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ady in Pink
사이버 조문 방에 접속한다. 마지막 인사를 건네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직사각형 공간은 모두 같지만, 표정은 제각각이다. 미소를 띤 얼굴, 무표정한 얼굴, 학사모를 쓴 모습, 알록달록한 등산복 차림, 정면을 응시한 얼굴, 그 틀 속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는 흐릿하다.
파란 결제 창에 시선이 머문다. 조의금까지 사이버로 보내는 것이 고인에 대한 예의일까? 슬픔을 돈으로 환산할 수 있을까? 코로나가 바꾼 새로운 장례 풍경이 서늘하게 다가온다.
며칠 전, J의 부고를 받았다. 충격과 슬픔 속에서 들어간 장례식장 홈페이지. 거기서 환하게 웃고 있는 J의 사진을 마주했다. J는 나의 초등학교 단짝이었다. 우리는 매일 등굣길에 만나고, 하굣길에는 헤어지지 못해 남의 집 대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 끝없이 이야기를 나눴다. 길을 지나던 사람들은 신기한 듯 우리를 보며 말했다.
“얘들 좀 봐! 너희들 아까부터 여기서 뭐 하고 있니? 엄마가 기다리실 텐데, 집에 가서 숙제해라.”
늘 붙어 다니던 J와는 서로 다른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자연스레 소식이 끊겼다. 한참 후, 동창 찾기 사이트가 유행하던 때, 우리는 수십 년 만에 다시 연락이 닿았다. 오랜 시간의 공백이 있었지만, 그 시간을 메우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J와 나는 음악, 글, 그림, 영화 등 공통 관심사가 많았고, 그녀를 만나면 어린 시절 그 대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던 때로 돌아간 듯했다. 작가로 등단해 활발하게 글을 쓰던 J는 글쓰기를 막 시작한 나에게 늘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너도 글을 쓰기 시작했다니 기뻐. 자신을 돌아보고 치유하는 데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고 생각해. 너에게는 이미 글쓰기의 길이 정해져 있었던 것 같아.”
얼마 전, 그녀가 많이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병원으로 달려갔다. 그곳에서 만난 J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빛나던 머리카락은 부스스했고, 눈빛에는 고통과 두려움이 서려 있었다.
“아프니까 어릴 때 생각이 더 많이 나. 너랑 내가 남의 집 대문 앞에 앉아 나눴던 이야기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 우리 우정을 소재로 수필을 쓰고 있어. 같이 완성해 보는 건 어떨까?”
그녀의 눈빛이 낯설었다. 깊어진 눈은 나를 보는 것 같기도, 허공을 응시하는 것 같기도 했다.
“기적처럼 병이 찾아왔으니, 또 한 번의 기적이 찾아오지 말란 법은 없겠지? 나는 희망을 놓지 않을 거야.”
희망을 말하면서도, 그녀의 눈빛은 아득하고 쓸쓸했다.
어떠냐는 안부 문자를 보낸 지 여러 날이 지났지만, J에게서 답장은 오지 않았다. 지워지지 않은 ‘1’이라는 숫자를 확인하면서 불안과 초조함이 커져 갔다.
‘많이 안 좋은 건 아닐까? 아니야, 그렇게 쉽게 무너질 친구가 아니야.’
스스로를 다독이며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J에게서 문자가 왔다. 반가운 마음에 급히 열어본 문자는 그녀 자신의 이름으로 온 부고였다.
사흘 동안 장대비가 거침없이 쏟아졌다. “여름이 가기 전에 만나자”던 그녀의 마지막 말이 장마철 빗줄기처럼 내 목을 타고 올라왔다. 그동안 나는 그녀의 사진을 보며 그녀가 남긴 글을 읽고 또 읽었다.
사진 속 그녀는 온통 핑크빛이었다. 레이스 달린 긴 원피스에 분홍 구두, 긴 웨이브 머리가 소녀처럼 하얀 그녀의 얼굴을 돋보이게 했다. 그녀가 그리울 때마다 그녀의 사진과 글을 보며 그녀가 완성하지 못한 우리의 이야기를 써 내려갈 것이다.
컴퓨터 화면에 커서가 깜빡인다.
‘J야, 잘 가. 그동안 고마웠어.’
짧은 조문 글을 쓰고 ‘보내기’를 누른다. 화면에 ‘전달 중’이라는 메시지가 뜨고, 동그란 아이콘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한다. 기다리며 바라보는 그 회전이 마치 시간을 붙잡아 두려는 것만 같다. 갑자기, 컴퓨터 화면이 멈췄다. 내 마음이 전해졌을까. 사이버 공간 너머에서 그녀가 나를 보고 있다. 환한 미소와 함께, 나를 바라보며 웃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