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줄근해도 후달리진 말자
후달릴 것인가? 달릴 것인가?
요가를 하고 싶었다. 인도 바라나시에서 한 시간 요가 수업에 참여했고, 주변에 요가 하는 남자들이 그렇게나 쿨해 보였다. 요가 입문을 위해 '아무튼 요가'란 책도 챙겨 읽었다. 삐뚤삐뚤 걷는 자세를 보고, 와이프가 추천한 운동도 요가였다. 요가를 위한 준비는 완벽했다. 동네를 돌며 학원 위치까지 알아 놓았다. 그 때 코로나가 왔다. 그리고 와이프는 '실내 운동'이란 이유로 요가를 반대했다. 출발선에서 내려 와야 했다. 코로나 등쌀에 움직임이 점점 덜해지니, 걸어다니기 보다 굴러다니는게 더 좋겠단 생각이 들 즈음, 난 내가 확진자가 아닌 확찐자 란 걸 알게 됐다. 뭐라도 해야만 했다. 눈에 불을 켜니, 달리기가 후욱 들어왔다. 야외 운동이고, 혼자 운동이라 안전했다. 페이스북에서 지인들의 달리기 사진을 많이 본 것도 자극이 됐다. 멋진 풍경에 달린 코스와 거리, 시간이 기록되어 있었다. 한 동료는 매주 목요일 저녁, 한강을 달리는 번개 모임을 만들었다. 그의 페북 이야기 절반은 달리기 얘기였다. 그 얘기의 정점은 15k 가까이 살을 뺐다!란 부분이었다. 오오오!! 달리기로 살빼기라니. 달리기를 해야 할 이유가 더 또렷해졌다. 관심을 가지니, 지인들의 달리기 얘긴 끝도 없이 이어졌다. 휴가를 내서, 달리기 친구들과 포틀랜드까지 가서 마라톤을 뛰고 온 이야기는 비현실적으로 들렸다. 아, 어떤 것에 심취하면 이렇게까지 하는구나. 어느새, 달리기를 해야 할 이유는 안 할 이유를 압도했다. 이 정도면 달리기를 안하는게 이상했다.
9월의 밤, 집에서 입던 반바지에 반팔 셔츠를 입고(동네아저씨가 달빛에 운동하는 그 풍경, 맞다) 오랜만에 운동화 끈을 꽉 묵었다. 이빨도 꽉 물며 파이팅을 외쳤다. 일단 달리기 어플을 깔고 오늘 목표를 설정했다. 3km. 첫날이니 무리하고 싶지 않았다. 코스는 아파트 단지 둘레길을 택했다. 야밤에 신호등을 건너며, 다른 동네까지 뛰고 올 자신이 없었다. 일단 아는 동네 뛰기. 오래 전 피트니스에서 실내 달리기를 조금 했을 뿐 이렇게 달리기를 하려 밖으로 나온 건 처음이었다. 1km가 넘으니, 숨이 찼고 2km가 넘으니 택시를 잡아 타고 집에 가고 싶었다. 벤치에 앉아 하염없이 숨을 몰아 쉬었다. 그렇게 달리기를 시작했고 그렇게 달리기에 대해 한계를 절감했다. 한 주가 지나고 다시 달리기에 도전했다. 몸을 위해 할 수 있는 게 그것 뿐이었다. 이번엔 속도를 줄이고 경보 보다는 조금 빠른 속도로 슬렁슬렁 달렸다. 두번째라 그런지, 아님 속도를 감당할 수 있어서 그런지 호흡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시선도 조금씩 바꼈다. 바닥를 보다가 상향등처럼 앞을 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3km의 벽을 뚫진 못한 채 집으로 귀환했다.
그렇게 2번을 뛰니, 달리기 어플을 통해 누적기록을 보게 됐다. 무려, 무려, 무려 5.3km. 너무 무리한 거 아닌가?하는 기쁜 염려가 스쳤다. 5km가 넘으니 뭔가 큰 일을 해 낸 것처럼 뿌듯한 건 왜일까. 심장이 뛰듯 생각이 뛰기 시작했다. 한달동안 누적으로 '42km'를 뛸 수 있지 않을까 ? '월간마라톤'이 떠오른 순간이었다.
그렇게 주말 밤을 뛰었다. 9월 마지막이 되니 19.64km가 찍혔다. 오오오. 내가 무려 20k 를 뛰다니. 가뿐 숨을 내쉬며 한 켠 놀라운 기운을 삼켰다. 뭔가 되는 분위기였다. 뭔가 의지가 불끈했다. 자. 그럼 10월부터 42k 마라톤 거릴 뛰어볼까? 매주 주말동안 10k를 뛰면 한 달이면 40k 를 무난히 돌파하지 않을까 하는 단순한 계산이 섰다. 그렇게 내 인생에 '마라톤'이 들어왔다. 2020년 10월, 나는 매주 달렸고 매달 마라톤 거리를 뛰게 되었다. 그렇게 시작한 것이 매달 누적거리로 마라톤 42.195km를 뛰는 ‘월간마라톤’이 되었다.
이제는 80명이 넘는 분들과 월간 마라톤을 뛴다. 물론 각자 뛰는데 함께 뛰는 기분으로 뛴다. 후달릴 것만 같았던 내 삶이 뭔가 보험 하나 든 것처럼 조금 든든해졌다. 달리기 덕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