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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갑낫을 Oct 31. 2019

남편이 게임을 지웠다.

얼마나 갈지는 모르겠지만




지난 토요일. 남편의 제안으로 엄빠랑 부부동반 골프를 치고 점심 겸 낮술을 마셨다. 그렇게 1차는 무려 4차까지 이어졌다. 술 깨자며 볼링 치고, 술 깼다며 소 수육을 먹고, 술 깨자며 탁구를 치고, 술 깼다며 알탕을 먹고 헤어졌다.


일요일은 역시나 시체 좀비 데이. 이번 토요일처럼 그 누구보다 미친 듯이 빡세게 놀고 난 후에 우리 부부는 아무것도 안 하는 날을 보낸다. 늦잠을 자고 일어나 해장으로 땡기는 음식을 시켜 먹고, 소파와 한 몸이 되어 저녁을 맞이한다. 시간 너무 빨리 간다고 서로 부둥켜안고 울먹이는 잠깐의 시간 외에는 각자 하고 싶은걸 하는 날이기도 하다.


소파에 같이 누워있지만 나는 인스타그램, 쇼핑, 브런치 글 읽기 등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 오빠는 야구나 게임, 낚시 카페 글을 읽는다. 그중에서도 오빠가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건 모바일 게임이다. 톤톤 용병단, 탭탭 히어로즈, 아이돌 히어로즈... 무슨 영웅들을 그렇게 맨날 키워대시는지...





아 참참, 이전에 이 문제에 대해서 쓴 적이 있는데 그 이후로도 나의 서운함은 매주 반복되었고, 오빠는 이 시간이 너무 편하고 좋다고 하니 딱히 방법이 없었다. “너랑 같이 소파에 누워서 뒹굴거릴 수 있고 게임도 할 수 있어서 난 너무 좋아!”


그래, 혼자 낚시 가고 골프를 치겠다는 것도 아닌데 이런 시간도 필요하겠지, 언젠가 오빠도 나처럼 깨달을 날이 오겠지, 사실 뭐 나도 오빠랑 있을 때 각자 핸드폰 하는 시간을 줄이고, 서로 함께하는 순간을 소중하게 보내야겠다고 깨달은 게 얼마 안 되었으니, 오빠 폰 뿌셔버리고 싶은 날도 많았지만 우아하게 기다리겠노라고 마음을 다지고 있던 차였다.


암튼 시체 좀비 데이였던 일요일, 여느 때처럼 우리는 소파에 자리를 잡았고 오빠는 게임을 시작했다. 나는 혼자 보는 티비도 재미가 없고, 브런치에 읽고 싶은 글들도 다 읽은 터라 유튜브 영상 편집이나 블로그에 여행 리뷰를 좀 업데이트할까, 고민하며 고개를 돌렸다. 핸드폰이 오빠의 얼굴과 눈을 모두 가리고 있었다. 오빠와 나 사이를 가르는 작은 기계.


핸드폰만 부여잡고 있는 남편의 모습을 보니 또 약간 빡이 치면서 서운함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사실 이 서운함은 나와 다른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해서 오는 것 같기도 하다. 게임이 시간낭비라고 생각하는 나는 그 시간에 좀 더 생산적인 일을 하는 게 맞지 않나? 게임하는 시간에 부부가 같이 공감할 수 있는 시간을 보내는 게 더 좋은 거 아닐까? 되뇌이기 때문이다. 에휴 아니다 아니야, 하루쯤은 각자 하고 싶은 거 하는 시간이 있어야 하니까, 나는 이 상황이 싫은 거니까 여기에서 벗어나자!


원래 같았으면 “대체 뭘 저렇게 하루 종일 놓지를 못하는 거야? 진짜 게임하는 게 맞긴 맞는 거야?” 하면서 속으로 겁나 부들부들거렸을 나다. 오빠는 본인이 게임을 하고 있더라도, 같이 보고 싶은 프로그램이 있거나 같이 하고 싶은 게 있으면 제안을 하라고 했지만, 딱 봐도 누워서 본인만의 게임 세계에 빠져든 사람에게 그거 그만하고 나랑 다른 거 하자고, 뭘 제안한다는 건 내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 허락하지를 않았다.



나도 혼자만의 시간을
즐길 줄 아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집을 치우기 시작했다. 게임은 취미가 없고, 무언갈 하면 조금이라도 나아지는걸 꼭 두 눈으로 확인해야 하는 나란 늬연은 그날따라 노트북 키는 게 너무 귀찮아 몸을 움직이는 쪽을 택했다.


아침에 쌓아둔 설거지를 하고, 밀린 빨래도 돌리고, 작은 방에 너저분하게 올려둔 빨래들을 접고, 방바닥에 굴러다니는 머리카락과 창문틀에 쌓인 시커먼 먼지들을 닦아냈다. 원래는 오빠 담당이지만 화장실 세면대와 변기가 너무 더러운 것 같아서 화장실도 가볍게 청소했다. 기분이 째끔씩 나아졌다. 이상하게 누워서 게임만 하는 오빠한테 별로 서운하지도 않았다. (이게 바로 법륜스님이 말씀하셨던 욕심과 원의 차이였구만?)







암튼 오빠는 중간중간 빨빨거리며 돌아다니는 나를 보고 이리 와서 같이 누우라고 외쳤지만 나는 알았다고만 하고 여기저기 집안을 정리 정돈하는데 집중했다. 대충 치우고 나니 일요일도 다 지나갔고, 벌써 저녁 시간이다. 분리수거를 하고 저녁거리를 사 와야겠다고 하니까 오빠도 슬슬 일어난다. 졸다가 게임하기를 반복하던 오빠가 밖에 나가기 전 의식을 깨운다며 일어나 담배 타임을 다녀오더니 갑자기 한마디 건넨다.



나 게임 다 지웠어



어디 아픈거 아니지




그랬다. 그는 신혼여행에 가서도 틈만 나면 가로로 폰을 쥐고 게임을 했었다. 당시에 나도 인스타 중독이었지만 오빠한테 그놈의 게임 좀 그만하라고 하면 오빠는 너가 인스타그램 하니까 심심해서 하는 거라면서 화답했었지.


그랬던 그가, 술김도 아니고 맨 정신에 갑자기 하루 종일 하던 게임을 삭제했다니? 눈물이 핑 돌았다. 난 억울하거나 화날 때만 우는 인간인데 마랴. 그러곤 갑자기 소파에 앉아서 내 손을 잡더니만 뭔 깊은 깨달음을 얻은 석가모니 마냥 나지막이 말한다.




나도 좋고, 너도 좋아야 해




“생각해보니까 이거 아닌 것 같아. 그래서 삭제했어. 너도 일요일엔 쉬어야 하는데 종일 빨빨거리면서 집안일하고 돌아다니는데 난 하루 종일 누워서 대체 뭘 위해서, 뭐 때문에, 이걸 이렇게 붙잡고 매몰되어 있는 건지, 이거 좀 한참 잘못된 거 같다는 생각이 갑자기 번뜩 들더라. 게임을 해도 예전에 우리 타이니팜처럼 같이 즐기고 같이 할 수 있는 걸 하던가, 너랑 같이 있을 때는 차라리 넷플릭스든 영화든 함께 즐기고 시간을 같이 보낼 수 있는 거에 집중하는 게 맞는 거 같아. 미안해.”




그러니 우리 모두 희망을 잃지 말아요





결혼 초에도 한번 큰 깨달음을 얻은 사람마냥 갑자기 본인 스스로 게임을 다 삭제했다고 했던 적이 있는데, 그러곤 얼마 못가 또 새로운 게임에 빠져들었던 남편이다. 이번에도 얼마 못 가서 또 새로운 게임에 빠져들지 모를 일이지만 그래도 오빠 스스로 깊은 깨달음을 얻고, 내게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며 사과하고 다짐을 하는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그동안의 서운함은 모두 녹아버렸다. 오빠랑 같이 할만한 동물 키우는 게임을 찾아봐야겠다.


후후, 이런 날에는 이 남자랑 결혼하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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