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은 책 문장 채집 no.45
2021년. 카카오프로젝트 100. [문장채집] 100일 간 진행합니다.
1) 새로운 책이 아닌, 읽은 책 중에서 한 권을 뽑습니다.
2) 밑줄이나 모서리를 접은 부분을 중심을 읽고, 그 대목을 채집합니다.
3) 1일 / 읽은 책 1권 / 1개의 문장이 목표입니다(만 하다보면 조금은 바뀔 수 있겠죠).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 박완서
1. 지금 내 나이가 치열하게 사는 이보다는 그날그날의 행복감을 놓치지 않도록 여유를 가지고 사는 사람이 더 부럽고, 남들이 미덕으로 치는 일 욕심도 지나치면 오히려 돈 욕심보다 더 딱하게 보이는 노경에 이르렀다는 걸 무슨 수로 숨기겠는가.. 글을 쓸 수 있는 한 지루하지 않게 살 수 있다는 게 감사할 뿐이다.(p 5)
2. 유복한 사람의 눈으로 보는 모든 것은 얼마나 친근하고 아름다운 것일까? 구석자리에서 서로의 손을 애무하는 연인들. 아까부터 기고만장 토론을 벌이는 장발의 청년들. 알사탕 같은 전구를 조롱조롱 매단 은빛 크리스마스 트리. 그리고 미더운 내남편. 나는 문득 잘사는 여러 친구들의 이름을 아무런 아픔 없이 구구단처럼 암송할 수도 있어진다.(p. 16)
3. 앞니가 두 개 빠지고, 귓바퀴엔 버들강아지 같은 솜털을 두른 이 소중한 외아들에 대한 애정은 가슴이 저릴 만큼 절실하다. 어떻게 끗발에 그래도 고추 달린 놈을 낳았노 생각할수록 신통하고 누구에게랄 것 없이 두루 감사하다.(p.16)
4. 나는 눈치껏 대의원 벼슬이 알맞을 만큼 살집 좋고 거만해 보이는 부인 옆으로 가서 섰다.(p 29)
5. 소주는 향그럽고 뜨겁다. 나는 후각과 미각을 동시에 즐긴다. 혀를 아프게 찌르고 목구멍을 화끈하도록 뜨겁게 지나간다.. 한 방울도 헤프게 목구멍을 통과하는 법이 없다.. 산다는 게 조금씩 즐겁다.(p. 45)
6. 나는 나의 침묵과 그의 침묵 사이에 깊은 간극을 느꼈다. 내 침묵은 많은 할말을 수줍음과 두려움 때문에 미처 처리하지 못한 때문이었으나, 그는 정말로 할말이 있을 리 없는 텅 빈 침묵으로 나를 대했다.(p. 58)
7. 나는 그 앞에 그렇게 무력했고, 그는 그렇게 전능했다.(p. 79)
8. 사람이 죽으면 아이고 아이고 곡을 한다. 눈물이 마르면 침을 몰래몰래 발라가며, 기운이 빠지면 박카스를 꼴깍꼴깍 마셔가며 아이고 아이고 곡을 하고 조상객을 치르고, 노름꾼을 치르고, 거지를 치르고, 복잡하고 복잡한 절차 때문에 웃어른과 아랫사람과 말다툼도 치르고, 차례에 제사에 또 제사를 치른다. 그래서 살아남은 사람은 기운이 빠질 대로 빠지고 진저리가 나고, 빈털터리가 되고 지긋지긋해지면서 죽은 사람에게서까지 정나미가 떨어진다. 비로소 산 사람은 죽은 사람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것이다.(107-1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