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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로Roro Feb 04. 2024

4/100 나의 멜랑꼴리아

(10년 주기로 찾아오는 나의 우울감)

 혜성이 떠나간 뒤에 나는 남겨졌고 내 안의 한구석은 폐허가 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남에 빈터가 덩굴에 뒤덮이듯, 그 폐허도 열대우림 속 밀림으로 뒤덮였다. 디즈니 픽사 애니메이션 '인사이드 아웃'의 라일라처럼, 나의 성격의 어떤 부분은 무너지고 어떤 부분은 새로 생겨났지. 집에서는 장난꾸러기 막내였을 것이고, 학교 가는 길 내내 점점 그러데이션처럼 과묵해졌을 것이다.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동굴 속에서 밖을 관찰하든 내 안의 깊숙한 어떤 곳에서 제한된 시선 안에서 최소한의 학교 생활을 해 나갔다. 그런 동굴을 가끔씩 빠꼼히 바라보는 아이들이 있었는데, 호기심에 눈이 반짝거렸다. 어느 날은 학교 가는 길이 몹시 추워서 괜히 엄마 말 안 듣고 얇은 재킷을 입었네,라는 생각으로 뚜벅뚜벅 걷고 있었다. 그런데 같은 반 반장 여자아이가 나를 향해 인사하면서, '너, 왜 혼잣말해?' 했다. 나는 딱 멈춰 서서 아무 말도 안 하고 그 애가 멀어질 때까지 그대로 서 있었다. 쉬는 시간, 나는 어쩐지 쓸데없이 용기를 내면서 반장을 향해 말을 걸었다. '아까, 너무 추워서, 아 춥다, 춥다 하고 했던 거야. 다른 말은 안 했어.'라고 아까부터 연습한 말을 비장하게 내뱉었다. 반장은 응? 하며 나를 한동안 쳐다봤다. 그런 말을 자기가 걸었다는 사실을 잊었다가 어렴풋이 기억하더니, '아아'하며 이며, 끄덕였다. 나는 앞으로 등하굣길에 입술을 꾹 다물기로 결심했다. 나도 모르게 혼잣말을 했는지도 몰랐거니와, 그걸 누가 보고 언급을 했다는 사실자체가 어쩐지 창피했다. 그리고 혹시나 해서 목도리를 둘둘 감아 입을 가렸다. 그러고 며칠이 지났을까? 반장 아이가 나에게 '무지개클럽'초대장을 만들어서 내밀었다. 초대장 안에는, 날짜, 시간, 자기 집 주소가 적혀있었다. 무지개클럽멤버는 빨주노초파남보로 정해졌는데, 나에게도 색깔을 맡아달라고 했다. '나는 무슨 색인데?' 하자 와서 정하자고 했다. 반장은 인기가 많은 아이였고 주변에는 늘 친구가 넘쳤는데, 나까지 굳이 왜?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초대 자체가 싫지는 않았다. 여하튼 이 초대장을 들고 터벅터벅 부모님께 내밀며 이날 친구네 집에 가도 되냐고 물어봤는데, 부모님이 너무 좋아하셔서 매우 놀랐던 기억이 생생하다. 꼭 가라고! 반드시 가라고 자꾸 거듭 확인하셔서,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친구랑 어울려 노는 일이 잘 없어서 걱정하셨던 것은 아니었을지. (아예 없진 않았다. 그래도 있긴 있었다. 하지만 띄엄띄엄 가뭄에 콩 나듯 만나는 만남보다는 뭔가 빨주노초파남보 멤버 중 하나가 되어 딸이 친구들과 어울리는 모습을 생각하면 신나셨을지도 모른다. 아예 없진 않았는데.) '딸, 무슨 색깔 하기로 했어?'라는 부모님의 물음에 나는 가장 경쟁률이 낮을 것 같은 남색을 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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