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가리영 Nov 03. 2023

미련한 삶을 버리기로 했다.

첫 번째 투척 : 궁상맞은 씀씀이

 아이가 업혀있다. 스스로 걷지 않겠다고 한다. 길에서 떼를 부리고 울기시작한다.  절대로 내 등에서 내려오지 않는단다. 아이의 양손이 내 목을 옭아매며 아이는 더 쪼여온다. 나는 숨이 턱 막힌다. 이미 내  왼쪽손에는 아이와 함께 챙겨나간 기저귀 가방이 한 보따리 그리고 다른 손에는 장을 본 묵직한 봉투가 손 목에서 빨간 자국을 남기며 들려있다.

 

생존의 위험이 느껴지는 순간이지만 나는 이미 버스를 타고 내려 한참을 걸어 올라가야 한다. 오늘도 나는 3000원을 아껴보겠다고 택시를 타지 않고  처참한 체력의 한계 테스트를 하고 있다. 택시를 탔더라면... 집 앞에서 내렸을 텐데.. 나는 왜 오늘도  단 몇 푼에 이 고생을 하나 싶다.


무려 10년 전 이야기이다. 그땐 그렇게 매일 아끼는 것이 미덕인 마냥 내 몸이 혹사당하는지도 모르고 남아있지도 않는 체력을 깡으로 버티며 젊음을 써버렸다. 2년마다 한 번씩 하는 건강검진 기록 결과지에는 그때 깡으로 버틴 시간이 몸에 준 상처로 남아 추적검사 요망, 염증성 반응, 백혈구 감소, 자율신경 실조, 자궁 선근증 등등으로 건강 이상 소견이 한 줄씩 더해졌다.


아직 살아 있기에 버틴 것인지 버티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미련스럽게도 아직까지도 나는 궁상맞은 삶을 더 잘 버티고 있다.  그리고 여전히 궁상맞은 씀씀이를 유지하고 있다.





 장애가 있는 둘째 아이는 대중 버스를 타고 학교에 간다. 지적장애에 편마비, 그리고 아직 말을 하지 못해서 매일 아침 학교에 데려다줘야 한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모진바람이 부나 날이 좋으나 나는 아이의 손을 잡고 버스 시간에 맞춰 뛰어야 한다.

오고 가는 시간이 차로 다니면 20분이며 충분할 것인데 버스를 타니 족히  한 시간 정도 걸린다.

(버스 시간 맞춰 걸어 내려가기 6분, 버스 기다리기 3분, 버스 타기 10분 --도움반 교실에 데려다 주기 10분 --다시 돌아오기는 걸어서 25분 )


사람이 많은 날은 아이와 버스 안에서 휘청거리기도 하고 왜 이 아이는 가까운 학교 두고 멀리까지 가냐는 질문도 수차례 받아야 한다. 아이가 몇 살이기에 아직도 말을 못 하냐는 질문도 매번 받는다. 아이의 남다름에 대한 질문들이지만 나는 불편한 마음을 감추고 애써 웃으며 대답한다. 몸이 사서 고생하는 고단함에 더해진 불편한 시선과 이야기에 나는 아이 통학에 대한 개인적인 공간이 갖고 싶어졌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차를 사고 싶다. 그리고 먼저 겁이 많고 불안증이 심해 면허는 있지만 운전이 서툰 나에게 3번 정도의 충분한 자동차 연수를 받고 싶다.  러나 아직 그럴 여유가 없다. 매달 나가는 아파트 대출금이 여유없음의 큰 이유였다. 그리고 외벌이가 주는 소득의 한계는 다음 이유이다.




궁상맞은 삶이 나에게 오랜 수업이 되어버렸는지 나는 몸이 고생하는 하루에 더 익숙하다. 편리함을 주는 다양한 도구를 두고도 고전적이라며 불편함을 감수하고 산다. 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먹고 싶은 것이 있어도 나는 참는 것에 먼저 익숙한 사람이다.


 그런 나에게  고생한다. 대단하다. 힘들어 어쩌니?라는 말은 없다.  버스에서 만난 가족은 나에게 꼭 환승해서 돈을 내지 말고 가라고 확인사살을 시키셨다. 길을 가다가 만나면 아이를 업고 고생하며 걸어가는 나에게 저기 저편의 버스정류장을 알려주며 꼭 버스 타고 집에 가야 한다고 지시하였다. 무척이나 고단했지만 나는 여전히 티 내지 못하고 웃으며 네~~라고 대답한다.


참으로 미련하다.


 나는 왜 이리 궁상맞아졌을까? 나는 어쩌다 이리 궁상맞은 하루에 잘 적응해 버렸을까? 이게 뭐라고 나는 열심일까? 누구도 인정해주지 않고 몸만 축나버린 하루에 나는 서글프다면서도 바꿔보려는 의지가 없다.  자기의 생각이 타인의 생각에 의해서 조종이 되는 걸 가스라이팅이라고 하던데... 나는 궁상의 삶이 내 삶에 조종이 되어버린 상태인가 싶다.


13년의  궁상, 이제는 벗어나고 싶어서 글이라도 써본다. 나의 의지가 사실은 이렇다고 나도 사실은 편하고 싶다고 말이다. 미덕일지도 모르다고 생각했던 아낌이 사실은 궁상이라고 불린다는 걸 안 이후 나는 지지리도 궁상맞다는 말에서 벗어나고 싶어졌다. 몇 푼 남아있지 않고 근근이 버티게 하는 통장의 잔고가 어쩌면 날 가스라이팅 한 것이지만 말이다.


삶의 무게를 덜어보고 싶지만 쉽게 떨치지 못한다. 미련해서 인가 보다 싶어 속으로 운다. 미련함을 버리는 법 누가 알려주세요.

사진출처는 픽사베이입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