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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내음 Oct 27. 2024

흐르는 돌, 시간의 멜로디

돌집의 기억

버스가 연희동을 지나 서대문 구청을 지날 즈음, 차창 밖으로 익숙한 풍경이 펼쳐진다. 어릴 적 살던 집으로 이어지는 골목길이 보인다. 버스는 앞으로 나아가고 기억은 오래전 여학교 시절로 뒷걸음질 친다.     


내가 살았던 집은 얕은 야산이 멀리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있었다. 우리 집은 동네에서 ‘돌집’으로 불렸다. 처음 집을 찾는 사람들이 이웃이나 상점에 ‘돌집’이 어디냐고 묻기만 하면, 금방 우리 집을 찾을 수 있었다. 아버지가 사랑한 돌들로 마당이 가득 찼고, 거실과 방까지 돌들이 자리 잡아, 사람보다 돌이 주인이 된 듯했다.     


“우와, 오늘은 색이 더 오묘하네. 이 녀석은 이끼가 더 촘촘하고 예쁘게 자랐어.” 아버지는 돌과의 대화로 하루를 시작했다. 우리가 보기엔 비슷한 돌멩이였지만, 아버지는 하나하나 어루만지며 정성스럽게 가꾸었다. 물을 뿌릴 때마다 돌은 무지개처럼 빛났고, 기름 바른 걸레가 지나갈 때마다 반짝였다. 주말이면 아버지는 마음에 드는 돌을 찾으러 강이나 계곡으로 떠났고, 저녁 무렵 배낭 가득 돌을 메고 집에 돌아오곤 했다. 아버지가 돌을 꺼내며 보이던 표정은 보물을 찾은 아이처럼 환하게 빛났다.  


“이 모양 좀 봐. 꼭 금강산을 닮았지?”. “이제 돌 좀 그만 가져와요. 온 집안이 돌로 가득 차겠어요.”
돌을 가져올수록 엄마의 잔소리도 늘었지만, 아버지의 돌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았다. 어느 세월, 어느 장소를 이리저리 떠돌다가 우리 집에 오게 되었을까. 물결무늬, 거북이, 산봉우리에 걸린 태양 등 오랜 세월과 풍화작용으로 이리저리 깎여 대자연이 빚어낸 솜씨는 놀랍고 신비했다. 붓으로 그려놓은 산수화처럼 부드럽기도 하고, 때로는 깎아 놓은 절벽처럼 힘차고 웅장했다. 멋진 수반에 담아 진열해 놓으면, 이름 모를 돌도 어느새 예술 작품으로 변했다.       


수십 년간 우리와 함께했던 돌들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천덕꾸러기가 되었다. 집을 팔면서 마당에 있던 돌들을 시골 친척 집에 맡기기로 했다. 돌들을 보냈다. 언젠가 마당 있는 집으로 이사하거나, 아버지의 꿈이었던 작은 돌 전시관을 지을 때 다시 찾아오리라는 희망을 간직한 채였다.     


아버지 없이 맞는 열여섯 번째 가을, 돌들의 안부를 물으니 여러 장의 사진이 왔다.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며 당당하게 서 있던 그 모습은 어디 갔을까. 누렇게 말라버린 잔디 위에 널브러져 있는 돌들의 모습이 왠지 처연하다. 반들반들 윤기를 머금었던 피부는 갈라질 듯 푸석하고 새파란 이끼가 자랐던 곳에는 푸르스름한 자국만이 멍처럼 남아 있다.      


옛 집에서 돌과 함께한 소소한 기억이 떠오른다. 돌을 설명하며 자랑하던 아버지, 돌 구경 온 손님에게 차를 내며 분주히 움직이던 엄마… 돌집의 기억은 언제나 평화롭고 아름다웠다. 돌을 보러 가지 않은 이유는, 아마도 돌아갈 수 없는 지난날에 대한 회한 때문일 것이다.     


사진 속 돌들을 가만히 바라본다. 상처투성이의 모습이지만, 전성기를 내려놓고 묵묵히 삶을 이어가는 그 모습을 보며 경외감이 든다. 언젠가 시골에 마당 있는 집을 마련해 아버지의 정원을 만드는 꿈을 꾼다. 떠돌던 돌들과 함께 눈부신 순간을 맞이할 날을 상상하며, 그리운 돌집을 눈에 담는다. 무지갯빛 정원에서 아버지가 웃고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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