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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갑낫을 Dec 26. 2019

스물 넘어 손절한 관계들

손절 시리즈



이 이야기는 중딩 때 만난 친구와의 인연으로 시작한다. 그녀와 나는 매일 저녁 학원 앞에서 돌돌이(핫도그)나 아이스크림 와를 사 먹으며 행복해하고, 학원에서는 선의의 경쟁을 펼치는 친구였다. 그리고 고등학교 2학년 때, 운명처럼 같은 반이 되었다.


그렇게 2학년 9반에서 만난 우리 둘을 포함한 4명의 여고생은 당시 유행하던 그룹 이름을 착안해 등치기라는 하나의 모임으로 재탄생했다.  시절의 추억들을 곱씹으려면 끝도 없을 테지만 수능 끝나고, 넷이 모여 처음으로 술을 마셨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우리는 각자 다른 대학에 진학했지만 대학생이 되어서도 주구장창 만났다.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는 즐거움만큼이나  추억이 가득한 친구들을 만나는 행복도 컸다. 누군가  명이 이별하면 같이 술을 마셔주며 위로했고, 꿈과 현실 사이에서 방황하면 같이 눈물을 흘리며 공감해주는 사이였으니까.



 

우리도 한때는...



물론 그 시간 동안 우리에게 늘 좋은 일만 있었던 건 아니다. 과거는 철저하게 각자의 입장에서 왜곡될 수 있고, 같은 일도 다른 기억으로 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 역시 지금은 그때의 소소한 감정들이 잘 기억나지 않지만 당시엔 서로에 대한 서운함과 오해, 질투나 시기, 미움 등의 감정들도 분명 뒤섞여 있었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그때의 나는 대외활동에 빠져있었고, 대외활동에서 만난 새로운 인연과 공모전, 자기 계발 등에 혈안이 되어있었다. 그러다 오랜 친구인 그녀들을 만나,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어디에 취직할 수 있을지 등을 고민할 때면 나는 내가 그려갈 미래에 대해 최대한 구체적으로 털어놓곤 했다.



지금까지 대외활동하면서 고민해봤는데...
내가 한우물만 파는 스타일도 아니고
여러 분야에서 이거 저거 한 거더라고...

이런 경험들이랑 연계할 수 있는 직업이
뭐가 있을까 하다가 찾은 게 쇼호스트야.
화장품부터 여행상품까지 다 팔아야 하잖아?

쇼호스트 한번 준비해보게.
내년부터 쇼호스트 아카데미 다녀보려고.



이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한 게 2011년 겨울이었고, 다음 해인 2012년에는 무조건 내 힘으로 학원비를 마련해서 쇼호스트 학원에 등록할 거라고도 했었다. 모두는 나에게 너의 계획과 꿈을 응원한다고 했고, 그녀 역시 묵묵히 내 이야기를 듣고 응원해주었던 걸로 기억한다.




내년에는 꼭 아카데미 등록해야지!



그렇게 우리는 2012년을 맞이했고, 여느 때처럼 1월 에 있는 내 생일에 어떤 파티를 할지, 어디서 만날지 등등 약속을 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녀가 주말에는 미리 등록한 학원 일정 때문에 만날 수 없다고 했다. 분명히 일정이 된다고 했었고, 우리가 학원 때문에 만날 약속을 미루는 경우는 고등학생 때에도 없었기 때문에 나는 무슨 학원인지 물었다.





무슨 학원인데? 많이 바쁜 거야?





그녀는 나의 질문에 답을 회피한 채 바쁘다며 얼버무렸고, 그 후로도 연락이 잘 닿지 않았다. 또 중간에서 일정 조율을 도맡아 하던 다른 친구들도 그 친구가 무슨 학원을 다니는지 나에게 바로 이야기해주질 않았다. 그리고 얼마 후에 내가 알게 된 사실은, 그 친구가 쇼호스트 아카데미에 등록했다는 거였다.




응. 그랬구나^^




아니, 쇼호스트 아카데미가 다 내꺼도 아니고, 나만 다닐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그냥 네 이야기를 듣다 보니, 나도 관심이 생겨 먼저 등록했다. 이 말 한마디면 되는 건데, 그 말이 그렇게도 어려웠을까.  


그때 나는 그녀의 행동도, 다른 친구들의 행동도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얘네 사이에서 왕따인데 눈치가 없었나?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며 그동안 넷이 함께해온 모든 시간이 한순간에 부질없이 느껴졌다. 그리고 나는 이 사건을 계기로, 그녀는 물론이고 다른 친구들과도 손절했다.



손절
노력해도 될 가능성이 낮은 상황일 경우 노력을 포기하고 자신의 에너지를 절약하는 행위를 뜻하는 은어. 경제용어인 '손절매'에서 유래



내가 연락을 끊었더니 자연스럽게 우리 넷의 관계도 정리되었다. 뭘 그런 이유로 오랜 친구를 다 끊어버렸냐고 할 수도 있고, 차라리 따져 묻지 그랬냐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관계를 끊고, 그 모임에서 빠지는 쪽을 택했다. 내가 먼저 이유를 묻고, 풀어가며 노력해야 할 만한 가치를 잃은 관계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친구관계가 아니라 이해관계였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일을 계기로 인정해야만 하는 사실들이 있었다. 첫 번째는 나라는 사람이 이런 일에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넘어갈 수 있는 그릇의 인간이 아니라는 것이다. 어쩌면 이런 일로 손절할 만큼 내가 그녀를 진정한 친구로 생각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또 내 삶과 정신을 피곤하게 만드는 인간관계에 대해 무척이나 회의적인 사람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두 번째는 그 모임에서 다른 두 명의 친구가 내가 아닌 그녀를 택했고, 그 셋은 여전히 잘 지내는 것에도 이유가 있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 그동안 친구로 지내며 내가 잘못한 게 있거나, 나와는 잘 맞지 않는다거나 내게 불만이 있었을 수도 있겠구나, 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처음에는 내가 성격에 문제가 있나? 내가 잘못하는 게 많았나? 하며 자조적인 생각도 많이 했지만 그렇다고 내가 다른 친구들과 잘 못 지내는 것도 아니고, 완벽한 인간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더이상 자학하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그 이유가 무엇이든 내가 거리두기를 실천한 이상 그런 것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문제였다.


나도 철저하게 나 자신을 우선순위에 두고 결정한 일이었다. 어쩌면 서로가 서로를 진정한 친구로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 때 친구가 되고, 관계가 이어진다고 생각한다. 어떤 이유에서든 그 상호작용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멀어질 수 있는 것 또한 친구 관계인 거다.




연연하지 말자



나는 이때 비로소 굳게 다짐할 수 있었다. 이 에너지를 절약해서 진정한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는 관계를 만들어 가야지, 내 사람들을 더 열심히 챙기며 살아가야지! 그렇게 마음먹고 관심을 끊고 나니 미움, 분노, 질투, 시기가 없는 무감정의 상태,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었다. 이제는 그녀들을 떠올려도 아무런 감정이 없다. 어딘가 각자의 자리에서 다들 무탈하고 행복하게 잘 지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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