롱블랙 4월 23일, 문장채집 no.98
롱블랙 4월 23일, 문장채집 no.98
재영 책수선 : 파손의 흔적은 책의 쓸모를 보여준다, 사람도 그렇다
원문 https://www.longblack.co/note/271
1. 책 수선가에게 가장 필요한 자질은 '종이에 대한 이해'입니다. 원재료에 따라 종이의 질감과 내구성이 달라요. 각 종이에 맞는 수선 방법도 천차만별
2. 20대 후반의 재영씨. 미국 유학길에서 만난 전공에 눈이 번쩍. 위스콘신 미술대학원에서 북아트와 제지를 배웠어요. 교수님이 책 수선가로 일해보지 않겠냐고 했어요. 재영씨는 대학 도서관의 책 보존 연구실에 취직. 그곳에서 3년 6개월을 일했어요. 그곳에서 망가진 종이를 다루는 일을 배웠어요. 칼질과 풀질부터 배워야했어요.
3. "꾸준한 훈련과 실무를 반복할 기회가 인생에서 얼마나 될까요. 흔치 않은 기회라 생각해 꽉 붙잡았습니다. 그때 깨달았어요. 책이 지닌 각각의 모습, 살아온 세월, 쓰임에 따라 다른 수선법이 필요하단 걸요. 사람이 그렇듯 말이죠."
4. 3년 6개월동안 1800권이 넘는 책을 수선했어요. 기술이 늘수록 노하우가 쌓였습니다. 2017년 한국에 돌아와 2018년부터 책 수선 사업을 시작했어요. 한국에도 과연 책을 고치고 싶어하는 분들이 있을까? 불안했는데. 기우였어요. 저마다 사연(어린 시절 동화책, 3대째 내려온 성경책, 돌아가신 어머님이 읽던 책 등)을 간직한 책들이 재영씨에게 왔습니다.
5. 세 가지 최선을 모두 생각. 책 수선가로서 고칠 수 있는 최선, 의뢰인이 기대하는 최선, 예산과 견적이 조화롭게 어울린 최선. 이런데 이게 저를 힘들게 하더라구요. 완벽에 가까운 최선을 만들기 어렵다면, 조금 비켜 가더라도 특별한 관점을 넣는 게 낫지 않나 싶었어요. 그래서 재영씨는 수선 의뢰가 들어올 때 새로운 제안을 하기 시작. 의뢰인의 사연을 꼼꼼하게 메모. 수선 방향을 새로 써 내려갔죠.
6. "책 수선의 범위를 폭넓게 생각해보기로. 기술적인 접근을 넘어, 책과 책 주인의 관계를 적극적으로 이해하는 데에 시간을 썼죠. 더 나은 방향이 있으면 그쪽으로 제안을 하기로 했습니다." 가령 이런 식. 사라진 표지를 의뢰인이 좋아하는 색으로 만들거나. 원본에 없던 색색의 가름끈을 넣어 책을 아름답게 만들거나.
7. "책이 가진 시간의 기억들 속에서 아름다움을 위한 최선의 실마리를 찾는 재미, 그리고 그 선택들로 인해 점점 더 선명해지는, 결국엔 분명 아름다운 책이 될 거라는 확신이 주는 쾌감, 그리고 그걸 온전히 믿어주는 의뢰인의 신뢰까지. 이 세가지가 잘 맞아떨어지면 책 수선가는 짜릿함을 경험하게 된다."
8. 책 수선에 가장 중요한 건 '점검'. 수십 수백 페이지를 한 장 한 장 펴가며 이물질은 없는지 살피죠. 의뢰인이 '페이지 한 장이 찢어졌어요'라고 해도, 자세히 살펴보면 찢어짐이 일어난 더 큰 원인을 발견하고 수선 방향을 새롭게 제안하기도 합니다. "목표를 제대로 정해야 합니다. 제안할 방향이 명확해야 의뢰인이 만족할 결과물을 내놓을 수 있습니다."
9. 외뢰 받은 책을 찬찬히 살펴본 뒤, 꼭 맞는 수선과 보관법을 제안하는 것. 의뢰인이 재영책수선에 신뢰를 가지는 이유.
10. "책 수선은 제게 고된 노동이기도 해요. 그만큼 작은 숨구멍을 조금씩 여는 일이 필요해요. 제게 흔적 수집은 소소한 스트레스 해소법이기도 해요. 책과 친해지는 방법이기도 하고요. 무엇보다 수선하며 생기는 긴장감을 내려놓을 수 있죠."
11. "의뢰인이 가진 스토리는 폭발적인 힘을 갖고 있어요. 저도 듣다보면 공감도 되고, 함께 눈물도 흘리죠. 하지만 거기에 잠식되면 일을 할 수 없어요. 자칫 실수로 이어질 수도 있죠. 저는 이 일을 오래 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일' 이상으로 몰입하지 않으려 해요."
12. 파손은 책에게 주어진 훈장입니다. 책을 잘 보관하는 일도 소중하지만, 자주 찾는 일도 소중해요.
재영책수선 인스타 https://www.instagram.com/pencilpenbooks_j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