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지독한 가을

by Rosa Kim

지독한 가을이다. 평온하기 그지 없는 주변 상황과는 다르게 참 지독하다. 정갈한 건 단지 옷매무새뿐이다. 귀찮음을, 불쾌함을, 억울함을 느낄 여력도 없다.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다. 평소처럼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일을 하고, 병원을 가고.

이 지독한 가을은 경력도 보지 않나 보다. 그동안 살아온 흔적들을 보면 이토록 지독스럽게 괴롭히지 않을 법도 한데. 화려하기 그지 없는 그의 겉모습과는 다르게 속은 참으로 잔혹하기 그지 없다.

하필 가을이다. 봄보다 더 산뜻한 날씨가 만연하기 그지 없는 계절. 나의 최대 명절인 크리스마스가 다가오고, 좋아하는 코트를 마음껏 입을 수 있고, 차가운 길가에서 화려한 조명을 바라보면 멍 때리기 좋은 겨울이 곧 찾아오는 계절. 날이 차가워지면 차가워질수록 커피가 더 맛있어지고, 반짝이는 햇살이 유독 눈이 부시는 그런 계절. 어딜 가나 나무들은 겨울을 맞이하기 전에 자신의 빛을 내듯 색동옷을 입고 있고, 하나둘씩 보이는 크리스마스 트리들이 설레게 만드는, 벌써 한 해가 다 갔구나라며 왠지 모를 아쉬움이 생기는 그런 계절. 이야깃거리가 가득한 이런 계절이 하필 가을이다. 하필 가을에 나는 매번 요지경이다.

이번 가을은 조용하다 싶었다. 그냥 지나가길 바랬다. 하지만 소리 없이 찾아온 그늘에 나는 속절없이 빛을 빼앗겼고 그렇게 또 터무니없는 지구력으로 버텨보려다가 넘어진다. 올해는 무언가 다를까 싶어서 어디서 나오는지도 모를 자신감을 나름 가지로 있었는데 오만이었고, 잘못된 판단이었다. 작년과는 다른 오늘일 줄 알았는데, 그래서 잠시나마 기뻤는데 별로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여전하다. 나는 여전히 연약하다. 세차지도 않은 바람에 거세게 흔들리고, 억울하다라는 생각조차 들지고 않고, 흥미라고는 일절 느끼지 못하는 일상들의 반복, 귀찮음과 단출함으로 얼룩진 일상, 썩 아쉬운 것들도 없이 루틴대로 살아가는 나날들. 화려한 색이 만연한 가을에 하필 나는 이렇다.

하필 가을에. 하필 나는. 요지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