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적 자아분열
나는 인스타그램 아이디가 무려 6개다. 첫 아이디 하나를 두 개로 분리하던 때는 아무 의도 없이 시작했지만 이제 의도가 다분하게 되었다. 나는 이 현상을 '주체적 자아분열'이라고 부른다.
나의 인스타그램 아이디 분리는 SNS의 고질적 문제인 피로감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너 인스타 해?" 하는 질문을 들으면 "그럼! 내 아이디 알려줄게."라고 금세 공유하는 계정 한 개를 대학생 때 개설해서 쭉 사용해왔다.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건 초라해도 웃긴 내 일상인데, 어느새 인스타에 올라오는 친구들의 피드는 1년 치 예약이 5분 내에 끝난다는 유명 식당 방문 소감, 눈치 보여 연차도 못 쓰는 나에게 다른 세상 얘기 같은 '한 달 유럽 여행'처럼 소위 말하는 현타가 오는 사진과 글로 화려하게 채워졌다. 아이디를 교환하고 서로 맞팔로우 하는 건 1분도 걸리지 않았는데, 점차 내 사진과 글을 올리려면 묘한 눈치를 보게 되어 올릴까 말까 고민하는 시간이 일주일쯤 필요해졌다. 하지만 SNS의 순기능인 자랑과 과시를 보기 싫다고 지인들을 언팔로우할 순 없어서 이미 현실의 나를 잘 아는 사람에게만 공유하는 두 번째 계정을 만들게 되었다. 그리고 어떤 모습의 일상을 비추던 부끄러움이 없는 이들에게 소소하게 공유했다. 인기가 많은 외향적인 사람도 아니고, 대외적으로 다수의 사람을 대하는 직업을 가진 것도 아니라서 사실 계정 1과 계정 2의 팔로워는 절반 이상이 중복이었지만 계정 2에 맘 놓고 게시글 몇 개를 업로드하며 나름대로 만족스러웠다.
두 번째 캐릭터를 의미하는 '부캐'가 크게 유행했던 시기가 있다. '친한 친구용', '그저 그런 대외용' 두 개로 시작했던 계정 분리는 점차 '부캐'라는 나의 제2, 그리고 3의 자아에게 주어지며 제각각의 목적을 가지게 되었다. 지금은 6개의 계정을 만들어 활동하고 있다.
친목 목적의 대외적인 공개용 계정과 부담 없는 지인용 계정 2개, NFT작가가 되고 싶어 만든 그래픽 아트 작가 계정, 운동을 배우고 자극받기 위한 계정, 그리고 짧은 글을 올리는 계정, 낙서나 그림을 올리는 계정이 6개 계정의 정체다.
계정 1은 당장 부모님이 보셔도 상관없는 사진과 글을 올리고 있으므로 당연히 직장 동료도 팔로우한다. "인스타 하세요?" 질문을 받을 때 주저 없이 알려주는 계정이라 부끄러운 내 사진을 업로드하는 일이 적고 상대적으로 일상의 특별한 이벤트와 경험을 끌어 모아 올리는 경우가 많다. 계정 2에는 조금 덜 순화된 말투와 한 번은 괜찮지만 두세 번 보면 얼굴이 일그러져 보이는 내 셀카, 사적인 모임, 여행 사진이나 글을 올리지만 친한 친구들이나 확인하기에 업로드하기에 부담이 없고 게시글도 중구난방이다.
NFT 작가로 활동하고자 하는 꿈으로 만든 계정 3은 요새 가장 공들이는 계정인데, 주간 단위로 본업과 전혀 무관한 디자인 아트웍을 올린다. 본업인 영상 디자인을 탈피해 개인적으로 디자인 공부를 이어가고자 작가로서 부캐를 만든 셈이라, 하고 싶은 작업을 마음껏 펼쳐가는 일이 신선한 활기를 준다. 피드 외에 스토리와 하이라이트를 활용해 공부, 개인작업물, 작업 과정 사진 등 구획을 나누어 업로드하려고 한다.
운동용 계정은 식단을 올리거나 소소한 운동 얘기를 하려고 만들었지만, 가르침 받고 싶은 운동 인스타그래머를 팔로우하고 정보를 얻거나 자극을 받는 용도로 사용하고 있다.
글을 올리고 그림을 그리는 계정은 브런치 작가 명인 '지안'으로 만들었다. 이 계정에 올리는 글은 메모장에 적은 스치는 생각이나 글감으로 금세 써 내려간 글이고, 그림은 결과물의 퀄리티가 별로여도 기록용으로 대부분 업로드하려는 편이다.
끝이 아니다. 6개의 인스타그램 계정 외에 열 명 미만의 친구들에게 링크를 공유하고 틈틈이 쓰는 일기 블로그까지 있다. 일기 대신 외마디 단어만 달랑 올리는 날도 있고 나만 아는 하소연을 과감 없이 늘어놓기도 한다. 이곳에 쓴 일기를 다듬어 브런치에 발행하며 글감이 부족할 때 끌어다 쓴다.
SNS 사용자들이 피로감을 느끼는 이유 중 하나인 지나친 자랑과 과시, 비교와 자기 비하가 나의 아이디를 물과 기름처럼 두 개로 분리시켰지만, 이제 다른 이유로 부지런히 3번째, 4번째 자아의 피드를 채워간다.
삼십 년 정도 살다 보니 되고 싶은 모습이 하나가 아니라 열몇 개쯤 된다. 요즘 세상은 휴대폰 번호 하나로 아이디를 여러 개 생성할 수 있고 가명을 만들어 진짜 이름을 숨기기 쉽다.
언젠가 내 사업을 시작하면 나를 대표라고 불러주었으면 한다. 책을 내면 작가라고 불리고 싶고 밥벌이 분야에서 스스로 만족할 만한 성과를 내고 아티스트나 실장이라는 호칭도 듣고 싶다. 그들이 나를 다양한 호칭으로 부를 때 죄다 다른 각각의 히스토리는 내가 분리한 자아들, 분리한 인스타그램 아이디로 언제든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모두 관종이라고 한다. 영상 디자이너 A 씨, 알고 보니 NFT작가. NFT작가 B 씨, 알고 보니 작가 지안. A=B=C. 나의 비밀이 줄줄이 밝혀지는 날을 상상하는 것도 꽤나 즐겁다. 나 역시 엄연한 관종인가 보다.
더 재미있는 점은 언제든 나의 계정 3, 혹은 계정 4, 5, 6번을 삭제하고 없던 일로 해도 본캐인 나에게는 어떠한 문제도 없다는 데 있다. 누가 청탁을 해서 시작한 일도 아니고 엄청난 성과를 이루어 본래의 삶이 뒤집히는 큰 영향이 있는 것도 아니기에 가능한 일이다. 지출이나 수입이 발생하는 것도 아니라 부담 없고 즐겁다. 비밀리에 남들이 모르는 나를 키워가는 재미에 흥미를 잃었던 SNS와 부쩍 친해지고 있다.
심심한 일상을 비밀 하나쯤 품고 사는 재밌는 인생으로 셀프 연출할 수 있기에, 현대인의 주체적 자아분열을 적극 권장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