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일기는 아무 잘못이 없다. 일기의 죄라면 그저 대한민국 초등교육에 일기 쓰기가 포함되었다는 이유 그거 하나뿐이다.
일기는 사실 글쓰기의 감을 잡아주는 아주 좋은 도구이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우리에게는 일기에 대한 아픈 기억이 너무 많다. 몰래 쓴 일기를 언니나 오빠가 훔쳐보는 바람에 내내 놀림감이 되기도 했고, 아무 생각 없이 쓴 일기 몇 줄이 화근이 되어 학부모 상담의 빌미가 되기도 했다.
이런 이유들로 현재 초등교육에서 일기 쓰기는 더 이상 의무사항이 아니다. 대신 다양한 장르와 형식의 글쓰기 수업으로 글쓰기 훈련을 대체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토록 싫어하는 '일기 같은 글'은 어떤 글일까?
냉정하게 말할 테니 너무 서운해하지 말고 듣길 바란다.
일기는 독자가 없는 글이다. 나만 보면 되는 글 말이다. 그래서 모호해도 상관없고, 어제 쓴 내용에 덧붙여서 서도 된다. 문맥, 맥락, 기승전결, 처음 중간 끝 다 상관없다. 그저 내가 쓰기를 통해 내 마음의 안정과 치유, 하루 일과의 정리, 또 다른 내일에 대한 설계와 계획 이 정도에 머무르면 된다. 그러니 당연히 글에 대한 핵심 주제가 없어도 된다. 나만 알아보면 된다. 다음날 읽고 지워버리고 싶을 만큼 손발이 오그라들게 써도 된다. 더불어 사전 취재나 자료조사, 발췌나 인용 등이 없어도 된다. 나만 알아보면 되면 되기 때문이다. (근데 가끔 나도 못 알아볼 때가 있다 ㅎㅎㅎㅎ)
하지만 글 (여기서는 글은 자신의 생각을 담은 에세이라고 정의해본다) 은 다르다. 글은 독자를 염두에 두고 써야 한다. 독자라 함은 내 글을 읽게 될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 독자는 최소한 내가 쓰려고 하는 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전제하에 써야 하고, 그들은 그냥 내 글에 아주 작은 호기심만 갖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여기면 좋다. (흔히 중학교 2학년 수준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요즘 중2는 아주 수준이 높으니 그 말은 잠시 접어두겠다) 어쩌면 제목에 혹해서, 어쩌면 알고리즘에 이끌려 들어온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러기에 글은 독자들이 잘 알 수 있도록 최소한의 정보와 내 생각을 잘 드러내기 위한 다양한 근거(발췌, 인용, 자료조사, 취재 등)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들을 또 잘 전달할 수 있는 구성과 편집이 필요한 것이다. 일기와는 전혀 다른 메커니즘과 고도화된 시스템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것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 이를 위해 평소 메모를 꾸준히 하게 되면 이 부분이 해소된다. 평소 내 생각을 메모해두고 그것을 글로 충분히 발현할 수 있도록 다양한 방식으로 메모를 확장해나가면 이 부분이 말끔하게 정리된다.
글은 내 생각과 경험을 다른 이들에게 전달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근거가 필요하고, 그래서 맥락이 중요하며 그래서 자기의 생각이 중요하다.
잊지 말자. 일기와 글은 다르다.
자꾸 혼동하며 나는 일기 같은 걸 그만 쓰고 싶다거나 일기 같은 글을 쓰면서 다른 사람들이 내 글을 읽어주지 않는다고 속상해하지 말아라. 오늘은 슬쩍 일기가 아닌 글을 한번 써보는 건 어떨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