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엄마가 사고가 났으면 좋겠어

부제 : 영어공부 시작

by Root Scent

매서운 찬 바람이 매해 껴입는 검정 패딩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정신없이 핸드폰의 시계를 보다가 달리다가 김이 서린 안경만 애꿎게 고쳐본다.

어린이집 문 닫는 시간 저녁 7시.

시계가 깜빡이는 6시 45분 아슬아슬하다.


거칠게 어린이집 문을 열고 들어가니 눈물이 그렁그렁한 아이가

내지르는 비명 같은 한마디,


"엄마가 사고가 났으면 좋겠어"


아이의 외마디 소리에 놀라지도 않고 거칠게 손목을 잡고 아파트 단지를 나온다.

아이는 내 손을 홱 하고 뿌리친다.


"엄마 너랑 집에 안 가 혼자 갈 거야. 엄마 미워 "


겨우 똥오줌 가리는 아이에게 나는 기어이 이렇게 말하고 말았다.

"그래 그러면 혼자 가.

엄마가 늦어서 미안해, 그런데 네가 엄마 인생을 대신 살아주지는 않잖아"


도대체 그 말을 그 어린 아이이게 ,나는 무슨 정신으로 한 걸까.


Capture4.JPG 공부하는 엄마가 싫었던 아들


강남역에 위치한 영어학원이었다.


닭장처럼 쳐진 칸막이 사이로 나보다 10살은 족히 어려 보이는 학생들이 연신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문제를 풀고 있다. 아이를 낳고 나서 뿌예지는 시야와 좋지 않은 기억력으로 리딩 지문을 잡고 있자니 숨이 턱- 하고 막혀왔다. 언제나 고질적으로 막히는 과학지문. 읽고 나서 문제로 가보지만 역시나 또 까먹었다. 새대가리가 분명했다.


벌써 몇 달 쨰 듣는 브리티시 지문이지만,

렉 걸린 시디 플레이처럼 탁탁하고 끊어지는 그네들의 발음이 여전히 적응이 안된다. 한 문장을 듣고 10번을 따라 하리라 다짐을 해 본다. 5번 정도 넘어가니 목이 쉰다. 시계가 5시를 가리킨다. 물 한 모금 들이키고 잠시 희뿌얘지는 머리를 부여잡고 눈을 감아본다.


- 헉 6시다.


잠시 눈만 감았을 뿐인데 시간은 야속하게 아이 하원 시간을 한참 넘긴 채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하철 역으로 숨도 못 쉬고 뛰어가니 바로 전에 내가 타야 하는 전철이 떠나버렸다.

눈물이 나왔다.


눈치 없게 배도 고팠다.

손톱을 깨물어 본다.


이 짓을 얼마나 해야 하는 걸까.


남들은 3개월만 해도 나오는 점수를 나는 도대체 몇 번을 더 쳐야 원하는 점수가 나오게 되는 걸까.


왜 나는 지문을 10번 읽어봐도 이해가 안 되는 걸까.

왜 나는 듣고 들어도 다 까먹는 걸까.

왜 나는 단어를 외워도 1시간 지나면 기억을 못 하는 걸까.

왜 나는 나는 나는 왜..


명품백을 사도 몇 번을 살만큼 시험 응시비를 날려 버리고 있는 나는 차라리 이제 그만하자.

지키지도 못할 다짐도 해본다.


그만 못 둘 거다.


내가 안다.



" 엄마가 사고가 났으면 좋겠어 "


울다가 지쳐 잠든 아이의 머리카락을 가만히 가닥가닥 만져본다.

땀에 절여 축축하다.


급하게 해 먹인 밥에 국이 소화가 되기도 전에 품에 안겨 잠든 아이의 얼굴에

눈물 한 방울이 툭하고 떨어졌다.


"미안해 엄마가..

엄마가 너무 미안해 진짜.."


가만히 아이를 보듬고 있는데 갑자기 내일까지 외워야 할 단어 한 묶음이 생각이 났다.

손등으로 스윽하고 콧물을 닦고 아이를 안아 들고 단어장을 들고 왔다.

아이가 먹던 김치 한 조각을 입에 배어 물고 벌게진 입으로 단어를 읽어본다.

김칫국물이 뚝하고 자고 있는 아이의 이마에 떨어졌다.


눈에서 나오는 물이 뚝하고 단어장에 떨어져 번졌다.


옆에 있어주지 못하는 엄마. 공부를 해야만 하는 엄마. 친구들이 하나둘씩 떠나는 어린이집에 오도카니 기다리게 하는 엄마. 책도 안 읽어주는 엄마. 돌돌이 안경을 쓰고 매일같이 미드를 틀어놓는 엄마. 차라리 워킹망이어서 일이라도 하면 명분이라도 서지. 이건 되지도 않는 도박처럼 돈 써가며 시간 들여가며 하는 공부를 한다고 이리저리 분주한 엄마를 둔 녀석에게는 나는.


차라리... 사고라도 나서 내 옆에 있어주었으면 하는 엄마였다.


입에 있는 김치를 씹었다. 눈물과 섞여 비릿한 맛이 났다.

목에서 넘기고 나직이 뱉어보는 영어단어가 머릿속에 들어 올 리가 없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일단 칼은 뽑았고, 시험은 치러질 터였다. 의미 없이 그저 적어만 갔다.


Archaeological

dwindle

ascertain

obsolate

lethal

inflate

intrig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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