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절 시리즈
A라는 친구 이야기를 먼저 하자면, 중학교 때 다니던 학원에서 만났다. 당시 그녀는 잘 나가는(?) 무리에 속해있는 활발한 친구였고, 나는 째끔 통통하고 찐따스러운 평범한 중딩이었다. 서로의 존재는 알았지만 학교도 다르고, 가끔 마주치는 학원에서 그닥 친해질 만한 계기는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집에 가는 학원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나의 큐리텔 핸드폰이 파란불을 내뿜으며 울려댔다. 호기심 많던 그녀는 나에게 다가와 양옆으로 반짝이는 내 핸드폰의 기종을 물어왔고, 그 날 이후로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그렇게 그녀와 나는 고등학교 내내 같은 수학 학원을 다녔고, 고3 때는 같은 논술학원을 다니며 수시를 준비했다. 서울에 있는 온갖 대학교들을 함께 돌며 논술 시험을 보러 다녔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녀는 1차 수시로, 나 역시 2차 수시로 원하던 대학에 합격했고 우리는 대학생이 되어서도 자주 만났다.
또 오랜 친구인 수학 학원 멤버들과 모임을 만들기도 했는데, 그 모임에서 그녀는 늘 멤버들을 살뜰히 챙겨주는 대장 역할을 했다. 가끔 직선적으로 말하는 경향이 있어서 나를 포함한 다른 친구들에게 상처를 주는 일도 있었지만 내가 느낄 때에는 함께하기에 좋은 점이 더 많은 친구였다.
그리고 B라는 친구는 수시 합격생을 대상으로 하는 예비대학에서 만났다. 당시 우리는 부모님의 간섭을 온전히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통금이라는 키워드로 친해졌다. 부모님이 둘 다 엄한 스타일이라 거기에 공감하고 반항하며, 서로의 삶에 깊게 스며들었다.
그렇게 대학생활 내내 우리는 쌍둥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붙어 다녔다. 중간에 한번 멀어진 적도 있었지만 신입생 시절부터 쌓은 추억들은 그리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서로의 가장 찌질한 모습부터 정말 별로인 성격들까지 그대로 이해하고 인정해주는 친구구나 느꼈던 관계이기도 하다.
그런데 각자 있는 그대로 꽤 괜찮았던 이 관계는 내가 두 사람을 소개해주고, 셋이 친해지기 시작하며 깨져버렸다.
사실 셋이 친해지기 전에도 이 둘은 서로의 소식을 건너 건너 알고 지냈고, 내가 주선한 술자리에 함께 한적도 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새로운 조합으로 만나는 자리는 대부분 재미있었기 때문에 나는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나랑 10년 이상 관계를 쌓아오며 잘 지낸 친구들이니 서로 친해져서 다 같이 만나면 더 좋겠다고만 생각했다.
처음에는 셋의 균형이 꽤 잘 맞았다고 생각한다. 매일매일 연락하고, 일상을 공유하고, 평일이며 주말을 따질 것 없이 함께 보냈다. 그러던 어느 날, B가 우리에게 그 어떤 이유도 말해주지 않고 갑자기 잠수를 탔다.
나는 가끔 이런 형태로 발산되는 B의 행동 패턴을 알고는 있었지만 당시엔 딱히 짐작 가능한 이유가 없었다. 다만 나랑 단둘이 속초 여행을 다녀오고 얼마 되지 않아 발생한 일이라 내가 혹시 뭘 잘못했거나 서운하게 한 게 있나 싶어, 읽씹을 당하면서도 계속 연락을 했는데 역시나 답은 들을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나와 A는 여러 가지 이유를 추측하면서 기다렸는데, 두 달 후에 B는 A에게만 연락을 취했다. 지금 돌이켜봐도 참 너무 유치하고 내가 다 얼굴이 뜨거워지는 일인데 당시에 B를 만나고 온 A도 나에게 명확한 이유를 말해주지 않았다.
아니 보통은 무슨 이유가 있다 하더라도 정말 서로를 친구로 생각한다면 오해를 풀게 돕는다거나 중간 역할을 하지 않나? A에게도 의문이 들었지만 왜 그런 역할을 해주지 않느냐고 따져 묻거나 강요할 수는 없었다. 그것 또한 A의 선택일 테니.
그렇게 아무런 이유도 모르고, 내 친구였던 두 명이 나를 빼고 지들끼리만 만나는 꽤나 이상한 상황이 이어졌다. 나 또한 그냥 날 안 만난 다겠다는 B의 선택을 존중하고 둘이 만나게 둘 수밖에. 그렇게 한 여름부터 이어진 짜증스러운 관계의 틀어짐은 그 해 겨울까지 계속됐다.
그리고 그 해 겨울, A를 포함한 학원 멤버들과 1박 2일 여행을 다녀왔다. 고기도 구워 먹고, 눈감고 잡기도 하며 여느 때처럼 낄낄댔던 주말이었다. 그 다음 주에는 내가 주선한 미팅에 A와 함께 나가기도 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A와 나의 관계는 이상무였다. 물론 그 미팅이 끝나고 돌아오는 택시에서 그녀가 내게 이런 말을 하긴 했다.
“난 너처럼 새로운 사람들하고 어울리는 것보다는 오래된 친구들이랑 어울리는 게 더 좋아. 이런 게 잘 안 맞는 거 같아.”
분명 같이 재밌게 놀아놓고 무슨 소리지? 싶었지만 나도 답했다. “당연히 오래된 친구들이 편하고 좋지. 근데 가끔 이렇게 새로운 사람들하고 어울리는 것도 재밌지 않아? 너도 그래서 나온 거잖아.” 그런데 그 주말이 지난 월요일, 학원 멤버들과 하는 단체 카톡방에서 A는 뜬금포로 이런 말을 남긴다.
나는 너보다 B랑 더 잘 맞는 거 같아.
황당했다. 개인 톡도 아니고, 잘 놀다 와서 뜬금포로 너 말고 다른 친구랑 더 잘 맞는다, 라니. 정확한 멘트는 기억나지 않지만 충고 한마디 날리고 카톡방을 나왔다. 그 상황을 다 지켜봐 놓고 A에게 따끔하게 한마디 하지 않는 학원 멤버들에게도 실망해서 싹 다 연락을 끊었다. 그 이후로 그녀 둘은 세상 이런 친구 없다는 듯이 단짝이 되어 일상을 보내고, 여행을 다니더라.
근데 나랑 안 맞는다고? 한때 내가 허세를 부리며 네트워킹 파티를 주최하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다니는데 열중했던 게 안 맞는다는건가? 그치만 그런 파티를 그녀들에게 함께하자고 강요하거나 민폐를 끼친 적은 없었다. 아니면 나의 그런 행동들이 서운해서? 근데 오히려 호텔 이벤트로 당첨된 레이디스 파티 패키지는 그녀들과 함께 다녀왔다.
어쨌든 앞선 경험에서도 깨달았듯이, 이번에도 내 양옆에 있던 두 명이 나를 빼고 잘 지내는 거에는 분명히 무슨 이유가 있겠거니 인정하는 게 먼저였다. 나 역시도 내가 생각하지 못한 순간에 상대에게 상처를 줬거나, 실수를 했거나, 배려 없이 행동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한편으론 내게 어떤 문제가 지속되었다면 A의 성격상 내가 잘못하는 부분에 대해 직선적으로 충고했을 거고, B의 경우는 이미 서로 간에 매몰된 실수, 상처 등의 감정들을 자조적으로 풀어내거나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넘어갈 수 있는 사이였다. ( 물론 여기에서 둘 다 한계점이 온걸수도 있다. )
또 일전에 이미 셋이 어울리며 서로 투닥거리다 풀었던 경험도 있지 않나? 그때 다 풀어놓고 이제 와서 이런다고? 생각이 꼬리를 물며, 내 탓 남 탓을 해봤지만 그래도 법륜스님은 일단 모든 문제는 나한테서 찾아야 된다고 하셨기 때문에 나의 문제는 무엇인가 몇 가지 더 떠올려보려는 노력을 했다.
그렇게 나 자신에게 각도기를 들이밀어 여러 각도로 재며 일정 기간의 반성 타임을 보낸 후에, 나는 다시, 더 이상 자학하지 않기로 했다. 그들도 이유가 있겠지. 안 맞으면 안 보면 되는 거지 뭐!
때때로 그때를 떠올리면 화가 난적도 있고, 둘이 영혼의 단짝이라도 된 듯이 잘 지낸다는 소식을 들으면 웃겨 진짜, 하며 분하기도 했지만 시간이 지나자 그 두 사람과 나를 분리해서 볼 수 있게 되었다. 함께 지낸 세월이 아깝다고 매달려 있어야 할 가치를 못 찾겠더라.
그 둘에게서 떨어져 있는 상태가 나에게 무한한 평화를 가져다줬다. 이전에 한번 해본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분하지도, 아쉽지도 않은 무감정, 무관심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었다.
내 인생에 집중하고, 내게 좋은 사람들을 챙기기에도 모자란 시간을 보냈다. 좋아하는 사람들 하고만 만나도 만날 시간이 모자랐다. 그런데, 그러던 어느 날 저녁, 익숙한 번호로 전화가 왔다.
너 결혼한다며
이유도 없이 잠수를 탔던 B의 전화였다. 1년 반만의 연락. 지금 A랑 같이 술 한잔 하고 있는데, 네가 결혼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냥 넘어갈 수가 없어서 연락을 했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