롱블랙 8월 1일, 문장채집 no. 175
롱블랙 8월 1일, 문장채집 no. 175
녹기 전에 : 아이스크림과 같은 인생, 녹기 전에 즐겨라
본문 https://www.longblack.co/note/373
1. 녹기전에는 마포구 염리동에 자리한 아이스크림 가게. 지금까지 판매한 아이스크림이 종류로만 350종. 이곳은 아이스크림을 먹어야 할 철학적 이유를 만들어 주는 곳. 여기 인스타에 가면 덥수룩한 수염의 박정수 대표가 우리를 맞이해요. 나도 모르게 피식.
2. 2017년 익선동에 문을 열었고. 2020년 염리동으로. 하루에 쓰는 우유량은 2톤. 그 비결론 박 대표는 뜻밖의 답을. '아이스크림은 굿즈로 팔고 있어요'. 그가 세상에 말하고 싶은 메시지를 전달하는 가장 적합한 도구.
3. 녹기전에 매장에는 간판이 없. 대신 큼지막한 아날로그 시계가. 문패 자리에는 달력이. 모두 흘러가는 시간을 나타내는 물건. 녹아내리는 아이스크림을 보며, 시간이 흐르는 걸 알 수. 박 대표가 아이스크림을 좋아하는 이유.
4. 아이스크림은 마치 종교와도 같아요. 경외심을 가질 정도. 시계가 아닌 것들 중 시간의 흐름을 가장 잘 보여주는 매개체가 바로 그것. 녹은 건 풍미도 질감도 전혀 다르게 변합니다. 녹기 전 딱 그 상태로 도저히 돌아갈 수 없죠. 그러니까 아이스크림에게 생이 있다면, 아이스크림이 그것으로 존재할 수 있는 지금이 가장 아름다운 순간.
5. 그는 카이스트를 졸업하고 두산중공업에 입사. 7개월 만에 퇴사. 다음 현대차에 들어가 4개월 만에 퇴사. 아이스크림 가게를 하고 싶어서요. "저는 죽을 때 행복하고 싶다고 생각. 그러려면 죽는 순간, 떠올릴 추억이 많아야겠더라구요. 직업을 다양하게 가지고, 여러 경험을 하며 살면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6. 녹기전에는 매일 메뉴가 바뀝니다. 단골은 아마 '매일 달라지는 메뉴가 그들의 콘텐츠 전략일 것이다'고 생각. 하지만 박대표는 본인의 재미를 위해서라고! 합니다. 가게가 지속 가능하려면 무엇보다 가게를 하는 사람이 재밌어야 합니다. 아이스크림은 변화구를 주기에 완벽한 도구. 그림으로 치면 팔레트고, 음악으로 치면 악기 같은 거. 그는 신메뉴를 개발할 때 이야기를 더합니다.
7. 손님이 당근을 보내왔어요. 당근으로 맛있는 아이스크림을 만들어 달라고. 박 대표는 인스타에 메뉴 개발 과정을 올립니다. "사실 나는 당근을 싫어한다"는 글과 함께.
8. 박대표가 이야기를 찾아 나서기도. 녹전 마 메뉴. 손님들이 가게를 '녹전'으로 줄여 불렀어요. 마침 안동에 녹전마을이. 호기심에 차를 몰고 마을을 찾아갔죠. 온통 녹전이란 이름이. 녹전 우체국 국장님도 만났어요. 돌아올 땐 마을의 특산품인 마를 한 박스. 신 메뉴를 만들고 추억을 기념하려.
9. 일상에서도 이야기를 만들었어요. 예를 들면 요일 시리즈.
10. 손님과 오래 소통하는 장치를 매장에 심어 놓기도. 방명록도 그중 하나. 나무위키 링크를 QR로 붙여두기도. 녹기 전에는 무려 나무위키가 있는 아이스크림 가게. 단골이 자발적으로 만든 팬페이지같은 개념.
11. 나무위키, 인스타를 보고 오신 분들은 시선 위치부터 달라요. 아이스크림을 보는 대신, 제 눈을 보면서 들어와요. 그런 분들에겐 농담을 던집니다. 머리를 쓴다기보단, 육체적인 머리를 씁니다. 온몸으로 지각하고 느끼고 사람들이 어떻게 하고 있구나를 파악. 데이터를 쌓아놓고 매뉴얼대로 하면 결국 티가.
12. 이곳의 맛이 최고냐 하면 그건 잘 몰라요. 확실한 건, 재밌는 아이스크림 가게는 없다는 것. 이벤트를 할 때면 제가 에너지를 받아요. 한 번은 손님들이 10년 이상 된 물건을 매장에 가져오면 선물을 주는 이벤트를 했어요. 그런데 한 손님이 100년 된 첼로를 들고 왔어요. 매장에서 직접 연주까지. 작은 매장에 소리가 퍼지는데, 어느새 눈물이.
13. 좋은 기획은 자극을 먹고 자란다. 새로운 영감을 얻기 위해 노력해야. 제 영감의 반은 책에서, 반은 거리에서 나와요.
녹기전에 인스타 https://www.instagram.com/before.it.mel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