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6월 13일
어떤 음식이 먹고 싶어질 때 그 음식의 맛이 그리울 때가 있고 그 음식과 관련된 기억(혹은 추억)이 그리울 때가 있다. 오늘은 뜬금없이 호박잎이 먹고 싶어졌는데 일본 슈퍼나 청과물 가게에서 호박잎이 진열된 걸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는 걸 떠올리고는 금방 포기했다. 물론 구글에 호박잎 판매 같은 키워드로 검색을 해보긴 했으나 성과가 있는 일은 아니었고.
오늘은 지방선거일이고 한국이 임시 공휴일이라 회사가 좀 한가했다. 나는 투표권을 가진 이후 처음으로 투표에 참여하지 못했는데 이 얘기를 안 쓰는 게 좋을까 쓰는 게 좋을까 고민하다가 그냥 쓰기로 했다. 돈과 시간이 아주 많아서 투표하러 당일치기로라도 한국 들어갔다 올 수 있었으면 좋겠네. 돈만 많아도 사전투표에 잠시 다녀올 수 있을 텐데.
호박잎을 먹은 계절은 늘 여름이었다. 방금 이 문장을 적다가 ‘호박잎 제철’이라고 검색했더니 7월에서 9월이라고 나온다. 호박잎을 쪄서 냉장고에 넣어둔 뒤에 시원하게 식은 호박잎을 꺼내 밥상에 올려 밥과 함께 싸먹는 거다. 뜨끈뜨끈한 호박잎을 먹은 적도 있는데 그건 아마 귀갓길에 호박잎을 사와서 찐 다음 바로 먹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물론 내가 사온 게 아니라 양육자가 사왔던 거겠지. 깻잎처럼 호박잎을 젓가락으로 떼어서 가져오기보단 물기를 머금어서 흐물흐물하게 잘 찢어지고 파스라지는 탓에 그냥 손으로 집어서 밥을 싸먹었다. 그럼 차가운 애는 차가운 대로 느낌이 묘하고 따뜻한 애는 따뜻한 대로 느낌이 묘했다. 심지어 따뜻한 애는 손에 올려두면 잎이 얇아서 금방 식었다.
갓 지은 따끈한 밥을 차갑게 식은 호박잎에 싸서 청양고추와 애호박을 숭숭 썰어 맵고 칼칼하게 끓인 된장찌개에 풍덩 찍어 먹거나, 매운 고추를 잘게 썰어서 만든 양념간장을 밥 위에 얹어서 먹거나, 호박잎을 떼어서 뚝배기에 걸쳐놓고 밥 위에 얹어서 먹기도 했다. 밥에 찌개를 살살 비벼서 싸먹기도 했다. 아무튼 어떻게 먹어도 맛있다. 어떤 때는 된장찌개도 데우지 않고 그냥 차갑게 먹었었는데 그건 혼자 밥을 챙겨먹어야 할 때였을 것이다. 양육자들은 내 취향/기호와 별개로 밥을 따뜻하게 챙겨먹지 않으면 무척 속상해했기 때문에 내가 식은 찌개나 국을 먹을 수 있는 기회는 양육자들이 집에 없을 때 뿐이었다. 나는 너무 뜨거운 건 잘 못 먹는다고 몇 번을 말해도 늘 찌개나 국은 펄펄 끓여서 먹였다. (사랑이란 뭘까.)
왜 호박잎을 먹었을까. 농사를 짓던 시절엔 호박잎을 구하기가 쉬워서 그랬나. 여름이라 날은 덥고 입맛은 없으니 간단하게 뚝딱 해먹기 좋아서 그렇게 먹었나. 근데 후자도 맞는 거 같은 게 지금 내가 그걸 떠올리면서 미칠 것 같다.
그러고보니 누군가에게 호박잎을 좋아하냐고 물어본 적이 한 번도 없는 것 같다. 서울에서 지내는 동안 호박잎 쌈밥을 먹은 기억은 확실히 없다. 호박잎은 집에서만 먹었고 크면서는 집에서 밥 먹을 일이 점점 줄어들었기 때문에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 대부분이다. 정말 뜬금없이 호박잎이 먹고 싶어졌는데 심지어 그게 단순한 그리움이 아니라 무척 구체적이고 상세한 그리움이라서 친구가 아니나 다를까 ‘왜 이렇게 구체적인 거 생각해냈어’라고 물어봤다. 그러게. 왜 이렇게 구체적인 게 생각났을까.
나는 내가 호박잎을 엄청 좋아하는 줄도 몰랐는데 갑자기 이렇게 생각이 난 바람에 또 하나 새로 알게 됐다. 아마 몇 년을 살아도 평생 내가 모르는 나의 어떤 면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 삶이 재미있기도 하고 막막하기도 한데 오늘은 그런 감정보다 호박잎이 먹고 싶다는 생각이 더 크다.
당장 먹고 싶은 호박잎을 구할 길은 없을 거고 아마 한국에 가지 않는 이상 그걸 먹을 가능성이 낮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슬픈 건 아니다. 나는 편식도 별로 안 하고 그게 아니더라도 그밖에도 좋아하는 음식들이 많고 굳이 좋아하는 음식을 먹지 못하더라도 낙담하진 않으며 겨우 그런 걸로 슬퍼지지는 않는다. 그래도 조금 허전하긴 하다. 먹고 싶은 음식의 재료를 구하기 힘들다는 것에 조금 더 보태서 단순히 맛이 그리운 게 아니라 기억(혹은 추억)이 그리운 거거든. 어찌저찌 여기서 호박잎을 구하더라도 내가 된장찌개를 끓여봤자 아빠가 해준 것만큼 맛있진 않을 거다 같은 생각을 하면서 허전해지는 거지. (실제로 그랬기 때문에 한 번 시도해본 이후 된장찌개는 끓이지 않는다. 슬프기만 해!) 옛날엔 호박잎을 따다가 먹었다고 했는데 이제는 사서 먹는다는 말을 해준 사람은 엄마 아니면 아빠겠지, 같은 생각들.
엄마한테 [호박잎 쪄서 고추 넣은 양념간장이랑 애호박된장국이랑 밥에 싸서 같이 먹고 싶어]라고 메시지를 보냈더니 [우짤꼬 일본은 호박잎없지]라고 답장이 왔다. 그러니까. 우짤꼬. ㅎㅎ 호박잎이 먹고 싶었다는 것도 며칠 지나면 까맣게 잊을 것이다. 그게 아쉬워서 글을 써보았다. 추억과 함께 이리저리 섞여 누가 보고 싶고, 어디에 가고 싶고, 무엇이 먹고 싶을 때가 분명히 있는데 며칠만 지나도 다 까먹는다. 몇 시간만 지나도 까먹는 것 같다.
잊을 수 있다는 건 인간이 가진 가장 좋은 재능이라고 생각했으면서도 이런 감정들을 잊는 건 아쉽다. 더구나 요즘은 내가 강하고 단단한(혹은 강해지고 단단해진) 사람이라는 걸 실감하고 있는데, 그만큼 예전보다 타인의 감정에 공감하지 못할 때가 늘어서 깜짝 놀랄 때가 많다. 자꾸 공감능력이 재기하는데 그렇게 안 살기 위해서는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게다가 이게 진짜 강하고 단단한 게 아니라는 생각이 팍 들었다. 사랑하는 타인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 태도는 게으르고 멍청한 거다. 비슷한(같은) 사건을 겪었을 때의 파장이 나에겐 작아도 누군가에겐 클 수 있고, 어떤 대응이 나에겐 쉽지만 누군가에겐 어려운 일일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런다. 예전의 나였다면 ‘뭔 저런 하나마나한 말을 하고 있어’라고 생각할 말들만 하고 있다. 모... 그래도 똑똑하고 잘나서 괜찮당...
근데 왜 일본인들 호박잎 안 먹냐 진짜 흑흑 이러다 호박 농사짓겠네 어제 친구가 수박 농사 지으라고 그랬는데 나중에 할 거 많다 무화과 고구마 수박 호박 아보카도... 지금부터 농지 구입할 돈 모아야겠네. 그 전에 저녁 머 머글지나 생각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