방을 들고 다닌다 한들, 그것이 마라케시의 시장에서 구입해 매일 같이 메고 다녔던 손뜨개 지갑의 가치에 비견할 것이 못 되는 것처럼 말이다. 샤넬 시계가 아닌 시계를 보는 마음. 그래서 나의 눈빛과 말과 마음으로 스스로의 가치를 더 단단히 지키는 마음. 그 깨달음은 지금까지도 내 인생의 중요한 하나의 가치관이 되어 주었다.


그날 저녁 압두라힘은 샤넬보다 더 가치 있는 샤넬 시계와 내가 찍어준 사진을 품에 넣고 피앙세를 향해 고향으로 떠났다.


아, 믿기진 않겠지만 우리 예쁜이 친구의 나이는 스물두 살이다.

압두라힘의 피앙세를 위해 찍어준 즉석사진
압두라힘은 내가 우울해 하던 날엔 활짝 눗으며 손수 만든 푸딩을 선물해주기도 했다. 일기장에 소중히 간직해둔 푸딩 포장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