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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흔적은 누군가에게 용기를 준다

원티드 인살롱 기고 9 (20210406)

판교 끔싸라기 땅을 분양합니다

회사 게시판에 '크루의 서재 프로젝트'를 소개하며 '책꽂이 분양' 안내를 했다.

"절호의 부동산 챤스. 판교 금싸라기 땅에 내 공간 한 번 가져보자"


부동산에 대한 욕망이었던가? 아니면 이 작은 공간에 자신의 이야기(책)를 채우고 싶은 욕망이었던가? 기대 이상으로 많은 크루들이 응답했다. 그렇게 신청한 분들이 모였다. 다행히 전자보다는 후자의 느낌이 강했다. 눈빛이 평화로웠다. 먼저 간단히 자기소개를 나눴다. 이 기쁜 날 일용할 양식도 나눴다. 도시락을 함께 먹으니(그렇다. 점심시간을 이용했다) 낯선 분위긴 금세 도란도란 해졌다. 식후 커피 한잔을 뽑아 들고(다행히 바로 옆이 카페였다) 운명의 제비뽑기(아파트 동호수 뽑듯)를 했다. 이왕이면 잘 보이는 곳을 원했기 때문에, 자리를 지정하기보다 각자의 '운'에 맡겼다. 모임에 앞서 책꽂이에 넘버링을 했고, 뽑기를 통해 크루와 공간을 매칭 했다. 아파트 당첨 현장과 달리 절규와 탄성이 오가진 않았다. 역시나 평화로웠다. 책이 스민 곳들은 비슷한 풍경이 흐른다고 누가 그랬다.  


책꽂이 매칭을 위한 제비뽑기 중이다. 왼쪽에 있는 분이 이걸 가능하게 만든 댄싱


자리 배치가 끝나고, 크루의서재 운영 룰을 공유했다. 


1) 분양받은 곳을 소중히 다뤄주세요.

2) 1달에 1권(이상)씩, 4달 동안 서재를 맡아 주세요.

3) 책은 본인에게 영향을 미친(혹은 본인이 읽고 재미있었던) 책을 소개해 주세요.

4) 포스트잇을 통해 책 추천 이유를 써 주세요.


어떤가? 아주 심플하지 않은가? 복잡해선 될 일도 안된다는 걸 우린 익히 알고 있다. 특히나 즐거운 일은 더더욱 심플하게 접근해야 한다. 그래야 하는 사람이나 보는 사람이나 모두 즐길 수 있다.


다음날, 참여한 크루들은 각자의 공간을 자신의 책으로 채웠다. 재미있었던 건, 다들 책을 소개하며 그 책에 맞는 어떤 풍경을 연출했다. 이 부분은 예상하지 못했고, 뜻밖이었다. 개성이 폴풀 묻어나며, 이 프로젝트의 재미를 더 짙게 만들었다. 그렇게 작은 공간마다, 작은 전시가 벌어지니 바쁜 걸음으로 자리로 향하던 크루들은 속도를 늦추고(마치 스타벅스 드라이브 드루에 입장하듯) 책장 주변을 맴돌았다. 서재를 배경으로 셀카를 찍는 분들도 많았다. 으앗! 이것은 성공의 스멜이 아니던가. 


있는 듯 없는, 없는 듯 있었던 서재가 누군가에게 자랑하고 싶은 공간으로(그 순간에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바뀐 것이다. 버리지 못해 쌓아 둔 듯한 책이 모양 빠지게 있었던 서재가 아닌, 동료가 큐레이션 했고 큐레이션 이유(추천 이유)가 책 제목만큼 선명하게 보이고 주변이 뭔가 느낌 있게 채워지니 비로소 '책'이 이야기를 건네는 귀한 서재처럼 바뀐 것이다. 홍대 땡스북스, 최인아 책방 등 독립서점들은 한약 달이듯 정성들여 책을 큐레이션한다고 들었는데, 이런 느낌일까? 싶었다.


우리는 각 칸에 '게스트 카드'를 올려두었고, 혹여나 빌려 가다면 그곳에 꼬옥 체크를 할 수 있도록 부탁을 했다. 더 이상 만나기 어려운 도서카드를 슬쩍 놓아둔 것이다.  



나 역시 공간 하나를 분양받았다. 오쿠다 히데오의 '야구장 습격사건'을 소개했다. 야구의 재미를 바꿔 준 책이다. 난 오랜시간 한화팬과 비슷한 심정의 LG팬이다. 결과에 일희일비 하다가는 일상이 매일 전쟁이 되는 걸 경험했다(그렇다. LG 야구엔 일비가 더 많았다). 그러다 야구의 진면목은 경기의 과정(우리도 1점을 낸다)이고, 경기장의 공기(응원과 투지가 넘치는)이고, 경기장 주변의 냄새(오징어와 치킨의 향이 특히 강하다)이고, 경기장에서 먹는 음식(여기엔 맥주도 포함된다)들이란 걸 알게 해 준 책이다. 첨엔 책과 함께 짧은 메모 한 장 붙여 놨는데, 다른 분들의 공간을 보니 이거 이거 뭔가 허전한 게 아닌가. 책에 맞는 소품을 준비해 데코레이션을 했다.  


처음엔 책만 덩그라니. 다른 분들의 책꽂이를 보고 자극받아~ 좀 더 진화(?)한 나의 공간을 만들었다.


첫째가 태어나기 전, daum 야구동호회(줄임말 시대인데 야구동호회는 줄임말을 쓰면 안된다)에서 열심히 활동했다. 그때 썼던 빨간 글러브와 야구공으로 '야구장 습격사건'이 도드라지게 도왔다. 


이렇게 오픈한 크루의 서재는 약속대로 4개월 정도 진행이 되었고, 시즌2는 진행을 하지 못했다. 이유는 대대적인 리모델링 공사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생각은 했지만 못했던 것들이 있다. 점심시간을 이용해 크루의 서재에 책을 소개한 분들이 직접 그 책에 대한 이야길 하고 대화를 나누는 프로그램을 하고 싶었다. 큐레이션 된 책의 저자를 모셔, 직접 이야기를 듣는 시간도 마련하고 싶었다. 서재 한 켠에는 카카오 크루만이 아니라, 네이버 그린팩토리에 있는 '지식인의 서재'처럼 작가들의 서재도 마련하고 싶었다(좋은 건 어쩔 수 없이 끌린다). 또 판교에 있는 다른 회사에 다니는 분들의 책들도 큐레이션 하면 재미있는 교류가 진행될 거란 므흣한 상상도 했었다. 이뿐 아니다. 서점에서 했던 숱한 이벤트, 도서 축제에서 진행한 무수한 행사들을 떠올리며 이 작은 공간만의 진짜 축제를 상상했다. 결국 이를 수 없었던 꿈이지만, 언젠가 그런 날(회사이 서재에서 진행되는 책 축제)이 올 거라 믿는다.

이렇게 바꼈다.

비록 한 시즌만 진행하고 마친 프로젝트지만, 여러 의미를 만들었다. 뻔하고 밍밍한 회사 서재를 이렇게(셀카를 찍을 정도) 바꿀 수 있다는 걸. 더해 회사의 공간을 직원에게 공유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 수 있는지를(공간을 좀 더 크리에이티브하게! 만드는 방법을 직원에게 맡겨보라). 무엇보다 크루의서재 프로젝트는 방식을 바꿔 여전히 진행중에 있다(얼마전 카카오에 갔는데, 엘리베이터에 크루의서재 프로젝트 포스터가 붙어있는게 아닌가!). 앞선 흔적들이 새로운 것을 만든다는 것(스티브잡스는 점을 이어 선을 만든다고 했다)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 흔적이 자욱하도록. 그것이 누군가의 시도에 용기를 주도록. 쫄지말고 화이팅.


ㅡㅡ

원티드 인살롱에 기고한 글(20210406)입니다. 


록담(백영선) Flying Whale 대표 rockdamf@gmail.com

축제와 공연기획사에서 열일하다, 한화호텔앤리조트(63빌딩 문화사업부)를 거쳐 Daum(문화마케팅)에 입사했다. 곧이어 카카오 행성을 돌다(조직문화, 교육, 스토리펀딩, 브런치, 소셜임팩트 등) 궤도를 이탈합니다(퇴사했단 얘기죠^^). 지금은 매일 ‘다른’ 곳에 출근하는 ‘독립노동자’이자 '프리워커'입니다(딴짓 덕분이죠!). 여러 일을 하지만 ‘기울기’가 있습니다. 느슨한 연결을 통해, 모두 안전하고 즐겁게 잘 사는 걸 의도합니다. 백영선이라 쓰고, 록담이라 부릅니다. 어색어색하지만 플라잉웨일 대표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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