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여자가 서울여자에게 보내는 여섯 번째 편지 - 명절
"명절이 신나냐"고요?
네, 언니. 신나요. 명절이라는 말을 듣기만 해도 기분 좋고 설렜던 사람. 음, 저 맞는 것 같아요. 명절 전날 밤, 평일 아침 일정한 시간마다 울려대는 그 지긋지긋한 알람을 끄는 그 순간의 짜릿함이란! 명절을 불편하게 만드는 자잘하고 사소한 모든 이유들은 다 잊을 수 있을 만큼, 나는 명절은 ‘연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명절이 늘 좋았어요.
지방에 살았던 어렸을 적엔 우리 집은 큰집이 아닌데도 할아버지 산소가 가깝다는 이유만으로 명절이면 우리 집에 모이곤 했었어요. 집에서는 하루 종일 기름 냄새가 났었고, 추석 때면 둘러앉아 송편을 빚었던 기억도 나요. 송편을 예쁘게 빚어야 예쁜 딸을 낳는다는 말은 어찌나 승부욕을 자극했던지. (이렇게 마흔이 넘을 때까지 딸을 낳을 전제 조건조차 성립이 안되어있을 줄은 그땐 몰랐지 -_-) 암튼 명절이면 엄마는 산처럼 많은 음식을 했고, 집에는 친척들로 북적였던 기억. 나는 그때 너무 어렸었던 걸까요, 아님 그저 철이 없었던 걸까요. 너무 먼 친정에는 갈 엄두도 내지 못하고, 사흘 내내 전을 부치던 엄마의 명절이 나의 그것과는 달리 힘들고, 버거운 것일 수도 있다는 걸, 그때의 난 전혀 생각하지 못했어요. 그저 연휴 내내 학교도 안 가도 되고, 사촌들과 시시덕거리고 뛰어노는 게 좋아서 늘 명절이 반가웠었죠.
작년에 거의 30년 만에 그 어릴 적의 동네를 다시 찾아갔었더랬죠. 음. 그래, 무려 30년 전쯤 이야기니까 그때 우리 엄마, 지금의 나보다 어렸네요. 스무 명 가까운 친척들을 맞아 사흘 내내 먹이고, 재우던 안주인이 고작 서른몇 살밖엔 안됐었다니! 하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건 그랬던 우리 엄마는 이제 곧 칠순을 맞이할 할머니가 된 지금까지도 여전히 제주에서 와서 손님처럼 놀고먹는 딸의 명절을 배 불리기 위해 갈비를 찌고, 잡채를 볶는다는 거죠. 나 진짜 양심 있냐. 후아.
하지만 그렇게 명절 내내 우리 엄마가 해준 밥을 먹으며 빈둥거릴 수 있는 양심 없는 노처녀라서, 시집간 것도 아닌 주제에 멀리도 이사 가서 잔뜩 애틋하고, 애잔한 개딸의 신분이라서 나에게 여전히 명절이 신나고, 좋은 거겠죠. 나에게는 전을 부치라 부담을 줄 사람도, 반드시 가야만 할 시댁도, 열몇 시간을 걸려 찾아가야 할 고향도 없으니까. 명절 당일에도 누구든 찾으면 거리낌 없이 놀러 나갈 수 있고, 제주 집에서는 절대 먹을 일 없는 엄마밥도 마음껏 먹을 수 있고, 명절마다 만나서 이제는 가족 같은 언니와 친구들이 있으니까.
제주에 이사 온 후 딱 한 번, 명절에 육지 집에 가지 않은 적이 있었어요. 2년 전 추석, 코로나가 한참 기승이었을 때. 그땐 워낙 세상이 뒤숭숭하기도 했지만, 사실 한 번쯤은 명절을 여기에서 보내보고 싶기도 했어요. 여기는 명절마다 많은 사람이 일부러 비싼 항공료를 감수하고 찾아오는 곳이니까. 연휴 기간을 제주에서 보내면, 나도 제주를 여행하는 기분이 들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 절대 아니었어요. 사실 이제는 주말에 하루 종일 집에만 있는 날도 많아졌고, 집에서 냉이, 봄동이하고만 보내도 딱히 쓸쓸하지 않다고 생각하곤 하는데. 더군다나 그때 명절 기분 내겠다고 친구랑 같이 송편도 빚고, 전도 부치고 했는데도! 그런데도 그 닷새의 시간이 참, 많이도 외롭더라고요. '제주도가 섬이구나, 나 굉장히 고립된 곳에 살고 있구나.' 그걸 무수히 깨닫게 했던 명절이었어요.
언니, 제아무리 가족도, 친구도, 아는 사람도 하나 없는데도 덜컥 와서 살만큼 제주도가 좋았어도, 내가 생각보다도 더 독립적인 성향의 사람이었다는 걸 제주도에 온 후로 깨닫게 되었데도, 나는 이제 명절만은 제주에서 보내고 싶지 않아요. 가족과 함께 그리고 멀리서 왔다고 기꺼이 바쁜 시간을 쪼개 내게 나누어주는 친구들과 함께 보내고 싶은 날. 명절은 나에게 이제 그런 날이에요. 그래서 (아마 내 상황이 크게 변하지 않은 한) 앞으로도 나는 여전히 명절이 신날 것 같아요.
이번 추석 때, 우리 동네의 해 질 녘 하늘은 몹시도 붉고, 아름다웠어요. 바다와 한라산이 있는 제주에서 빌딩숲이 가득한 곳으로 떠나오는 명절. 뭔가 거꾸로인 것 같아 명절 기분은 제대로 안나지만 어쩐지 고운 하늘을 보고 있자니 '고향 하늘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혼자 조금 웃었네요. 무섭게 높은 아파트들 사이로 붉은 노을이 지는 곳, 고층 빌딩의 유리창으로 그 노을이 비치는 곳, 이곳의 작은 낭만을 찾아서 반가웠어요. 아마, 명절을 기다릴 때마다 이런 뜻밖의 낭만들도 같이 떠올릴 수 있겠죠?
암튼 이번 추석 연휴에도 날 두 번이나 만나줘서 고마워요! 사실 이 삭막한 도시가 더 내 고향처럼 푸근할 수 있는 이유는, 언제 오는지 물어봐주고, 시간을 내어주고, 반갑게 맞이해주고, 떠날 땐 아쉬워해주는 사람들이 있어서니까. 앞으로도 잘 부탁합니다 :) 그럼 또 다음 명절에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