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독 정신이 없던 여름이 제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미련 없이 자리를 떠나 이제는 때에 맞게 다시 찾아온 가을이 신고식을 치르고 있다. 푸르던 은행 잎들이 조금씩 색을 바라고 있다.
쿨하게 가버린 줄 알았는데 그래도 미련이 남았는지 가끔 그의 흔적을 느끼곤 하지만 무더웠던 때를 우리는 금세 잊고 가을의 황홀한 색채에 눈과 마음을 빼앗기게 될 것이다.
개인적으로도 참 정신이 없던 여름이었다. 아니 지난 일 년이 유독 내게는 안정과는 거리가 멀었다. 온전치 못한 몸과 정신으로 온전한 척을 해야 했고 늘 내 일정의 마무리는 병원이었다. 어느 때는 병원을 가는 것조차도 너무 버거워 바로 잠을 청한 경우도 많았다. 그러면 밀린 과제들에 대한 부담감에 고스란히 짓눌리듯 더욱 힘에 겨운 몸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그래서 나는 또 병원을 찾는다. 아직을 운동을 시작하기엔 내 몸의 역치가 너무 낮아 치료를 받는 중에도 항상 내 몸에서 나타나는 반응에 촉각을 세우며 지켜보고 있다. 감사하게도 전과는 다르게 같은 자극에도 힘들어하는 정도가 달라져서 강도가 있는 치료가 들어갈 수 있다. 그래도 지금 내게는 최선의 선택이자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이제는 증상에 따라 어떤 약을 먹어야 하는지 알아서 챙겨 먹고, 너무 아무렇지 않게 진료 중에 그런 이야기를 한다. 마치 어제 캔맥주를 마셨다는 것과 같이 시시콜콜한 일상 이야기를 하듯. 내 지구력이 좀 강했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하기에 늘 툭툭 발이 걸려 넘어진다. 어느 때는 툴툴 털어버리곤 하지만, 가끔씩 아니 때때로 넘기기 힘든 무언가가 목에 걸린다.
XR, CT, MRI 촬영을 하면 진료 전에 알아서 영상의학과에 가서 업로드를 요청하는 게 자연스러웠다. 자연스럽지 말아야 할 것에 자연스러워진 것이다. 자연스러워지고 싶지 않은 것에 자연스러워졌음을 알게 되는 순간 변화된 일상에 새삼 체감을 하게 된다.
세상은 어찌나 나를 안온함과 떨어트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지 그와의 줄달리기에서 나는 속절없이 저물어져 간다. 그렇게 저물어져 가다가 끝끝내 사라졌으면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느 때는 숨통을 찾으려고 이런저런 시도를 해보고, 환기를 위해 노력이란 걸 한다. 그러다가 이런 것들이 모두 재미없다고 여겨지면 나는 또 가만히 있는다. 그 무엇도 하지 않는다. 그저 붙어있는 숨을 들숨과 날숨이라는 규칙으로 이어갈 뿐이다. 그런 순간이 오면 삶에서 느껴온 가치들은 내게는 더 이상 무의미해진다. 그 가치들이 더 이상 내게 기쁨을 주지 않는다. 돌아서면 바로 있는 그것들을 어리석은 나는 끝끝내 보지 못하고 그렇게 또 비어진 삶을 산다. 소소한 재미들이 없는, 힘든 시간들이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참 좋았노라고 말할 수 있는 감사함이 없는, 이왕 시작한거 끝을 봐보자던 의지가 없는, 하고 싶은 것도 먹고 싶을 것도 가고 싶은 것도 없는, 목표가 없는, 내가 존귀하다 여기는 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그런 비어진 삶.
계획은 지키지 않으려고 세우는 것이라고 말하곤 하지만, 그래도 한 번 쯤은 지켜질 줄 알았다. 그런데 병원 일정에 대한 계획은 일말의 자비심도 없이 늘 빗겨나간다. 어찌나 매몰찬지 정신이 얼얼할 정도다. "아홉수가 아직 끝나지 않았나 봐요.ㅎㅎ"라고 말을 하면 조금 덜 신경을 쓰일까 해봤으나 역시 긍정적으로 포장하는 말은 나와 맞지 않는다. 그냥 재수 없는 일이 계속 생겨 내 앞길을 자꾸 막고 있는 것이다. 흔적이라도 덜 남기면 좋으련만 그 존재감은 어찌나 강렬한지 여운이 한참을 간다.
백신 2차를 맞고 미열과 몸살에 시달리다 사흘이 지나고 나니 조금 증상이 나아진 듯하다. 안그래도 지쳐있는 심신이 더욱 망가진진 것 같지만. 그래서 그런지 글이 거칠고 투박하기 그지없다. 좀 괜찮은 컨디션으로 백신 접종을 하고 싶었는데, 역시 계획은 지키지 않으려고 세운다. 주 1회로 줄이고자 한 진료는 주 4회가 되었고, 추석 후에는 어느 빈도로 다닐지 아직 잘 모르겠다. 요즘 다니는 길목에 보이는 단풍나무와 은행나무를 보면서 분명 작년에도 똑같이 다닌 길이어서 현란한 단풍들을 봤을 법도 한데 기억이 나질 않는 거 보면 작년에는 단풍의 색채를 느낄 여유도 없는 그런 건조한 일상을 보냈나 보다. 올해는 작년보다는 조금 생기가 있기를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