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EBS 교재=냄비받침

부제: 엄마도 숨 쉬고 싶어

by Root Scent

중고서점을 찾았다. 엄마라는 꼬리표는 어쩌지 못하는 건지 이유식 코너에서 부지런히 책장을 넘기고 있는데 누군가 떨어뜨리고 간 EBS 문법 강의 책이 눈에 띄었다. '하여간 제자리에..' 하는 마음으로 가져다 놓으려는데 고3 때 징글징글하게 풀어 재끼던 문제집을 들여다봤던 그 풋내 나는 기억이 떠올랐을까. 아이 이유식 책과 함께 나란히 들고 온 문제집. 참... 지금 생각하면 정말 공통분모가 하나 없는.


그렇게 팔랑팔랑 들고 온 문제집은 자기 집을 찾지 못하고 냄비 받침으로 쓰였다 가끔 아이의 종이비행기가 되었다.


아이가 잠든 12시. 고요히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에 물 한잔 들이켜고 조용히 소파에 앉아 있자니 팔이 뻐근했다. 널브러져 있는 문제집을 보자니 웃음이 나왔다. '참.. 뭘 어쩌자고 널 들고 왔니 나는. 대책 없다.' 들여다보면서 쓴웃음을 짓고 있던 나는, 한 손으로는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조용히 들여다본다.

들여다봐도 지문이 눈에 들어오지는 않는다.

더 졸리다. 자러 가야지 하는데


"음마아..."

아이가 낑- 거리며 찾는 걸 보니 새벽 서너 시가 되었나 보다. 괜히 나와서 허튼짓을 했나 하는 머쓱함에 어렵사리 누워서 잠을 청해 본다. 그리고 왠지 육아가 아닌 다른 길을 생각하는 못된 엄마가 된 것 같아 아이의 발도 공연히 만져본다. 고요히 생각에 빠졌다. '너 도대체 무슨 일을 꾸미려는 거야'.




이튿날 나는 그 중고 서점을 다시 찾았다.


EBS 문제집이 떨어졌던 그 코너에서 서성였다. 그리고 가장 만만해 보이는 영어 소설책 하나를 들고 서성였다. 영어 소설책이라고는 나와 관계가 멀었다. 무슨 정신이었는지 근처 스타벅스로 들어가 책을 폈다. 한 문장도 제대로 읽기 어려웠다. 한 문장에 모르는 단어가 세 개가 넘었다. 좌절하지도 않았다. 내가 못 읽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그냥 모르는 채로 읽어 내려갔다. 정말 재미라고는 약에 쓰려고 해도 쓸 수가 없었다.



그렇게 3일이 지나고 나는 단 한 문장도 이해 안 되는 그 책을 필사하고 있었다.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저 베껴 썼다. 그러다 지치면 소리 내어 읽다가 다시 썼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에게 쳐해 진 모든 상황을 부정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 와중에 그저 본인에게 의미 있는 한 가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커피를 잘 못 마신다. 화장실 바로행. 그나마 커피숍이 아니면 책도 안 필까 봐서


스탬프 카드가 3장이 넘어가고 계절이 넘어가가 있었으며 필사본은 책 두께만큼 두꺼워져 있었다.

나는 한 살을 더 먹었고 아이는 엄마가 무슨 일을 벌이고자 하여, 본인을 어린이 집에 맡기는지 알지 못했다.


그렇게 돌아와 아이와 저녁을 먹고 재우면 다시 고스란히 EBS 책을 폈다.

수능이 얼마 남지 않은 실전자들을 위한 문제풀이 듣기 평가를 BGM(배경음악)으로 깔고 가끔은 흥얼거리며 다 마시지도 못할 커피를 내렸다. 그러다 밤이 주는 정적과 함께 문제를 풀어 나갔다. 물론 거의 다 틀렸다. 이 또한 별생각 없이 플러 갔다. 나는 그저 그 순간만큼은 '나'로 존재하고 싶었던 것 같다.




다시 아침이 되면 아이를 유치원에 보냄과 동시에 살아있는 화분처럼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넷플릭스를 켜 미국 드라마를 봤다. 내용마저 무거우면 금방 때려치울까 싶어 한글자막을 켜고 내 스타일에 맞는 여배우가 하는 깜찍한 대사를 몇 번이고 돌려봤다. 발음은 구리지만 왠지 그와 같은 기분으로. 찰라이지만 그 안의 배우가 되는 순간.


캘리포니아 그 어딘가 야자수 사이에 쏘아내리는 햇빛을 상상하며.

아둔한 형광등 아래 엄마는 소리 없이 반짝였다.

그로부터 정확히 2년 후, 캘리포니아 남부 어귀 야자수 아래에 서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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