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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사 Oct 29. 2022

무슨 일이 있어도 가족과 만나는 날

'서울여자가 제주여자'에게 보내는 여섯 번째 편지 - 명절

로사야. 넌 명절이 신나니?

난 '명절'이란 말을 듣기만 해도 기분 좋고 설레는 사람이 있는지 궁금해. 나에게 명절은 귀성길에 오르지 못해 묘하게 좀 외롭고, 십수 년간 혼자 차례상을 차려야 했던 엄마의 제사 스트레스에 눈치 보던 날로 기억된다. 좋은 점도 있었어 결혼 전 직장인일 땐 말이야. 회사 안 간다는 건 좋았지. 그리고 오랜만에 동네 친구들이 다 모일 수 있다는 것. 두런두런 동네 맥줏집 테이블이 둘러앉아서 출근 걱정 없이 놀 수 있다는 점은 명절이라 좋았던 기억이 확실하네.


사람들이 막히는 귀성길 지루하다 하고, 열차표 구하기 힘들다는 지방 친구들을 보고 있노라면 난 역으로 부러웠어. 나도 명절에 고향이라 부르는 곳으로 떠나고 싶었거든. 제주로 이주한 넌 고향이 생긴 건가? 텅 빈 서울과 수도권에 남아있는 게 난 쓸쓸하더라고. 한 번은 추석에 강남대로를 달릴 일이 있었는데 정말 도로 위를 걸어 다녀도 될 만큼 몇 차선 도로가 텅텅 빈 거야. 그 풍경이 차 안 막혀서 좋은 게 아니라 기이하게 느껴지면서 휑-한 기분이었다. 나처럼 고향 갈 일 없었던 남편과 "우리처럼 고향 갈 일 없는 사람들을 모아서 귀성길 체험을 떠나볼래?"라는 이야기를 나누며 나 말고도 이런 외로움 느끼는 사람이 있구나! 신기해했었어. (둘이 저런 말을 하고 있고. 그래서 결혼했나 보다 ㅋㅋㅋ)


결혼을 했지만 시댁, 친정 모두 집에서 차로 20분 거리에 있기에 난 더더욱 명절에 특별히 갈 곳 없는 며느리가 되었다. 평소에도 양가를 자주 왔다 갔다 하기에 명절도 여느 주말과 다를 것 없는 며느리. 그래서 난 오는 사람들을 기다린다. 명절이 되면 제주에서 올라오는 너, 네가 바로 오는 사람이야. 네가 올라오면 가까워도 바쁘단 핑계로 잘 보지 못하는 '우리'(친구들)가 모이니깐 더더욱 널 기다리는 것 같아. 쓰다 보니 예나 지금이나 동네에서 친구들과 모일 수 있단 게 명절의 최고 장점이네. 역시 명절엔 사람을 만나야 해!


살다 보니 점점 명절은 명절다운 게 좋단 생각이 들어.

막히는 귀성길에 합류해 고향으로 내려가고, 북적이는 휴게소에서 알감자 한 통에 핫바 하나씩을 물고 말이야. 차례 음식도 가게에서 사는 시대인데 난 이젠 오히려 지글지글 냄새 풍기며 조금이라도 전을 부치는 게 좋더라. 송편도 팍팍 찌고 말이야. 월급이 통장을 스치고 사라지는 달이라도 예쁜 봉투 준비해서 어머님, 아버님께 용돈도 두둑이 찔러드리는 날. 좁은 집이라도 가까운 친척들 모여 앉아 시끌시끌 수다 떨다 화투 판도 벌이고, 그러다 돈 따면 아이들 용돈도 주는 그런 풍경들 말이야. (쓰다 보니 어린 시절 친적들이 꽉 차게 모여 앉아있던 명절의 작은 방이 너무나도 그립구나. 훌쩍.) 20대 명절에는 연휴 껴서 길게 해외여행 가고 싶고, 30대 때는 며느리를 노동의 구렁텅이로 빠뜨리는 게 명절 같았는데. 이젠 클래식한 명절의 풍경을 그저 행복이라 생각할 수 있게 되었어.


올 추석엔 시댁에 가니 어머님이 전을 부치고 계셨어. 남편은 "엄마. 이제 이런 거 하지 마"라고 말했지만 다 큰 우리는 중고등학생 때처럼 그 앞에 서서 따끈따끈 막 부쳐낸 전을 받아먹었다. "전은 따끈할 때 먹어야 해"하는 어머님 말씀대로 어찌나 맛나던지. 집에 돌아올 때는 내 손에도 잡채 한 통과 나물이 들려있었고 큰맘 먹고 산 왕방울만 한 샤인머스캣 한 박스도 차에 실렸지. 3살짜리 지온이에겐 여간 불편해 보여도 색동 한복 이럴 때 아님 언제 입혀보나 싶었다. 한상 가득 먹을 것을 차려 먹고 식혜를 호로록하고, 다시 친정으로 이동해 또 한상 가득 차려진 밥 상에 앉는 일이 명절 같아. 금주를 선언하신 아빠가 사위 핑계로 막걸리 한 병을 꺼내오는 모습이 보기 좋던 날. 꽉 찬 보름달처럼 몸과 맘이 배부르고 두둑한 날. 처음 시집갔을 때는 설거지하다 친정 생각이 나서 눈물을 훔쳤는데 나도 참 많이 컸고 자연스러워진 명절이었다.



빠질 수 없는 전과 나물


나 죽어도 명절엔 꼭 이렇게 미사 봉헌해줘. 미리 부탁할게.


올해 추석엔 어머님, 아버님과 다 같이 성당에서 미사를 드렸는데 어머님이 저렇게 말씀하시더라. 마음이 좀 찡했어. 기억해달라는 말로 들렸거든. 부모님이 떠나신 명절은 상상만 해도 먹먹해져. 명절엔 부모님도 매일 만나는 손녀딸을 더 예쁘게 보시고, 더 잘 먹이고 싶어 하시고, 더 애틋해하시는 게 느껴졌어. 그리고 지온이를 데리고 양가에 갈 수 있음에 진짜 감사하게 되더라. 아이가 없던 명절은 뭔가 다 큰 어른들끼리 조금 쓸쓸했거든. 아이 하나가 집에 들어왔을 뿐인데 다들 그 아이 발끝 따라다닌다고 시선이 바빠졌어. 어찌 보면 명절은 이날만큼은 무슨 일이 있어도 가족과 만나라고 만들어준 날 같아. 부모님과 함께 보낼 수 있는 명절이 얼마나 남았을까 생각해보게 된다. 지금도 자주 만나지만 명절엔 좀 더 애틋하게 꼭 만나야지 결심도 해봐. 먼길 오는 가족을 기다리듯 맛난 음식 하고, 두런두런 더 오래 모여 앉고, 못다 한 이야기도 한 두 마디 툭 툭 건넬 수 있는 명절이 우리 곁에 좀 더 오래 남아있길 바래본다. 너도 가족들 보고 싶어서 제주에서 육지로 올라오는 거지? 올 추석에도 널 볼 수 있어 좋았어. 그것도 두 번이나. 우리도 명절엔 꼭 챙겨보자. 가족처럼 말이야. 명절엔 꼭 만나야지 암요! 명절은 사람 만나는 그 맛에 있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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