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로사 Oct 28. 2022

부러워해 주세요. 그러면 더 사랑하게 될 거예요.

‘제주여자가 서울여자에게' 보내는 일곱 번째 편지 - 제주도


언니. 가을의 제주에서 편지를 씁니다. 영락없이 가을이네요.

제주도민들 중에 꽤 많은 사람들이 제주에서 가장 좋은 계절이 언제냐는 질문에 가을이라고 대답하는 거 알아요? 제주 곳곳에 억새의 씨앗들이 반짝이며 흩날리는 계절. 바다색이 하늘과 가장 비슷해지는 제주의 가을. 제주로 이사 온 후로 나도 가을이 더 많이 좋아졌어요. 계절이 나에게 아낌없이 베풀어주는 온갖 좋은 것들을 가장 생생하게 느끼고, 가장 온전하게 누리고 있다는 기분이 들거든요. 음, 물론 나이 들면서 춥고, 더운 게 더 못 견디게 된 이유도 있지만 말이지... 그래도 매해 가을마다 '제주에 살아서 좋다'고 고백하게 되는 것만은 틀림없어요. 올 가을도 변함없고요.


그렇네요. 나는 여전히 제주에 살고 있네요. 


언니, 난 아직도 가끔 신기할 때가 있어요. 아주 간단한 결정조차도 미룰 수 있을 때까지 미뤄두는 나 같은 소심한 사람이 대체 어떻게,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제주에, 여행도 아니고 살러 가겠다고 덜컥 결정할 수 있었지. 물론 약간은, 도망 온 거 같은 기분이기도 했어요. 그때 난 돈벌이와 졸업장 따기를 같이 해야 했던 시간에 너무 지쳐있었으니까. 그런 거 있잖아요. 일단 제주도로 가고 나면 다 여유로울 것 같고, 평화로울 것 같고, 매일이 여행 온 기분일 거 같은 거. 일단 떠나고 보자. 그럼 조금 더 살만해질 거야. 뭐, 그런 거 말이에요. 


하지만 아마 모르지는 않았을 거예요. 현실적인 제주살이는 상상에서처럼 그렇게 마냥 행복하지 않을 거라는 거. 하지만 그때 그런 생각을 단호하게 모른 척할 수 있었던 단 하나의 이유는, 그냥 제주도가 좋다는 거였지요. 나는 아마, 단단히 제주에 반해있었던 것 같아요. 현실적인 문제들 쯤은 그냥 눈 질끈 감고 묻어둬도 좋겠다고 생각할 만큼. 그렇게 나조차 믿을 수 없었던 결심을 한지 어느새 10년이 지났네요.


기꺼이 나의 한 자리를 내주던 고마운 제주의 숲


제주 사람 다 됐다는 말은 자주 듣고 살지만 여전히 "언제까지 제주에 살 거냐"는 질문도 들으며 살아요. '다 되었다'는 말은 '되었다'가 될 수는 없구나. 그런 기분이 들 때도 있긴 해요. '거의 제주 사람이네'라는 말은 나는 끝끝내 제주 사람으로 온전히 받아들여질 수는 없다는 말일 수도 있겠구나. 그런데 그런 질문에 마냥 서운해 할 수는 없어요. 나는 보통 그 대답에 '뭐, 상황 봐서 돌아갈 수도 있고. 계속 살 수도 있고'라고 대답하곤 하거든요. 언니, 좀 이상하지 않아요? 나의 거주지는 제주도고, 내 집은 제주도에 있는데. 나는 이제 내가 살던 그곳이 이미 제주보다 더 낯설어지고 말았는데. 이제 내 평생에서 가장 오래 산 지역이 제주시인데. 그런데도 여전히 나는 '돌아간다'라고 말을 하고 있더라고요. 원래 있어야 할 곳은 이곳이 아닌 육지인 것처럼. 나는 아마 어쩌면 제주도에서는 끝끝내 이방인으로 살 수밖에는 없을지도 모르겠어요. 


그래도 언니. 나는 그것도 괜찮은 것 같아요. 언니가 지난 편지에서 언니가 '제주는 닿을 수 있는 오아시스'라는 말을 했잖아요. 나에게도 현실인 와중에 종종 오아시스가 되길 바란다고. 언니, 나는 여전히 제주가 참 좋아요. 살다 보니 제주도는 마냥 아름다운 곳만은 아니라는 걸 알았지만, 지저분하고 불편한 제주의 현실들을 더 자주 맞닥뜨리게 되지만, 삶의 터전으로서 그렇게 좋은 곳만은 아니라는 걸 꽤나 많이 깨닫게 하지만, 육지에서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나가는 휴일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제주도는 내 삶이 꼭 나쁘지만은 않다고 느끼게 해주는 순간들을 많이 선물해줘요. 아무렇지도 않게 불쑥 나타나 주는 흔한 바다도 좋고, "오늘 날이 맑아서 좋고, 흐려서 멋있고, 비가 와서 운치 있다"라고 생각하게 해주는 한라산이 어디에서나 보이는 것도 좋아요. 제주도에 와서 나는 어떤 계절에 무슨 꽃이 피는지 관심을 두게 되었고, 제철 음식이 어떤 것들인지, 어떤 열매가 어느 때에 더 알차게 맺히는 지도 조금 더 알았어요. 경쟁에서 많이 도태되었다고 느끼기도 하고, 몹시 불안할 때도 있지만 경쟁과는 상관없는 세상의 사소한 즐거움들을 알아가는 나의 삶도 나쁘지 않다고 종종 느끼게 될 때면, 지금도 납득가지 않는 10년 전 나의 결심이 고맙다는 생각도 해요. 내가 이곳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자랐다면 그런 만족과 감사는 아마 느끼지 못했겠지. 그래서 좋아요. 

'거의 제주 사람'으로만 사는 것도 나는 괜찮은 것 같아요. 



제주에 처음 이사 올 때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어요. '내가 이 세상 떠나기 전에 누가 나에게 행복해지기 위해서 무엇을 했냐고 물어보면 대답할 것이 필요해서 제주로 간다'고. 그때는 사실, 도망가는 것처럼 보여서는 안 되니까 좀 멋있어 보이는 이유 하나 갖다 대려고 했던 말인 것도 같은데 말이죠. 그런데 나는 정말로 죽기 전에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나는 나에게 행복을 주기 위해 제주에 왔고, 그래서 많은 순간들에 행복했다고. 


제주에 온 후로 블로그나 SNS를 하면서 제주의 생활을 올리면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곤 했어요. 언니가 지난 편지에서 제주에 살아서 부럽다고 한 것처럼! 나는 결혼도 안 했고, 아이도 없고, 돈도 많이 못 벌고(하물며 지금 백수야! ㅠㅠ) 어쩌면 다소 초라해 보일 수 있는 삶이지만, 제주에 사는 것만으로 누군가에게 부러워하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도 큰 장점이네요. 그러니 언니, 더 부러워해 주세요. 그러면 그만큼 나는 제주에서 더 행복하고, 제주를 더 사랑하게 될 거예요.

오래오래 행복하게, 부디


아, 물론 언니가 언니와 형부의 바람처럼 단 몇 년이라도 제주에 살러 온다면 더더더 제주가 좋아질 거는 당연한 이야기고요. 언니는 버라이어티 한 재미가 있는 서울이 좋다고 했었지만 분명히 예상컨대, 언니는 분명히 제주에서도 재미있고, 행복할 거예요. 그때는 우리 편지의 제목이 '서울여자 제주여자'가 아니라 '제주여자 제주여자'가 되겠네요. 정말로 그날이 오기를 기다리며, 이만 안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