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비갑낫을 Jan 10. 2020

서른 넘어 손절한 관계들 (2)

손절 시리즈


인간의 기억력이란 어찌 그리 간사한지, 1년 넘게 안 보고 살았더니 좋았던 기억만 남아있었다고 회고한다. 한편으론 "분명 너네가 먼저 연락할 줄 알았다." 우쭐하기도 했고, 한편으론 결혼을 앞둔 친구에게 화해의 제스처로 다가오는 뻔한 스토리가 감동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했으니까.


그녀들과 전화를 끊자마자 문자가 도착했다. 그동안 미안하다는 내용이었고 나도 다시 연락이 되어 기쁘다는 답장을 보냈다. 나중에 보자고 하고 그날의 연락은 끝이 났다. 술을 마시면 으레 객기라는 게 생기지 않나. 다음날 둘 중 하나는 이불 킥하고 있을 수도 있겠구나 싶어 나도 더 이상의 연락은 하지 않았다.


째끔 고민도 있었다. 1년 넘게 안 만났는데 다시 만나서 예전처럼 셋이 잘 지낼 수 있을까? 이미 그 둘은 매일매일 일상을 공유하는 베프가 되어버렸는데, 내가 다시 그들 사이에 껴서 결을 맞춰갈 수 있을까? 아니 꼭 그래야만 하나?


이런저런 고민을 하고 있는데 엄마가 말했다. 먼저 연락이 왔으니 교만하게 굴지 말고, 오해가 있다면 풀고, 더 단단한 관계를 만들어가라고. 엄마는 늘 나에게 오랜 친구의 중요성을 강조해왔다. 주변에 진심으로 마음을 나눌만한 오랜 친구가 꼭 필요하다는 거였다.


그래, 이유가 있겠지. 한 명이 잠수를 타거나, 나를 빼고 둘만 만날 때에도 분명 무슨 이유가 있었을 거고, 다시 연락을 한 것도 이유가 있겠지, 그럼 이유라도 한번 들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친구로 지내려면 문제상황을 파악하고 개선해야한다 생각했다. 나는 먼저 그녀들에게 만나자고 했다.


그렇게 주말이 되었다. B가 먼저 약속 장소에 도착했고, 어색함을 풀기 위해 지난 1년간 서로의 근황을 풀어냈다. 그 와중에 꼭 해야만 하는 이야기는 없이 계속 얘기가 겉도는 것 같아 내가 물었다. 그때 왜 그렇게 잠수를 탄 건지? 내가 뭘 잘못한 게 있는 건지? 그리고 왜 A에게만 연락을 하고 둘만 만난 건지?




정확한 이유는 나도 잘 기억이 안 나




왜 그랬는지 모르겠단다. 딱히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행동했다? 분노게이지가 폭발할 뻔했지만 다시 만난 자리이니 “그래, 이유가 없을 수도 있지” 이해하는 척하고 넘어갔다. ( 이 날의 나란늬연을 반성한다. ) 그렇게 그날은 셋이 진하게 와인을 마시고 회포를 풀었다. 회포라고 하기엔 좀 웃기고, 근황 토크를 했다고 정정해야겠다.





아니 근데, 진짜 이유없이 그랬다고?




암튼 그날 이후로 셋의 카톡방은 다시 만들어졌고, 그렇게 다시 수학 학원 멤버들과의 단체 모임도 부활했다. 처음에는 나도 "어차피 지난 일인데 이유를 따지는 게 뭐가 중요해. 현재가 중요하지." 라며, 그녀들과 잘 지내려고 노력했다. 당시에 나는 결혼식을 앞두고 있기도 했고, 나를 축복해준다는 오랜 친구들을 굳이 밀어낼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 나는 그녀들과 결을 맞춰갈 수 없음을 직감했다. 일단 그들은 티키타카, 쿵하면 짝 정도가 아니라 서로의 의견에만 미친듯이 동조했다. 뭐 둘이 잘 맞아서 잘 지내는 거야 내가 샘낼 일은 아니지만, 문제는 그렇게 둘이 합세해서 나를 불쾌하게 하는데에 있었다. 그리고 내가 그 불편함을 표현할 틈조차 용납하지 않았다.


일례로 나는 청첩장 모임 대신 청첩장 파티를 했는데 우리 부부가 대학교 때부터 만났기에 서로 다 같이 친한 친구들이 많았고, 각자 모임에 나가서 청첩장을 돌리는 것보다는 신랑신부가 같이 인사를 하는 게 더 의미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지출해야 하는 예산이 부담스럽기도 했고, 결정적으론 내가 파티를 좋아한다는 이유도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내가 이런저런 이유를 구구절절 설명하며 조심스럽게 청첩장 파티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비아냥대기 바빴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반응은 역시나였던 것. 둘이 합세해서 공격하는 바람에 나의 피로감은 극에 달했다.



매우 피곤


그래도 어찌하랴 “맞다, 얘네 이런 거 싫어하지”라고 생각하며 와서 꼭 자리를 빛내주길 바란다고 좋게 마무리했다. 근데 그 파티에 왔건 못 왔건 아직까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내 친구들의 당시 반응은 그들과는 정반대였다. 신선하다고 응원하거나, 못 가서 미안하고 본식 때 꼭 보자는 말 이외에 다른 얘기는 없었으니까.


물론 특정 시간대에 친구들을 모이게 하고, 청첩장을 돌린다는 게 이기적인 행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청첩장은 무조건 개별 모임으로 몇 백씩 써가며 돌리는 게 정석이라는 법은 어디에도 없지 않나? 심지어 그렇게 고나리질을 하더니만 B는 개인적인 일이 있다며, 파티에 오지도 않았다. 그리고 이런 패턴으로 둘이 합세해서 나를 불쾌하게 만드는 일들이 왕왕 생겨났다.


이런 친구들의 특징이 있다. 그들의 불쾌한 언행에 불편함을 표현하면 "친구끼리 뭘 그런 거 가지고 그래, 우리 사이에 속좁게!" 라며 쪼잔뱅이를 만드는 경우. 그렇게 만들까 봐 선을 넘어와도 표현하지 않고 차츰 거리를 두면 그제서야 "내가 혹시 잘못한 거 있니?" 라며 다시 다가와서 같은 패턴 반복하는 경우. 또는 기껏 참다 참다 손절하면 "불만은 쌓아두지 말고 그때그때, 미리 이야기해줬어야지. 그게 진정한 친구 아니야?” 라며 적반하장인 경우.




씁씁 후후.



그래서 나는 이런 경우를 맞닥뜨리면 내가 이 관계를 유지할지 말지 결정하는 편이다. 애초부터 친구랍시고 선을 넘는 인간들은 말을 해줘도, 안 해줘도 지랄을 하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에게 두세번의 기회를 주는 것도, 참을 수 있을 때까지 참는 것도, 손절 타이밍도 내가 선택해서 결정하는 게 낫다. 그리고 이때가 아마 그 두세번의 기회 중 어느 언저리였을 거다.


암튼 나의 결혼식에는 그녀들이 축하해주러 왔고, 그건 진심으로 고마웠다. 결혼 후에는 신혼을 즐기느라 그녀들과의 만남에도, 학원 모임에도 거의 못나갔는데 그러자 자연스럽게 안전거리가 생겼다. 뭐 내가 안 나간 거니까 그들끼리 자주 만나고 친한 게 당연하다 생각하기로 했다. 누가 늦게 합류했건 이제는 하나의 모임으로 만나는 친구들이고, 사실 자주 만나는 관계가 장땡이니까.


그렇게 결혼식 이후로 두 달쯤 지났을 때였다. 단체 카톡방에서 다같이 보자는 이야기가 나왔고, 웬일인지 한 명도 빠짐없이 다들 시간이 된다고 했다. 원래도 시간 되는 사람들끼리만 만나곤 했기 때문에, 나는 여느 때처럼 참석여부에 대해 별말을 하지 않았다.


근데 모임 당일, 다른 친구들이 나에게 다시 한번 참석여부를 물어왔다. 남편하고 저녁을 먹기로해서 1차는 못갈 것 같으니 괜찮으면 2차 하러 우리집으로 오라고 제안했다. 마침 집들이 날짜를 정하고 있기도 했고, 1차 장소도 동네였고, 모두가 시간이 되는 날이니 괜찮겠다 싶었다.


정식으로 집들이를 해야 하지만 다들 시간 맞추기도 어려우니 오늘 모인김에 번개로 어떠냐고, 양해를 구하며 제안했고 친구들의 반응도 좋았다. 다들 콜을 외치면서 선물도 준비 못했는데 진짜 가도 되는 거냐고 빨리 1차 끝내고 넘어간다고 신나 했다. 그런데 B가 딴지를 걸기 시작했다.




왜 그러는거야 진짜....



내가 안 가도 분위기 처지지 않는다면서 안 간다니까 왜이렇게 화를 내는 건지... 이후로도 결혼을 했으면 좀 어른이 되라는 둥. 집들이 정식으로 하라는 둥. 열거하자면 기가 차는 카톡이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애들은 이러다 너네 또 싸우는 거 아니냐며 분위기를 풀으려고 했고, 나는 대응할 가치조차 느끼지 못해 할많하않 모드였다.


그렇게 실랑이를 하더니 다른 친구들의 성화에 못 이겼는지, 그날 결국 다들 우리 집에 왔다. 근데 우리 집에 와서조차 B는 남편에게 얘가 정말 성격이 이상하다는 둥, 끊임없이 내 단점에 대해 토로해댔다. 오빠는 대학교 때부터 봐왔던 친구고, 취한 것 같으니 그냥 넘어가자고 했고, 나도 이 날은 B가 내게 서운한 게 많았나 보다 가엾게 여기며 넘기기로 했다.


그리고 그 날 이후로 나는 다시 내 생활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들과는 안전거리 유지가 필수란 걸 깨달았다. 만남은 없었지만 카톡방은 유지되는 상태, SNS로 소통하는 관계. 그 후로도 B는 종종 개인 톡으로 연락이 왔는데, 연애와 결혼 등에 대한 고민이 주를 이루었고 특히 결혼에 대해 무척이나 심각하게 열망하고 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녀를 진심으로 위로하고, 공감하려 노력했다.




나 드디어 결혼해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B가 중대발표를 하겠다더니 결혼을 한다고 했다. 하루만에 결정했단다. 대학생 때에도, 그 해 초에도 만났던 사람이라 번갯불에 콩 구웠다며 기뻐하자 A는 맞장구를 쳐주었고, 둘은 온갖 호들갑을 떨어댔다. 나는 솔직히 의아했지만 티를 내진 않았다. 우리는 성인이고, 본인의 선택이니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겠지, 하며 축하와 응원을 보낼 수밖에.


그 후로 B는 결혼 준비에 돌입한다고 했고, 나를 선배님으로 모시겠다면서 개인 톡이 자주 왔는데, 내용이 참 별로였다. 매번 결혼과 관련된 제반 사항들을 대충, 아무렇게나 선택해도 되는 거냐는 식의 질문이었다. 나중에는 그런 질문을 대체 왜 나한테 하는건가 싶어서 한마디 했는데, 한참 지난 내 결혼 준비를 들먹이며 비아냥으로 돌아오는 것이 아닌가.




가만있는데 대체 왜 그래...



암튼 이런 소모적인 연락이 계속되자 그야말로 나는 폭발했다. 치사하고 유치하지만, 그녀가 나에게 했던대로 이유 없는 잠수만이 답이었다. 내 태도가 싹 바뀌고 연락이 잘 되지 않자, 그녀들은 번갈아가며 만나자고 연락이 왔다. B는 끝까지 만나서 청첩장을 주고 싶다며 안달을 했지만 나는 온몸으로 거절했다. 그리고 그녀의 결혼식에 불참하는 것으로 그녀들과 손절했다. ( 축의는 전달했습니다. )



큰 깨달음 얻고 갑니다.




사실 이 글에서는 내가 그들과 손절한 "이유만” 다루었기 때문에 좋은 내용은 하나도 첨가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건 내 입장에서 빡친 부분만 썼기 때문에 삼자대면을 한다면 또 다른 이야기가 나올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철저히 1인칭 주인공 시점이라 과거에 있었던 일들이 일부분 자의적으로 해석, 편집, 생략될 수도 있었다는 점을 밝힌다.


돌이켜보면, 각각 따로 만날 때에는 두 사람 모두 내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친구였다. 물론 셋이 만날 때에도 좋은 추억은 많았다. 그녀들이 내게 칭찬과 응원과 위로를 퍼부어준 날들도 있었고, 서로에게 진정한 친구가 되어주었던 순간도 있었으니까. 그렇지만 이제 나는 내 정신건강과 마음의 평화를 위해 그들과 최대한의 안전거리를 유지하며, 그들이 어디서 무얼 하며 살든 행복하기를, 세계평화 기원하듯 바래보련다.

작가의 이전글 서른 넘어 손절한 관계들 (1)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