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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리영 Nov 08. 2023

연봉이  100배 올랐다.

그래서 브런치를 시작하기로 했다.

코인을 했냐고? 아님 주식? 부동산 투자?


 재테크엔 관심도 없고 재주도 없다. 그저 남편이 받아오는 월급을 쪼개고 쪼개서 아껴 쓰는데 익숙해진 사람이다. 누군가는 아파트를 분양받아 프리미엄을 받고 자산을 늘렸다. 또 어떤 이는 가상화폐를 투자하여 벼락부자가 되었다고 했다. 주식의 빨간색과 파란색을 매일 들여다보는 것은 나하 곤 맞지 않다. 오르내리는 그래프 선에 하루 중 나의 감정이  과하게 설레거나 무너질 듯 낙심하게 될까 봐 관심조차 주지 않았다. 그저 장바구니에서 이건 덜 필요했겠군 하고 덜어대는 데에 대한 셈이 더 빠르다.


 나는 수에 약한 사람이다. 내가 무엇을 해야 얼마나 벌지 그리고 이익이 있을지를 따지는데 익숙한 사람이 아니다.  단지 작년에 비해 올해 나의  연봉이 100배 올랐다는 계산만 정확히 알게 된 단순한 사람이다.  13년의 결혼생활 중 11년 동안 나는 무보수의 일을 했다. 가정주부의 일을 월급으로 따진다면 최소 350만 원이 된다고 하지만 나는 수고에 대한 보수는 생각하지도 그리고 받지도 못했다.




 그렇게 10년의 결혼생활이 넘어가자 나의 경력단절의 시간도 함께 길어졌다. 하루종일 무릎을 꿇은 채로 유난히 작고 깡마른 아이를 밥그릇과 수저를 들고 따라다니느라 바쁜 사람이었다. 아이의 몸무게가 1킬로라도 늘어난다면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마음으로 온갖 재료를 다 갈아서 끓이고 고 죽을 쒀봤다.  바지마다 무릎은 색이 빠지고 닳아질 정도로 기어 다니며 나는 아이 앞에서 제발  한수저만을 구걸하는 사람이었다. 수저가 나의 주된 업무 용도였고 뒤돌아 서면 쌓여있는 설거지가 일에 대한 보수처럼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아이가 학교에 갔다. 아직 말을 하지 못하고  지적장애 중증을 진단받아 도움반에 갔다. 혹여나 옷에 대소변 수를 하진 않을지... 유난히 가느다랗고 힘없는 다리여서 훅 넘어지는 건 아닌지 아이가 가진 뇌질환도 걱정이 되어 하루종일 등교를 시켜놓고 마음을 졸였다. 학교 근처 의자에 앉아 서성이기도 하고 학교 앞 교회에서 기도를 하기도 했다.




  어느 날 학교에서 문자가 왔다. 매주 목요일   [학부모 자기 계발수업] 신청 문자였다. 학교 밖에서 걱정하느니 학교 안에 들어가 아이 가까이에라도 있어보자라는 마음에 신청하게 되었고 12주 동안 캘리그래피와 그림책동화구연을 배우게 되었다.


 아이가 걱정되어 신청했지만 수업시간 동안 나를 위해서 배운다는 게 오랜만의 일이라 무척이나 설레고 신이 났다. 교육 중  담당 선생님은 학부모들에게 교내 학생들과 함께 독서감상문 대회에도 나가 보는 게 어떻겠냐는 제안을 하셨다. 평소 책을 좋아하는 나는 독서감상문을 쓴다는 게 한번 해볼 만한 도전처럼 느껴졌다.


 독서감상문대회의 결과 학부모 3명이 함께 단체 우수상을 받았다. 그때 받은 상장과 상금 안의 봉투에 문화상품권 만 원짜리가 3장 들어있었다. 결혼 후 처음으로 받은 내가 한 일에 대한  보수였다.


 인스타그램에 인증 사진을 올리고 "나는 올해 연봉 3만 원인가?"라는 피드를 올리자 다른 엄마들은

"ㅋㅋㅋ 빵 터짐"이라고 말하며 웃기도 하고 "대단한 도전이네"라는 말과 축하인사를 남기기도 했다.

초봉 3만 원


  나는 내 미래에 대해  큰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이왕 버는 거  3만 원의 오만배는 벌고 싶어졌다! 주부백수 탈출해서  손으로 직접 돈을 벌어서 편하게 써보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도 하게 되었다. 3만 원의 문화상품권으로 나는 나를 위한 책을 사보았다. 나를 위로하고 나에게 힘을 주고 나를  성장하게 하는  책을 사보고 싶었다. 그때 박완서 작가의 호미가 눈에 띄었다. 박완서 작가의 이름을 검색창에 쳐보니  작가 또한  아이들을 키우고 40이라는 나이에 처음 등단했다는 말이  쓰여있었다.  박완서 작가의 삶이 나에게


'너도 해봐~ '라는 울림을 주었다.


 그러다 올해 한 제의가 들어왔다. 아이들을 위한 감성수업을 해보지 않겠냐고 잠시 망설여졌지만 나는 새로운 일에 대한 도전을 해보겠다고 했다. 그렇게 나는 아이들과 일하는 사람이 되었고 프리랜서 감성수업 강사가 되었다.


첫 3만 원을 받던 그날로부터  딱 일 년이 된 오늘

나는 100배의 연봉을 벌게 되었다. 시작이 작아서 오히려 100배라는 큰 성과가 생겼는지 모른다. 


 글이 계속 쓰고 싶어 졌고 도전해보고 싶어졌다. 브런치 앱을 통해 작가 도전하는 프로젝트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몇 번의 n수로 낙심의 순간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다시 나의 생각과 글을 다듬어보았다. 부족한 부분을 다듬어가며  도착한 브런치 작가가 되신 걸 축하드립니다 라는 메일이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드디어 나도 작가다!. 마음껏 글을 써봐야지라는 행복한 마음으로 하루종일 글감을 찾아다닌다. 또한 경력단절이었던 그 시간 속에서 나는 누구보다도 경험에 있어서는 부자였기에 풀어낼 이야기들이 많다. 남들과는 다른 삶이었지만  웃다 울다 울다 웃던  삶의 굴곡은 누구나 정도의 차이만 있지 가지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글을 쓰며 서로 공감하고 위로하는 소통을 하고 싶다.


 초봉 3만 원도 받던 백주부의 시간부터 앞으로 더 성장해 가는 작가 [가리영 ] 이야기를 펼쳐보려고 한다.


일 년 만에 연봉이 100배 올랐는데

5만 배 못 오를게 뭐 있나! 자 ~ 도전!!


사진출처는 픽사베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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