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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꿀별 Feb 11. 2020

나의 예스맨 탈출기

감당할 수 없을 때 외치는 NO가 너를 구원하리니

나의 별명은 예스맨이었다. 뭐든지 잘 먹는 식성과 어이없는 상황에 웃음부터 나오는 성격 덕에 나는 어떤 상황이든 유연하게 넘기곤 했다. 그런 내가 자주 했던 말은 당연히


음.. 나는 다 좋아. 다 괜찮아. 너 하고싶은 대로 하자

강조하지만 저 말을 할 때는 언제나 다 좋았고, 다 괜찮았다. 사실 불편한 상황 자체를 만들기 싫어하다 보니 더욱 이런 말에 방점을 찍고 살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다 보니 내 친구들은 나를 좋게 말하면 예스맨 나쁘게 말하면 호구로 칭하곤 했다.


나 역시 이런 내가 너무 신기했다. 웬만하면 화도 안 나고, 그 정도는 넘어갈 수 있는 나 자신이 신기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정말 뭐- 든 지 괜찮은 사람인 줄 알았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



어느 날 학교에서 유럽에 보내주는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됐다. 지원금을 빵빵하게 받고 한 달 동안 영국에서 어학연수를 하며 지내는 프로그램이었다. 영국에서 어학연수를 하면서 주말엔 그 주변 국가나 런던으로 여행을 갈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다. 솔직히 유럽에 큰 관심은 없었지만, 내 인생 언제 이렇게 유럽에 가보겠냐는 생각으로 들떠있었다. 동시에 약간의 불안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아무도 모르는 사람들과 가서 한 달 동안 지낸다니. 특히 걱정인 것은 유럽여행을 혼자 다니는 것이었다. 한 번도 안 가본 세계를 혼자 돌아다녀야겠다고 결심하기란 어려웠다. 그때 마침 친구는 자기 동기도 거길 간다며 소개해주겠다고 말했다.


오! 정말 좋지. 나 역시 혼자 두려울 바엔 둘이 가는 게 좋을 거 같다는 판단에 꼭 소개해달라 했다. 그렇게 소개받은 친구와 여행 계획을 세웠다.


예스맨인 나는 그 친구가 가자는 계획에 별 불만 없이 OK를 했고, 중간중간 너무 빡센 일정인가..? 하는 의문을 가졌지만, 괜찮겠지 와 어떻게든 되겠지 라는 생각으로 걱정을 뒤로 넘겼다. 그리고 여행을 갔다.


그런데! 젠장! 그 친구와 나의 여행 스타일은 매우 안 맞았다. 그 친구는 빡센 일정을 소화하길 원했고, 나는 여유 있게 즐기는 여행을 원했다. 중간에 따로 다니거나 하는 타협점을 찾기는 했었지만 낯선 곳에서 여행 스타일이 맞지 않은 친구와 다니는 것은 너무 힘든 일이었다. 이미 돌이키기엔 마지막 주까지 숙소, 비행기 예매까지 끝난 상태였다. 돌이킬 수 없었다.


나는 무엇이든 괜찮은 예스맨이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구나.. 이래서 다양한 사람을 만나야 하는구나..


모든 일정을 끝내고 숙소에 도착해서 눈물을 찔끔 흘렸다. 답답한 마음이 컸다. 내가 너무 한심했다. 귀찮다는 이유로 나의 모든 일정을 그 친구에게 맡겼던 지난 과오들이 생각났다. 탓할 사람은 오직 나뿐이었다.


사실 내가 나의 선택들을 타인에게 맡긴 것은, 그래서 눈물을 찔끔 흘린 것은 그 날이 처음이 아니었다. 무수히 많은 나날들이 있었다. 대학에 입학했을 때도 그랬다. 주변 사람들의 의견을 물어보고 그에 따르곤 했다.


주변 사람들의 의견을 반영하는 게 잘못된 건 아니다. 하지만 내 문제는 온전히 선택을 감당하기 싫은 마음에 타인에게 맡기는 것, 내 선택권을 쥐어주는 것 그 자체였다. 많은 시행착오 끝에 끝에도 그걸 못 깨닫고, 아니 어쩌면 깨달았지만 실천하지 못하고 살았다. 그렇게 영국에서 그 종지부를 찍은 것이다.



그렇게 한국에 돌아온 후 나는 웬만하면 어떤 결정을 내릴 때 친구들, 가족들과 상의를 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내 선택에 온전히 책임을 져야겠다는 확신을 하게 된 것이다.


요즘엔 호불호를 만들고, 나의 취향을 만들고, 거절을 배우고 있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단 하나다. 나의 선택을 타인에게 맡김으로써 상처 받는 일을 반복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하루에도 수많은 선택의 순간들이 쏟아진다. "오늘 점심 뭐 먹을래?"/ "이번에 국장에서 하는 멘토 멘티 참가할래?" / "방 정리할래 말래?" 숱하게 덮쳐오는 질문 속에서 하나하나 선택을 내리는 것은 쉽지 않다. 특히 모든 일을 내가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감이 생길 때는 더더욱 속수무책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더 어려운 질문일수록 스스로 헤쳐나갈 수밖에 없음을 이제 안다. 그렇게 나만의 답을 내리고, 나만의 선택을 해야 함을 이제 안다. 그렇기에 오늘도 나는 고민하고 또 고민해서 스스로 선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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