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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내음 Sep 10. 2024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재즈와 와인



 

회색빛 하늘에서 금방이라도 눈이 쏟아질 것 같은 날이다. 연주회장에 도착하니 늘씬한 몸매에 민소매의 검정 드레스를 입은 그녀가 포스터 속에서 날 보고 웃고 있다. 연주회장에는 그녀를 추모하는 많은 사람으로 객석은 거의 빈자리가 없이 채워져 있다.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어디서 인가 술 냄새가 풍겨와서 뒤를 돌아보니 그녀의 남동생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고 앉아 있었다. 술 냄새가 슬프게 느껴졌다.


제자가 나와서 짤막하게 인사말을 하고 들어간 후 추모음악회가 시작되었다. 첫 곡은 라벨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였다. 그녀가 이전에 앙코르곡으로 자주 연주했던 곡이었다. 달빛처럼 아련한 피아노의 선율이 울려 퍼지고, 객석에는 조용히 흐느끼는 소리, 코를 훌쩍이는 소리가 난다. 달빛처럼 아련히 스며드는 피아노 선율을 들으며 나는 빨려들 듯 지나간 시간 속으로 여행을 떠난다.      


그녀를 만난 건 20년 전, 미국 미시간주립대의 음대 연습실에서였다. 유학한 지 3년 만에 첫 아이를 가졌던 나는 피아노 연습을 하다가 잠시 피곤한 몸을 연습실 복도 의자에 비스듬히 누인 채 쉬고 있었다.      


“출산예정일이 언제예요? 내가 베이비 샤워 해줄까요?”      


약간 쉰 듯한 저음의 목소리가 인상적이었다. 소리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니 긴 눈매에 클레오파트라 단발머리를 한 큰 키의 여자가 나를 쳐다보고 서 있었다. 자신의 소개도 없이 던지는 거침없는 질문에 조금 당황했지만, 왠지 친근하고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그녀의 이름은 에리카, 성은 엄, 뉴욕에서 학부를 마치고 이곳으로 공부하러 온 한국 학생이었다.      


약속대로 에리카는 나의 아기를 위한 베이비 샤워를 멋지게 열어주었고 두고두고 나는 그 파티의 주인공이 되어 화제에 오르내렸다. 창의적이고 열정적이었던 그녀 덕분에 시골 도시의 외로운 유학 생활에서도 새로운 세계를 만나는 기쁨을 누렸다. 그동안 잠시 묵혀뒀던 삶의 즐거움이 하나 둘 깨어나는 느낌이었다. 아늑한 로컬 식당에서 독특한 음식을 맛보고, 한국에서나 볼 수 있는 맛있는 빵집을 발견하여 입안에서 스르르 녹는 케이크를 먹을 수 있었고, 분위기 있는 조그만 재즈 클럽에 가서 라이브 공연을 감상하기도 했다.


공부를 끝내고 한국에 돌아와서도 우리는 종종 만나서 회포를 풀었다.

‘언니, 나 오늘 차 샀는데 어디 드라이브 갈까?’


명쾌한 말투와 재치 있는 말솜씨, 신선한 아이디어는 늘 재미없는 나를 재미있고 활기차게 만들어 주었다. 싸움도 잘할 것 같은 당찬 겉모습과는 달리, 섬세하고 자신보다는 남을 먼저 생각하는 배려심이 많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사람을 겉모습으로 평가하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일인가를 깨닫게 되었다. 운행 거리가 짧아서 불평하고 툴툴대는 택시 기사한테는 정중하게 두 배의 요금을 지불하기도 했고, 식당이나 가게에서 일하는 종업원들에게는 후한 봉사료와 함께 다정스럽고 친근한 유머를 덤으로 선사했다.


일 년에 수십 차례의 크고 작은 연주회를 기획하고 제자를 가르치며 열정적으로 살고 있던 에리카가 오십이 넘은 나이에 결혼을 한다는 깜짝 발표를 해서 나를 놀라게 했다,      

“내가 노총각 노처녀에게 희망을 준 셈이지? 나처럼 늦은 나이에도 운명적으로 만나서 연애하고 결혼할 수 있다는 희망”.


재미있고 유쾌한 결혼 발표에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결혼 후 여전히 열정적으로 연주도 하고 남편과 같이 틈날 때마다 여행을 다니는 그녀가 행복해 보였다.     


결혼한 지 3년 남짓 시간이 흘렀을 무렵, 에리카를 만난 것은 어느 대학병원의 면회실에서였다. 대화는 수화기를 통해서만 가능한, 유리 벽을 사이에 둔 특별 면회실이었다.     

“모자가 나랑 안 어울리지 않아?” 모자를 쓰고 나타난 그녀가 담담하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몇 주 전 남편과 같이 다녀왔던 스페인 남부의 작은 도시 이야기였다.


그들이 묵었던 수도원의 평화롭고 고즈넉한 풍경, 40도가 웃도는 폭염에도 불구하고 몸이 으슬으슬 추워서 점퍼를 어렵게 사서 입고 다닌 이야기, 아름다운 풍경을 놓치고 싶지 않아 뼈까지 아픈 고통을 참으며 골목골목을 휘청거리며 걸어 다녔다는 이야기가 한 편의 아름답고 슬픈 시처럼 가슴속으로 스며들었다.      


“지금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걸까. 눈을 감으면 그 골목의 아름다운 풍경이 자꾸 떠올라.”     


그녀의 제자가 연주하는 스페인의 춤곡 ‘파반느’가 거의 마지막 종결구를 향해 가고 있다. 밝고 감미롭게 울려 퍼지던 서정적인 멜로디는 무거운 발걸음을 내려놓고 지난 삶을 추억하듯 아련하고 조용하게 울려 퍼진다. 마치 느릿느릿 수도원 앞을 걸어가는 에리카의 휘청거리는 발걸음처럼 흐느적거린다. 세상의 모든 그리움과 사랑을 남긴 채 마지막 이별을 알리는 그녀의 목소리처럼 애달프고 처연하다.     

 


박수 소리가 아득하게 허공에 울려 퍼진다. 코트 깃을 여미고 연주회장을 나섰다. 한 겨울의 차가운 공기가 그녀의 부재와 함께 나의 몸을 떨게 한다.      

“오늘 와인 한 잔 어때요?”

멀리서 에리카의 나지막하게 읊조리는 목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거리에는 눈물 같은 진눈깨비가 부슬부슬 떨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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