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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갑낫을 Oct 12. 2019

결혼 1년 차, 남편이 퇴사했다. (2)

막걸리는 위대하다.




나 꽤나 서운해?



사실 막걸리 토크를 신청하기 전날 나는 먼저 산책 토크를 신청했었다. 여느 때처럼 나 혼자 출근한 아침, 카톡으로 무작정 우울감을 호소하며 오빠에게 대화가 필요하다고 했고, 오빠는 퇴근하고 같이 산책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자고 했다.


그리고 그전에 나는 “내가 왜 우울한 것인가?”에 대해 먼저 정리를 해보기로 했다. 진짜 찌질하고 쪼잔한 작은 마음까지도 모두 적어내려 갔다.



1. 같이 출근하고 싶다. 왜 나만해야되, 빼앰!
2. 오빠가 이직 준비만 열심히 했으면 좋겠다.
3. 그동안 게임, 웹툰, 야구 끊었으면 좋겠다.
4. 그치만 날 위해 집안일은 해줬으면 좋겠다.
5. 나만 우리 미래와 가정을 걱정하는것 같다.



처음에는 근래 내가 느꼈던 외롭고 서운한 마음을 적었고, 그 다음엔 내가 바라는 우리 관계, 오빠의 모습들을 적었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나도 어떻게 변화해 갈 수 있을지 고민했다. 확실히 글로 정리해보니 어지럽던 내 마음이 하나씩 정리되는 느낌이었다. 처음에는 불평불만만 늘어지던 글들이 막판에 가니, 내가 이런데 오빠 마음은 어떨까? 내가 먼저 오빠를 온전히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도움이 되는 아내가 되면 좋겠구나. 라는 생각도 추가되어 꽤나 근사해졌다.




날 온전히 공감하고 이해해줘




우리가 싸울 때면 서로에게 하는 말이다. “단 한 번이라도 내 입장, 내 마음, 내 상황이 되어서 온전히 공감하고 이해해달라. 그러면 내가 왜 이렇게 화를 내는지, 발끈하는지 알 수 있을 거다.” 근데 내가 한 바닥 적어놓은 메모장을 보니 오빠라는 사람 자체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이해하려는 노력은 없이, 내 방식대로 상대가 움직여주지 않는다고 서운해하고만 있었다.


예를 들어, 나는 이직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바로 움직이는 편이다. 특히 퇴사를 한 백수 상태에서 이직을 해야 한다면 일평균 200개가 넘는 곳에 지원서를 내고, 면접이라도 자주 다니면서 마음의 위안을 얻는 타입이다. 무슨 일이든 그렇다.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미루지 않고 밀어붙인다. 될 때까지 물고 늘어져서 해내고 만다. 그러는 동안 때로는 나 스스로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주변 사람들을 서운하게 하기도 한다.


그런데 오빠는 이런 부분에 있어서는 나와 전혀 다른 스타일의 사람이다. 어떤 일이 닥쳐도 느긋하고 차분하고 신중하게 이리저리 고민하고, 그 생각의 끝에 행동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그때 움직인다. ( 그런 사람이 왜 야구, 웹툰, 게임은 늘 놓치지 않고 챙겨보고, 누구보다 꾸준히 하며, 최고 레벨까지 가는 끈질김과 행동력을 보이는 건지 의문이긴 하지만 오빠는 내가 이 얘기만 하면 인스타그램 하는 네 모습도 별반 다를 게 없다며 맞수를 둔다. )


암튼 여기까지 생각이 다다르자, 나는 “오빠와 나의 다름을 인정하고, 오빠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라는 다짐을 할 수 있었다. 오빠가 지금 쉬고 있는 건 맞지만 반자발적 퇴사였고 마냥 신나게 대책 없이 놀고먹고 쉬는 건 아니겠구나, 나름 눈치도 보일 테고 이직 스트레스도 있을 거고 힘들겠구나. 나는 산책을 하며 고상하고 우아하게, 예전의 나와는 다른 모습으로 이런 깨달음을 이야기해야지 싶었다.




우아하고 고상하기까지했던 나으 계획




그날 저녁, 우리는 간단히 저녁을 먹고 동네를 걸었다. 그런데 내가 무슨 얘기를 속 시원하게 꺼내려고 하면 할수록 오빠는 숨어들었다. 오빠에게 화를 내거나 탓하려고 하는 것도 아닌데 돌아오는 피드백은 “그래 노력해야지, 서로” 요따위 영혼 없는 멘트뿐이었다. 벽에다 대고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난 또 분노했다. (물론 속으로만) 내가 이렇게 노력하는데 슈발!


예전 같았으면 그래 나도 할 만큼 했다며, 포기하고 다시 오빠가 다가와서 속내를 털어놓거나 대화를 하자고 할 때까지 삐져있었을 거다. 근데 웬일인지 나는 다음날 한번 더 오빠에게 막걸리 토크를 신청했다. 평일에 술 먹지 말자고 하던 내가 막걸리 먹자니까 오빠도 일단 화색이 돌았다.





막걸리 한잔을 쭉 들이키며




우선 나는 그동안 오빠에게 내 방식대로 이직 준비를 하고, 이 공백기를 최대한 계획적이고 생산적으로 보낼 것을 종용했던 부분에 대해 사과했다. 그리고 출근해서 오빠에게 “뭐해?”라고 자주 물었던 건 진짜 오빠가 뭘 하고 있는지, 밥은 잘 챙겨 먹는지가 궁금해서였지 다른 뜻은 전혀 없었다고도 말했다. 또 앞으로 이 시간을 오빠 스스로가 건강하게 보내기를 바랄 뿐, 당장 돈 벌어오라고 닦달할 마음이 없다는 것도 밝혔다.


오빠는 내가 어제 산책 토크를 하자고 했을 때,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알바라도 뛰라하는 건 아닐까? 등등 초특급 걱정에 시달렸다고 했다. 그래서 산책 전부터 지대로 멘붕이 왔고 대화를 이어가지 못했던 거라고. 그리고 오빠는 내가 회사에 출근해서 “뭐해?”라고 묻는걸 극도로 싫어했는데 그 이유는 내가 마치 열심히 이직 준비 안 하고 뭐하냐고, 혹시 늦잠 자거나 게임하는 거냐고, 추궁하는 것 같아서였단다.




아니 홍길동도 아니고 늦잠을 자면 좀 잔다고 게임을 하면 한다고 티비를 보면 본다고 왜 말을 못 하니...




암튼 오빠의 얘기를 듣고보니, 어제의 산책 토크는 오빠 입장에선 자연스러운 대화가 될 리 없었겠다 싶었다. 아내는 갑자기 우울하다며 “대화”를 하자고 했고, 본인은 지금 “백수” 상태이니 얼마나 걱정이 되었을까.




나, 진짜, 설마 얘가 이혼하자는 거 아니야?
이러면서 혼자 겁나 걱정했다니까




막걸리 두병째, 오빠의 걱정섞인 진지한 표정이 너무 귀여워서 빵 터졌다. “아니 이혼은 무슨... 오빠도 나란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잖아. 이제 나도 오빠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어.” 이 얘길 하자마자 오빠의 표정도 한결 밝아졌다. 그러면서 내가 묻지도 않는 본인 속마음과 그동안의 고민들을 술술 털어놓는다.


오랜만에 우리 둘은 이런저런 속 마음을 다 터놓고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연애를 그렇게 오래 했어도 안되던 게 결혼하고 나니까 되는 건지, 이렇게 서로 더 성숙해져 가는 건지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우리 관계를 위해 서로 늘 노력하려는 마음과 의지가 있다는 게 참 감사한 밤이었다.


아아, 막걸리는 위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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