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ady in Pink
모니터 위, 손바닥만 한 작은 창 하나. 그 안에는 마지막 인사를 건네는 사람들의 모습이 빼곡하다. 무표정한 얼굴, 미소를 머금은 얼굴, 젊은 날의 학사모 차림, 산행길의 등산복 차림까지…. 그 좁은 공간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는 흐릿하다. 그곳엔 슬픔도, 울음도, 분향도 없다. 꽃 대신 전자화된 문장이 흘러가고, 분향 대신 마우스의 클릭이 조심스러운 예식이 된다. 손끝은 화면 위를 맴돌고, 마음은 낯선 물결처럼 일렁인다. 장례식장 방문이 어려워진 코로나 시대가 남긴 새로운 조문의 풍경이다.
친구 지영의 부고를 받았다. 현실이라 믿기 힘든 충격 속에서 장례식장 홈페이지를 열었을 때, 화면 가득 나타난 것은 햇살처럼 환하게 웃고 있는 그녀의 사진이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녀는 눈부시게 웃고 있었다.
지영은 초등학교 내내 나의 단짝이었다. 매일 아침 등굣길에 만나 해 질 무렵까지 우리는 한 몸처럼 붙어 다녔다. 하굣길에서도 헤어지기 아쉬워, 동네 남의 집 대문 앞 돌계단에 나란히 앉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그때마다 지나가던 동네 아주머니들은 신기하다는 듯 걸음을 멈추고 우리를 흘끗 보며 이렇게 말했다.
“얘들 좀 봐라, 아까부터 여기서 뭣들 하니? 숙제는 집에 가서 해라.”
그때마다 우리는 더 깔깔거리며 세상에 우리 둘 뿐인 것처럼 작은 돌계단 위에서 하루의 남은 빛을 나눴다. 그렇게 늘 붙어 다니던 우리는 서로 다른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자연스레 연락이 끊겼다. 수십 년이 지난 뒤, 한때 유행하던 ‘동창 찾기’ 사이트를 통해 다시 만났다.
“어머, 그대로네!”
그 한마디로 긴 세월의 공백이 순식간에 메워졌다. 음악, 그림, 영화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관심사는 놀랍도록 여전했다. 우리는 만날 때마다 어린 시절 그 대문 앞에 앉아 있던 시절로 돌아가 끝없이 추억의 대화를 이어갔다. 이미 작가로 등단하여 왕성하게 활동하던 지영은, 이제 막 첫걸음을 뗀 나에게 진심 어린 응원과 온기를 아낌없이 건넸다.
“너도 글을 쓰기 시작했다니 정말 기뻐. 자신을 돌아보고 치유하는 데 글쓰기만큼 구체적인 건 없는 것 같아. 어쩌면 너는 이미 글의 길 위에 있었는지도 몰라.”
그러던 어느 날, 뜻밖의 소식을 들었다. 지영이 많이 아프다는 이야기였다.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나는 곧장 병실로 향했다. 창가로 기운 오후의 빛이 하얀 병실 안을 고요히 감싸고 있었다. 나는 무슨 말을 건네야 할지 몰라 잠시 숨을 고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예전과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하얗고 동그랗던 얼굴은 누렇게 마른 열매처럼 쪼그라들었고, 윤기 있고 풍성하던 머리카락은 메마른 풀처럼 푸석하고 부스스했다.
“아프니까 어릴 때 생각이 더 많이 나. 너랑 나, 남의 집 대문 앞에 앉아서 얘기 나누던 일들이 영화처럼 스쳐 지나가네. 기적처럼 병이 찾아왔으니, 기적처럼 이겨낼 수 있겠지?”
그녀의 목소리는 약간 쉰 듯했지만, 여전히 빠르고 스타카토처럼 또렷했다. 희망을 말하고 있었지만, 그 희망은 어쩐지 쓸쓸한 메아리로 되돌아왔다. 깊고 아득한 눈빛은 분명 나를 향하고 있었으나 실은 아주 먼 곳, 그 너머의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는 듯했다. 마치 이미 삶이라는 세계의 문턱을 넘어선 사람처럼.
‘좀 어때?’라는 안부 문자를 보낸 지 여러 날이 지났지만, 지영에게서 답은 오지 않았다. 지워지지 않는 ‘1’이라는 숫자가 화면 위에서 점점 무겁게 내려앉았다. 애써 마음을 다독이며 하루하루를 버티던 어느 날, 마침내 메시지 알림이 떴다. 반가운 마음에 황급히 열어본 문장은 지영의 이름으로 전송된 짤막한 부고였다.
사흘 밤낮을 쉼 없이 장대비가 내렸다. 나는 빗소리 속에서 사흘 내내 지영의 사진을 꺼내보고 그녀의 글을 읽었다. “여름이 가기 전에 보자.” 그 마지막 목소리가 빗줄기를 따라 내 마음에 촉촉하게 번져왔다. 사진 속 지영은 색 바래지 않은 핑크빛이었다. 분홍색 레이스 원피스와 곱슬곱슬한 갈색 긴 머리. 소녀 같은 그 모습은 하얗고 동그란 얼굴 위에서 더없이 눈부셨다.
검은 커서가 컴퓨터 화면 위에서 무심히 깜박인다. 나는 텅 빈 마음을 몇 줄의 조문글과 숫자로 환산된 조의금으로 메워 넣고 ‘보내기’를 클릭한다. ‘전달 중’이라는 문구 아래, 둥근 회전 표시가 빙글빙글 돌고 있다. 마침내 빛의 회전이 멈추는 순간, 화면 속 저편의 사이버 공간에서 지영이 나를 향해 환하게 웃고 있다. 정지된 디지털 화면 속의 그 미소는 생전의 따뜻한 온기 그대로 내 안에 고스란히 머문다. 이별의 의식은 끝났지만, 그녀와의 기억은 이렇게 눈부시게 반짝이며 영원히 살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