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세한 남자랑 살아서 좋은 점
얼마 전 친할머니 구순 생신 기념 친가 가족 식사가 있었다. 결혼을 하고서는 예전처럼 친가 행사에 참석하지 않기 때문에 꽤나 오랜만의 모임이었다. 구순 기념이라고는 했지만 잔치도 아니었고 겸사겸사 가족들끼리 밥 한 끼 먹는 자리였는데 남편은 무심한 나를 대신해 이것저것 챙기느라 정신이 없었다. 현수막을 해야 한다느니, 떡케이크를 맞춰야 한다느니 하도 난리여서 겨우 설득해서 참석했다.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연례행사처럼 노래타운에 가게 됐다. 오랜만에 만난 어른들의 텐션은 오를 대로 올라있는 토요일 밤이었지만 저녁식사 자리부터 노래방까지 동행해야만 했던 사촌언니의 두 아들은 째끔 지친 모습이었다. 그래도 워낙 착하고 차분한 아이들이라 나는 별 생각이 없었다. 가만있어보자 유산슬의 합정역 5번 출구가 땡기는데? 나왔을라나?
어른들은 (나포함) 텐션을 더욱 지체 없이 끌어올리기 위해 시원한 보리음료를 찾아댔다. 주문하기 무섭게 테이블에 착착 올라오는 마른안주들과 과일 안주, 완벽에 가까운 세팅에 나 역시 한잔 들이키기 바빴다. 두 번째 잔은 오빠랑 건배하고 마시려는데 갑자기 남편이 말도 없이 급하게 나가는 거 아닌가?
하... 역시... 내 남편!
내가 지금 이 보리음료에
뭔가 투명하고 맑은걸 째끔 타 먹고 싶었는데, 그 생각을 읽고야 말았구만?
또또 이런게 이렇게 잘 통해요. 껄껄
역시 우리는 천생연분이라 생각하며 오빠가 내 니즈를 정확히 파악했다는 기대에 흡족해진 나는 두번째 잔을 내려놓고 얌전히 남편을 기다렸다.
그런데 오빠는 들어오자마자 내가 아닌 사촌언니의 두 아들에게 향했다. 오잉? 나 여기에 있는데? 오빠를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나는 엄마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오빠 손에는 투명하고 맑은 이슬이 담긴 초록병이 아니라 아이스크림이 든 검정봉지가 들려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우리는 비싸서 잘 사 먹지도 않는 빠히바게뜨 리얼 수박바... 아이들 손에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쥐어주더니 그제야 내쪽으로 와서 하나를 더 내민다.
아이들 먹을게 하나도 없길래...
그저 쏘맥만 아는 나란 늬연... 남편의 속 깊은 생각과 행동에 또 하나 배워간다. 어른들 먹을 거만 있다고 뛰어나가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아이스크림을 사 온 남편. 이날 어른들이 늦은시간까지 신나게 놀 수 있었던 건 모두 우리 남편 덕분이 아닐까.
그게 무엇이든 좋은게 있으면 내가 더 많이 가지는 게, 내가 더 잘 나가는 게 행복이라고 믿었던, 욕심 많던 나에게 월드클래스로 섬세한 남자가 느끼게 해주는 소소한 일상의 행복들이 쌓여간다. 춥지만 마음만은 따뜻하고 감사한 겨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