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의 삶에 대하여
올해 3월이 결혼 1주년이었고, 남편은 5월 10일 회사를 나왔다. 나도 퇴사 생각이 간절했지만 난 쫄보라 다음 대안이 꼭 필요했다. 첫 직장에서 대안 없이 퇴사를 감행한 이후로 다음 이직까지 나 스스로를 징글맞게 들들 볶아댄 경험 때문에, 나는 대안이 생길 때까지 버티는 쪽을 선택했다.
반면, 남편은 회사 내부 사정과 본인의 매너리즘, 창업에 대한 열망 등을 이유로 잠재적 안식년을 시작했다. 사실 회사 입장에서도 인원 감축 이슈가 있었기 때문에 좋은 방향으로 협의 할 수 있었고 위로금과 실업급여를 받는 조건으로 퇴사를 택한 거였다. 지방 출장에 주말 출근까지 버티고 버티다 내린 결론이었기에 나도 오빠의 퇴사를 쿨하게 받아들였다.
퇴직금, 위로금, 실업급여까지 보장되고, 나도 벌고 있으니 경제적으로 크게 문제가 될 건 없었다. 어학연수랑 라섹 수술까지 홍보대사 활동을 통해 지원받아본 나는 생활력에 있어서는 늘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막연한 불안 에너지는 퇴사 여행 계획을 짜는데 쓰기로 했다.
나도 일을 하다가 쉬고 싶을 수 있고, 쉬어야만 하는 시기가 올 수 있으니, 이번에 오빠가 먼저 안식년을 갖는 거고, 나도 언제든 쉴 수 있다고, 그러니 시간이 하염없이 흘러가더라도 상대방을 너무 닦달하거나 눈치 주지 말자고, 백번도 더 다짐했다. 근데 마음먹은 거랑 다르게 현실에서 마주하는 내 감정들은 훨씬 복잡했다.
우선 오빠가 퇴사한 5월에 나는 새로운 회사의 면접을 봤고, 최종 합격했다. 6월에는 좋은 조건으로 연봉 계약을 하고, 다니던 회사를 퇴사했다. 우리는 어떻게 이런 시기가 겹칠 수 있는 거냐며 방콕으로 퇴사 여행을 떠났다. 2주간의 여행은 정말 눈 깜짝할 새에 지났다. 7월이 되면서 나는 공백기를 즐길 틈도 없이 다시 직장인이 되었고, 오빠는 어느새 퇴사 3개월 차 백수가 되었다.
오빠가 전업할래? 내가 돈 벌어올께.
사실 결혼 전부터 나는 줄곧 오빠에게 저런 멘트들을 날리며 바깥양반 노릇을 하고 싶어 했다. 그게 더 나의 적성에 맞는 일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그럴 때마다 오빠는 전업주부도 잘할 수 있다고 집안일이 체질이라고 맞받아쳤다. 그래서 어쩌면 지금의 상황이 우리 부부에게 최적의 상태가 아니겠냐며 서로 낄낄거리는 날도 있었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남녀평등을 외치며 가부장제의 잔재에 격분하던 나란 늬연은 신념을 잃어갔다. 이를테면 같이 진하게 한잔한 다음날, 나는 숙취에 쩔어서 출근을 하는데 오빠는 집에서 자유와 여유를 즐길 생각을 하니 부러움의 눈물이 흘렀다. 아 아니 이게 아니고.....
암튼 엄빠랑 살 때도 안 느껴봤던 소녀가장이 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내가 하루 일과를 마치고 왔을 때 오빠가 거나하게 한상 맛있는 저녁을 차려놓고, 온 집안은 세스코가 다녀간 것처럼 깨끗하게 청소가 된 상태로 나를 기다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적도 있다. 만약 내가 전업주부가 되었는데 오빠가 이런 생각을 한다면 나는 눈에 쌍심지를 켜고 집안일에 대한 노동비를 최고 시급으로 계산해 청구했을게 뻔하다.
암튼 오빠도 오빠대로 새벽 운동 같이 가기, 집안일 도맡아서 해주기, 그 와중에 이직 준비하기 등등 무한한 노력을 해줬는데도 나란 늬연은 인생 처음으로 외벌이 가장의 삶과 무게, 그리고 외로움을 느꼈다. 그리고 “맞벌이”가 아니라면 일을 쉬는 쪽은 나였으면 좋겠다는 모순적인 생각도 많이 했다.
사실 내가 가장 경계했던 게 바로 이런 감정들이었다. 아이가 없는 신혼부부에게 몇 개월 외벌이쯤이야, 돈은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문제는 달라진 일상과 생활 패턴에 대해 서로가 서로에게 느끼는 서운함, 그리고 개인적으로 느끼는 외로움, 돈을 버는 쪽은 버는쪽대로, 안 버는 쪽은 안버는쪽대로 바닥을 치는 자존감 등에 있었다.
그런 감정들이 혹여 우리 관계를 망칠까 불안했던 나는 백수가 되어버린 남편이 게임, 웹툰, 야구 보기 등을 하는 게 못마땅했고, 그럴 때마다 “오빠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며” 내 방식대로 이직 준비에 몰두할 것을 독촉했다. 그리고 오빠의 성향, 스타일, 계획, 사색의 자유 등을 깡그리 무시하고 “빨리 다시 취직”하라고 온몸으로 압박하는데 힘썼다.
근데 그러면 그럴수록 우리 둘 사이엔 뭔가 보이지 않는 틈이 생기는 것 같았다. 그래도 해결책은 오직 “남편의 재취업” 뿐이라 생각했다. 한번 그 생각에 몰두하니 다른 대안은 없는 것처럼 막막했고, 서로 날카롭고 예민한 상태도 남편이 다시 회사에 다니고 루틴한 생활을 하게 되면 자연스레 나아질 것만 같았다.
나란 늬연,
안식년이라고 그럴싸하게 포장할 땐 언제고...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우리가 다투거나 관계에 문제가 생기거나, 내가 힘들어하거나 삐지거나 화낼 때마다 오빠는 나에게 어떻게 했었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대학생 때는 장문의 카톡, 10장이 넘는 손편지, 수십 통의 전화로 우리 관계를 풀어가려 노력했고, 결혼을 하고 나서도 싸우면 먼저 손을 내밀고, 화해를 청하고, 사과하고, 나를 다독이면서 우리는 한 팀이라고, 대화로 풀어가자는 사람은 늘 남편인 오빠였다.
이번엔 나도 뭐라도 해야할거 같았다. 이렇게는 더 이상 안 되겠다 싶어서 나는 오빠에게 막걸리 결투, 아 아니, 막걸리 토크를 신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