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멸에 대하여

2018년 4월 17일

by 알렉스

더 이상은 못 참겠다. 며칠, 몇 주, 아니면 몇 달 혹은 몇 년씩 참아왔는지도 모르겠는 것들을 이제는 그냥 이야기하고 말겠다. 그렇게 대단한 것도 아니다. 그래도 말하고 나면 말하기 전보단 낫지 않을까. 말하는 게 아니라 쓰고 나면, 쓰고 나서 내가 다시 읽고 나면, 그러고 나면 조금 낫지 않을까. 내가 경멸하는 것들에 대하여. 나는 이런 걸 이야기하는 게 창피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창피한 일인지 뭔지 이젠 잘 모르겠다. 이야기하지 않고는 참을 수가 없다. 너무 경멸스럽기 때문에 그냥 다 쓸 것이다.


당연히 읽기 쉽고 보기 좋은 글은 아닐 것이다.


몇 주 전부터 같은 사무실을 사용하는 상사는 코를 먹는다. 나는 그 행위가 인륜을 저버리는 파렴치한 비도덕적 행위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이거는 상식, 그러니까 common sense의 영역을 벗어나는 일이라고는 생각한다. 나는 처음엔 그저 '비염이 있나보다'하고 생각했는데, 코를 먹은 뒤 줄곧 코를 훌쩍거리고, 심지어는 가래를 삼키는 소리를 내고, 그러니까 너무 더럽고 추잡하고 심지어는 이런 걸로 예민해지는 나를 이상한 사람으로 여기게끔 만드는(나는 메타 인지가 굉장히 활성화된 사람이다) 그런 일련의 모든 행동들이 다 싫어지기 시작했다. 친구한테도 물었다. '코를 왜 먹는 거야?' 친구가 답했다. '나도 비염이 있어서 뭐라고 욕을 못하겠어.' 미안한데 나도 비염 있거든. 그리고 우리는 10초에 4번씩 코를 먹지는 않아.


그가 어제는 사무실에서 손톱을 깎았다. 나는 내가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딱, 딱, 무언가 단단하고 딱딱한 작은 것이 잘리는 소리가 들렸고 그냥…… 그런 소리가 나는 줄 알았는데 그게 멈추지 않고 5분 이상 지속되었다. 나는…… 진짜 궁금했다. 집에서는 무얼 하고 사무실에서 손톱을 깎는 걸까? 왜 개인 위생과 관련된 행위들을 타인이 다 볼 수 있는 곳에서 하는 걸까? 왜 무언가를 마실 때마다 홀짝거리는 소리를 크게 내고, 식도를 타고 흘러가는 음료의 소리가 모든 사무실을 채울 정도로 크고, 그런 걸 어째서 조절하지 못하고, 조절할 수 없는 문제인가? 나는 되는데. 뭐 그런 생각도 하고. 왜 자꾸 코를 훌쩍이고, 그걸 먹고, 왜 코를 안 푸는 거야. 나도 비염을 오래 앓고 있어서 안다고. 코가 줄줄 흐르는 고통과 짜증과 그 번거로움을 아니까 하는 말인데. 왜 코를 안 푸시나요? 왜 병원에 가지 않으시나요? 왜 그 행위가 비위생적으로 여겨질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하시나요? 왜 그렇게 염치가 없어요?


물론 어떤 의미에선 타인의 시선을 신경쓰지 않는 것이 정신건강에 이로울 때가 있는 걸 안다. 근데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잖아. 그러니까……

왜 그렇게 추잡한 거냐고.


그 무례함과 비상식적인 행동들을 아무런 눈치도 보지 않고 할 수 있는 권력이란 대체 무엇일까. 나는 이렇게 묻지 않아도 그게 무엇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중장년의 남성이라는 복합적인 기호들이 그를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지. 병원을 안 가는 데 결정적인 이유가 있을까? 글쎄다. 나는 자신이 코를 마시고 삼키는 그런 소리가 누군가에게 소음이 되고 굉장히 비위생적으로 여겨질 수 있다는 것 자체를 인지하지 못하고, 또 병원을 가서 그 증상을 완화하고 누군가에게 민폐가 될 수 있는 행위를 제거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 것 또한 권력이라고 여긴다. 물론 코가 줄줄 흐르면 본인이 제일 거슬리고 짜증나시겠지만, 그런 증상이 있는데도 병원에 가지 않고 방치하는 건 반지성주의적 행동이기도 하지요. 그쵸? 멍청한데도 어떻게들 그렇게 잘들 사는지 분하고 짜증이 나네. 방금도 씨발 더러운 소리를 들었다. 진짜 다 죽이고 싶다.


소리 좀 내지 말고 삽시다. 트름도 막 한다고. 코도 먹고 트름도 하고. 왜 그러는 거야. 똥도 싸지 그러세요. 어쩌다 한두 번 튀어나오는 생리현상이 아니라, 하루 종일 저 소리를 달고 산다고 생각해보라. 진짜 예민충이 안 되는 게 이상하지 않나? 진짜 더럽고 추잡해서 봐줄 수가 없어. 어쩜 저렇게 낯짝이 두껍지. 지금 이 문장을 쓰는 동안 또 코를 두 번이나 킁킁거렸다. 제가 거짓을 말하는 것 같나요?


이 글을 쓰기로 결심한 것은 내 사무실 책상 앞자리에 앉아 계시는 그 분 때문이 아니다. 궁극적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는 지금부터 나온다. 나는 지난 토요일 아침에 남자친구와 아침을 먹었다. 아침 겸 점심 쯤 되려나. 각자 방에서 자고 일어나 연락을 하고 아침거리를 챙겨 1층에 있는 거실로 내려갔다. 나는 요거트에 시리얼 그리고 딸기를 뒤섞어 먹었고 남자친구는 튀긴두부랑 어묵을 먹었다. 남자친구의 아침식사를 보며 아침부터 그런 걸 먹기도 하는구나 하면서 즐거운 주말 아침을 시작했고, 둘이 넓은 테이블에 나란히 앉아서 시덥지 않은 농담을 주고받는 동안 같은 짐에 다니는 일본인 여성이 본인 몫의 아침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녀와는 짐에서 만나면 가끔 인사를 하고, 집에서도 인사를 하고, 가끔은 이런 저런 가벼운 이야기도 나누기는 하지만 그녀가 몇 살인지 이름은 무엇인지 그런 건 하나도 모른다. 아마 나도 그녀도 서로 모르는 것 같다. 그녀 역시 내 이름을 부른 적이 한 번도 없기 때문이다.


거실엔 넓고 긴 테이블과 동그란 테이블이 있는데 그녀는 우리가 앉아 있는 사각형 테이블이 아닌 원형 테이블에 혼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TV를 켰다. 나는 식사를 하면서 TV를 전혀 보지 않는데 그래도 누가 틀어놓으면 일본 TV에선 무슨 방송을 내보내주나 청해 공부를 한다고 생각하고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곤 한다. 근데 이 날은 옆에 남자친구가 있었기 때문에 TV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고, 그냥 밥을 먹으면서 이거 먹고 얼른 요가 수업에 가자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그녀가 나에게 갑자기 말을 걸었다. 그러고 보니 몇 년 전에 한국에서 배가 뒤집어지는 사고가 있었지? 나는 처음엔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고, 옆에서 남자친구가 그게 세월호 이야기를 하는 거라고 설명해주었다. 남자친구와는 한국에 대한 이야기를 아주 많이, 자주 했기 때문에 그는 내 가방에 달려 있는 노란 리본의 의미와 내가 세월호…… 이 문장을 쓰려다가 숨이 멈췄다. 아무튼 그는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의 설명을 듣고 아, 네. 그런 일이 있었죠. 하고 대답을 했는데 그녀가 말을 이었다. 그 사건이 대통령과 연관이 있다며? 그래서 재판 결과는 나왔어?


나는


숨을 한 번 길게 들이쉬고 내쉬었다. 당시에도 그랬고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상황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퇴고를 하지 않는 사람이라, 생각하는 대로 글을 줄줄줄줄줄줄줄줄줄줄줄줄줄줄줄줄 써내려가는 게 습관인 사람이라, 정말 글을 안 고쳐서, 아무튼 지금도 내가 얼마나 흥분되어 있는지 내 문장만으로도 느껴질 거라고 생각하지만, 아무튼 그랬다.


나는 일본에서 이런 류의 질문을 정말 수도 없이 받아왔다. 내가 일본에 살고 있는 20대 한국인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들은 어쩌면 무례할 수도 있는, 아니 존나 명백하게 무례한 말들을 관심이라고 포장하고는 나에게 던진다. 아니. 나는 당시에 정말 속으로 바로 대답하고 싶었다. 구글에 찾아보시면 되잖아요. 하지만 나의 교양과 문명인으로서의 자아는 그것을 잘 참아냈다. 물론 나는 상대에 따라 저런 식으로 발화하기도 하는데, 그녀는 어쨌든 나에게 저런 식으로 무례하게 군 게 처음이었고, 여태까지 내가 받아온 무례한 질문과 차별을 그녀에게 투사해서 굳이 공격적으로 굴 필요가 없다는 걸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차분하게 그녀의 질문에 대답했다.


저도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왜냐하면 그 사건의 전개 과정을 몰라서가 아니라 일본어로 설명을 못해서. 제가 아무리 여기서 1년 좀 넘게 살았다고 하더라도 한국어로도 일상에서 잘 쓰이지 않는 용어들을 알고 있을 리가 없거든요. 아는 분도 계시겠지만 저는 모름.) 재판의 결과가 나왔고, 감옥에 가는 걸로 결정되었다는 것만 알고 있다고 했다. 그랬더니 진짜 아니나 다를까 너무 판에 박힌 말을 하는 거야. 나는 근데 거기서도 잘 참았다. 그녀가 뭐라고 했게?


한국은 왜 대통령 임기만 끝나면 다들 그렇게 잡혀가는 거야?


나 진짜 이 질문을 일본 사는 동안 얼마나 많이 들었는지 셀 수도 없다. 오죽하면 저런 질문을 가장한 치졸하고 무례한 발화에 대한 매뉴얼까지 있을 지경이다. 나는 저 질문을 듣고 눈을 한 번 뒤집었고 한숨을 쉬었고 호흡을 가다듬은 뒤 내가 만든 매뉴얼대로 행동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누군가 정치 권력을 이용하여 사익을 추구했다면 벌을 받는 게 옳지 않을까요. 일본은 아베가 모리토모 사학재단 비리에 얽혀있는데도 아직 총리짓 하고 있잖아요.


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근데 제가 과연 제가 이런 발화를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자랑하고 싶어서 여기에다 썼을까요? 그럴 수도 있겠지만 반 정도는 맞고 반 정도는 틀립니다. 저는 너무 너무 화가 많이 나고 울분이 쌓여 있기 때문에 하소연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내가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조롱이 명백한 발화를 들어야 하는가. 심지어 너네는 우리나라보다도 민주적으로 정치 후진국인 걸 세상 모두가 다 아는데. 이것도 할 말 많은데. 일본 헌법 1조가 뭔지 아시나요? 찾아보고 뒤로 넘어가지 말아주시길. 아무튼 얘네는 공화국이 뭔지도 모르고 민주주의가 뭔지도 모르는 애들이 태반인데 너네 돈 좀 많고 옛날에 식민지 좀 했다고…… 그거 창피한 건데, 어쨌든 식민지 했던 거 창피한 줄도 모르고 너네가 우월감 느끼고, 식민지를 했다고 우월감을 느끼면 어떡해? 진짜 사고회로에 어디서부터 고장이 난 건지 짚어줄 수도 없잖아. 그러니까 내가 맨날 일본인 멍청하다고 놀리지. 물론 안 멍청한 일본인들도 많습니다. (제가 직접 본 적이 없어서 그렇지.) 난 진짜 일본인들한테 일본인, 이라는 말을 쓰고 싶지 않은데 저딴 말을 듣고 나면 그냥 짜증이 나서 일본인이라고 해버리고 싶고 그래서 그냥 일본인이라고 해버린다. 저는 남자친구한테도 짜증나게 굴면 일본인이라고 합니다. 야 이 일본인아. 왜냐하면 저는 일본인이라는 말을 욕으로 쓰기 때문임. 예. 차별주의자라 죄송합니다. 진짜 존엄성 지키고 살기 너무 힘들다.


아무튼 내가 저렇게 말하고 나서 그녀는 저 주제로는 대화를 이어가지 못했는데, 곧이어 뱉은 말이 더 가관이었다.


한국에는 요즘 성희롱, 성폭력 관련해서 아주 논란이 많더라고요? 나이 많은 아저씨들이 젊은 여자애들 성희롱해서 기사도 많이 나오고 그러던데.


라고 묻는 것이었다. 근데 저 발화의 저의가 무엇인가. 그냥 딱 봐도 알겠죠. 일본인이 한국인한테 저 말을 했다는 게. 한국에서 미투운동이나 페미니즘운동이 얼마나 잘 되고 있는지 궁금해서 물어봤을까요? 자매애를 느껴서? 연대하고 싶어서? 땡입니다. 그녀는 지금 한국이 일본보다 수준 낮은 사람들이 많다는 걸 돌려서 말하고 있는 것이랍니다. 하지만 그 방식이 정치적으로 옳지 못하죠. 어디 감히 제 앞에서 사캐즘을…… 어디 감히 제 앞에서 빙빙 돌려 말을 꼬고 있나요. 충청도에서 태어나 대학 가기 전까지 충청도에 살았고 생부가 충청도 사람인 한국의 장녀 앞에서 어디 돌려말하기 스킬을 스킬이라고 쓰고 있어. 난 아직 우리아빠만큼 기분 나쁘게 말 비꼬아서 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고 42년 전부턴 내가 아빠보다 잘해.


그리고 저는 뭐라고 답했을까요?


네. 요즘 그런 고발이나 폭로가 많네요. 근데 일본에서도 얼마 전에 이토 시오리가 성폭행 관련해서 고발했는데 일본에서는 들어주지도 않고 그래서 결국 지금 UN 보호받으면서 활동하고 있지 않던가요. 어딜 가나 자신이 가진 권력을 이용해서 여성을 물건처럼 취급하는 남자들이 문제죠.


짜증난다. 자율적으로 사고할 수 있으면 너무 좋겠지만 질문의 상태를 보니 그게 불가능할 것 같아서 그녀에게 스스로 사고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발화. 정말 멋있지 않나요? 그녀는 나한테 수업료 내야 됨.


절대 저런 대화를 통해서 나한테 자기가 바라던 반응을 얻어낼 수 없다는 걸 빨리 깨달았는지 그녀는 태도를 바꿨다. 아마 내가 자기가 바라는 대로 대답해줬으면 계속 한국을 비꼬면서 무시했을 텐데 뭔…… 어디서 까부냐. 난 한국도 싫고 일본도 싫지만 내가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나를 무시한다면 너를 죽일 거야.


정말 그녀의 빠른 태세 전환에도 박수를 친다. 내가 하는 말이 옳고 절대로 이길 수 없다는 걸 인지하자마자 맞아, 맞아 그러면서 맞장구를 치고 난리도 아니었다. 성희롱, 성폭행을 저지른 가해자가 나쁜 건데 왜 여자들이 뒤에서 고생해야 되는지 모르겠다는 정말 너무나 인간적이고 동의할 수밖에 없는 발언을 해서 나도 태도를 누그러뜨리고 대화를 이어갔다. 그러나 거기서 멈출 내가 아니지. 나는 내가 끝에 한 방을 먹여야 속이 풀리는 사람이고, 오늘은 '구글에 찾아보세요'라고 대답 안 하고 친절하게 설명을 잘 해줬으니까 마지막 한 방을 좀 먹여도 되지 않을까 싶어서 걍 먹였다.


저는 이토 시오리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일반적인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일본에서 교육받고 자라온 여자라면 그런 일을 당한 여자가 창피한 거고 수치스러운 거라고 생각해서 고발하려고 하지 않았을 텐데 자신이 잘못한 게 아니라 가해자에게 잘못이 있다는 걸 알고 용기를 냈다는 게 너무 멋있어요. 똑똑한 거죠.


저렇게까지 말하고 나서 일본 사회의 여성 인권 및 전반적인 인식에 대해 너무 무시하는 거 같아서 말이 좀 심했나 싶긴 했는데, 내가 자기를 한 방 먹였다는 것도 모르지 않을까? 알 게 뭐람. 그녀와의 대화는 그렇게 어정쩡하게 마무리되었고 그녀는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올라가는 듯 보였다. 그리고 옆에 앉아 있던 남자친구는 그녀가 거실에서 사라지자마자 화제를 돌렸다.


나 아까 저 여자분이 너한테 말 걸자마자 너무…… 어색해서 계속 테이블만 닦았어.

왜? 니가 옛날에 나한테 했던 말 생각나서?


그럴 만도 하지. 거의 꼬박 1년 전 지금의 남자친구가 쉐어하우스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시절. 박근혜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시절. 일본 뉴스에서 하루종일 박근혜 보도만 하던 시절. 인간의 멍청함에 환멸을 느끼고 나나 잘 살자 마인드를 갖기 위해 피나는 훈련을 하던 내가 있던 그 시절. 그때 지금의 남자친구도 역시 똑같은 질문을 내게 던졌다. 그 당시 본인은 나와 정치적인 대화를 하고 싶었을 뿐이라고 허울만 좋은 핑계를 댔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자신이 얼마나 멍청하고 한심하고 졸렬했는지 뼈에 새겨질 정도라 부끄러워서 아무말도 못하겠다고 했다. 진짜 인간이 염치가 있으면 그걸 핑계라고 대는 자신이 너무 부끄러워서 죽고 싶어지지 않냐? 여태 미안하다는 말만 오백 번은 했는데 앞으로 982423번 더 들어도 모자라다.


얘들아. 정말 웃기지 않니. 평소에 친구하고 정치에 관련된 대화는 입에도 올리지도 않는 애들이 한국인 여자를 보면 존나 정치 이슈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어 죽겠고 한국에 대해서 물어보고 싶어 죽겠고 깎아내리고 싶고 놀리고 싶고 무시하고 싶고 조롱하고 싶어 죽겠고 막 그러나봐. 이 정도면 질환임. 이건 일본애들만 그런 게 아니라 한국 남자들도 똑같음. 매번 사상검증하듯이 나한테 뭘 물어보는데 내가 자기보다 똑똑한 줄도 모르고 자꾸 까불다가 쳐맞고 나가떨어져요. 대가리에 든 것도 없는 것들이 내가 여자라고 지보다 멍청할 줄 알고 자꾸 싸움을 거는데 얘들아 너네가 뭔가 그렇게 알고 싶고 그렇게 궁금하면 구글에 검색하면 되고, 토론이 하고 싶으면 관계부터 쌓도록 하렴. 서로 안 지 얼마나 됐다고 여기가 무슨 인터넷 공론장인 줄 아나 현실에서 그렇게 말 걸면 싸우자는 것밖에 더 돼요?


너네 사는 거 편하지? 진짜 만만하고 숨만 쉬면 되고 고민도 안 하고 사유도 안 하고. 부러워 죽겠네 진짜. 내가 여자라서 너보다 멍청할 줄 아는 것도 여혐이고, 여자인데 너보다 아는 거 많아서 신기해하는 것도 여혐이란다. 앞의 문장의 '여자'를 '한국인' 혹은 '동양인'으로 바꾸면 외국인혐오가 되겠지. 놀랍지? 내가 진짜 현실에서 이렇게 하나하나 친절하게 가르쳐주는데 멍청이들은 수업료도 안 내고 달라지지도 않고. 정말 왜 안 죽지. 진짜 돌대가리인 걸 너무 자랑스럽게 전시하고 사는 건 걔넨데 왜 내가 수치스러워야 하나.


그래서 너무 피곤하고 피로하고 지치고 번거롭다. 그만 좀 피곤해도 될 것 같은데 끝없이 피곤하다. 힘들여서 저렇게 설명을 해줄 여력이 있을 땐 해주고 한 대 패고 마는데 그러기도 싫을 땐 사실 앞에 적은 것처럼 구글에 찾아보라고 하고 어깨 물어뜯고 살점 씹으면서 자리를 떠날 때도 많다. 근데 내가 좀 안 지쳤으면 좋겠다. 왜냐하면 저 여자분은 나와 짧은 대화를 하면서 어쨌든 느끼는 게 있었을 거 아냐. 그러니까 대화의 태도가 달라졌을 거고 논조가 달라졌을 거니까. 실제로 달라졌잖아. 나를 놀리고 한국을 무시하고 싶어하던 것에서, 권력의 불균형을 볼 수 있는 시선까지 올라갔잖아.


그러니까, 나는 가부장제에 맞서 싸우기 위해서라면 일본인 여성들하고도 당연히 연대할 수 있고 연대하고 싶은데, 반대로 일본 여성들이 내가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나를 차별하고 혐오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거야.


이 문장을 쓰기까지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차별당하고 혐오당하는 일에 익숙해지고 싶지 않다. 근데 너무 무섭다. 무척 지치거든. 지금 이 글을 어떻게 마무리해야 될 지 모르겠어서 심장이 벌컹벌컹 뛰는데 어떻게 마무리할 수 있겠어. 나에 대한 혐오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미래에도 진행될 텐데 어떻게 이걸 내 힘으로 마무리할 수 있을까. 저 혼자 열심히 싸운다고 되나요? 물론 혼자 싸우고 있지 않다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만…… 이걸 문장으로 쓰기로 결정한 오늘 점심에, 샐러드를 우걱우걱 씹으면서, 이것도 쓰고 저것도 쓰고 다 쓸 거라고, 멍청한 사람 너무 싫고 경멸스럽고 혐오스러운데 나는 누군가를 혐오하고 싶지 않다고 그래서 더 내가 나를 옥죄게 되고 내가 나를 혼내게 되고 반성하게 되고, 나는 진짜 혐오당하기 싫은데 내가 혐오를 하고 있으니까 나도 싫고. 그만하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진짜로는 그만하고 싶지 않으니까. 혐오와 차별에 맞서 싸우는 걸 절대 그만두지 않을 거니까. 그래서 여기에다 적는다. 아주 오래된 나의 삶의 태도이고 나는 이걸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적는다. 누가 봐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요즘은 정말 외롭다. 내 모국어로 유의미한 대화를 직접 나눈 게 너무 까마득하게 멀어서, 사랑하는 사람들의 응원과 지지를 활자가 아닌 음성으로 들은 게 너무 오래 전의 일이라서, 외국어로는 혐오와 차별만 마주하는 것 같아서.


사실 그렇지도 않지만 말입니다. 저는 일본인들을 꽤 귀여워하고 사랑하고 그러니까요. 어떤 일본인이 저를 힘들게 하면 또 다른 일본인이 저를 위로해주고 그러더라고요. 인간이 너무 복잡하네요.


쓰고 나면 속이 시원해질 줄 알았는데 그렇지만도 않다. 오늘 저녁에 요가 가야지. 내일도 필라테스 가야지. 그럼 좀 낫겠지. 책도 읽고 맛있는 것도 먹고 주말에 도쿄에 놀러올 한국 친구를 생각하고. 아마 도쿄 날씨가 흐려서 그런 거라고도 생각한다. 이 포스팅은 대충 이쯤에서 마무리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약도 먹어야 하고 일도 해야 하거든. 일을 해서 돈을 벌고 요가를 배우고 약값도 내고 병원도 가고 친구랑 만나고 그렇게 일상을 단단하게 유지하고 내면을 가다듬어야 나를 둘러싸고 있는 일상적인 혐오에 맞서 싸울 수 있겠지. 그리고 나와는 또 다른 이유로 혐오당하는 사람들에게도 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총으로 다 쏴 죽여버리고 싶다. 여전히 제 맞은 편에 앉아계신 분은 코를 드시고 계신답니다. 그럼 저는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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