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인가?
야, 나는
MBTI 결과는 외향인인데
사실 내향인 같아
파워 인싸 친구가 했던 말이다. 대단한 비밀인양 소곤소곤 말하는 친구를 보자니 처음 보는 사람과 서슴없이 친해졌던 그녀의 과거가 생각났다. 어이가 없으면서도 의미는 이해할 수 있어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은 쉽게 정의 내릴 수 없으니까.
“Who am I?”
살아갈수록 나라는 사람이 고정값으로 정해져 있지 않음을 알아가고 있다. 자기 자신을 모르겠다는 친구처럼, 나 역시 어떨 때는 먼저 다가가 관계를 맺는 외향인이 되기도 했고, 어떨 때는 세상 조용한 목석이 됐다. 이게 왠지 나인 것 같다고 정해놓은 스스로의 모습은 타인과 환경에 따라 쉽게 파괴되고 생성됐다. 회사에만 가면 MBTI가 바뀐다는 사람들을 아주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처럼.
종종 TV에 나오는 연사들은 말한다. “자기 자신을 알아야 해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떨 때 행복한 사람인지, 나는 무엇을 가장 좋아하고, 견딜 수 없는지. 스스로가 자기 자신에 대해 잘 알고 있다면 삶에서 헤매는 일을 그만큼 줄일 수 있으니까. 그래서 나 역시 현재의 나는 도대체 누구인지 탐색하곤 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몇 줄로 정의 내리고자 했다.
하지만 이것은 내 인생에서 절대적인 의미는 없었다. 나는 상대에 따라, 상황에 따라 변화하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나는 고정값이 아닌 변수다. 그것도 끊임없이 바뀌는.
대학교 1학년 때, 자주 갔던 미용실 이모가 남자를 소개해줬다. 같은 학교를 다니는 세 살 연상의 남자였다. 그는 한 번씩 자신의 다이어트 썰을 풀곤 했다. 과거 13kg 정도 감량했는데 물을 많이 마시려고 정수기를 볼 때마다 세 번씩 마셨다고. 비법을 들은 후 다이어트를 꿈꿨던 나 역시 정수기를 보면 최소 물 3잔을 마시는 습관이 생겼었다. 그와 오래 연락하진 않았지만, 그 잠깐의 만남에도 나에게는 새로운 습관이 형성됐다.
그 후로도 다양한 사람을 만났다. 새로운 가족을 만났을 땐 사랑의 의미를 재정의하고, 삶의 태도가 변했다. 친한 친구가 진로를 틀면 나 역시 진로를 재검토하고 새로운 직업을 찾기도 했다. 남들에게 어떻게 보이는 지가 중요한 사람을 만났을 땐 삶의 기준들을 외부에 정하기도 했고, 자신의 삶을 묵묵히 살아가는 사람을 만났을 땐 현재 하고 있는 일에 집중했다. 내가 함께한 상대에 따라 삶의 태도와 욕망, 심지어는 세상을 바라보는 눈까지 변화했다.
아주 잠깐의 시간을 함께한 관계마저도 어떤 형태로든 서로에게 흔적을 남겼다.
그렇게 알게 됐다. 만남이란 단순히 시간을 함께하는 것을 넘어 서로의 삶에 영향을 줄 수 있게 허락하는 것임을. 그리고 나라는 사람은 결코 독립적인 하나의 존재가 될 수 없으며, 타인으로부터 만들어진다는 것을. 한없이 결합됐다가 해체되며 나 자신은 새롭게 탄생한다.
영화감독이자 사진가 니키리는 대학원 과제 ‘프로젝트’로 뉴욕 예술계에 이름을 알렸다. ‘프로젝트’는 다양한 정체성의 집단에 들어가 직접 생활하며, 삶의 모습을 포착했던 작품이다. 그녀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동안 레즈비언이 되기도, 스트립쇼 걸이 되기도, 히스패닉 여인이 되기도 한다. 시리즈와 장르를 넘나 들며 달라지는 니키리의 모습을 보자면 인간이 얼마나 상대와 상황에 따라 유동적으로 변화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종종 나라는 정체성을 찾아 헤맨다. 하지만 그런 시간이 아까울 정도로 너무 쉽게 환경에 따라 건설됐다, 파괴되는 스스로를 발견할 수 있다. 완벽히 고정된 나의 모습은 없으며 언제든 변화할 수 있다. 20살과 26살의 나는 그래서 이토록 다른 사람인가 보다.
정해지지 않은, 고정값이 아닌 나.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나.
앞으로도 상황에 따라 나의 여러 모습들이 탄생하고 소멸될 것이다. 노래 <가시나무>의 가사처럼, 내 속엔 내가 너무나도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