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년 전의 편지
집 정리를 하다 우연히 낡은 상자 구석에서 분홍색 카드를 발견했다. 세월에 빛이 바래 옅은 살구색에 가까워진 하트 모양의 카드. 겉표지에는 ‘For You’라는 단순한 문구가 적혀 있었다.
카드를 펼치자 붓글씨를 배우셨던 엄마 특유의 정갈한 필체가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 이제는 다 잊었다고, 단단해졌다고 믿었던 그리움이 화선지에 떨어진 먹 방울처럼 소리 없이 마음속으로 번져 나갔다.
“혜경아, 너의 생일을 축하한다. 내일 떠난다 생각하니 마음이 착잡하구나. 그러나 착하고 믿음직한 신랑과 같이 떠나니, 한결 마음이 든든하다. 서로 사랑하고 이해하고 아껴주며, 행복하게 살기를 아빠 엄마는 바랄 뿐이다. 보다 나은 내일을 위하여 열심히 공부하여 좋은 장내를 꿈꾸기 바란다.”
- 87. 9. 2. 엄마가
39년 전,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기 전날이었다. 서툰 이민 가방을 꾸리던 딸의 등 뒤로 엄마가 건넸던 마지막 생일 축하. 엄마는 상상이나 하셨을까. 낯선 땅으로 떠나는 딸에게 보낸 이 응원이 우리가 함께 맞이한 마지막 생일의 기록이 될 줄을. 그리고 5년 뒤, 당신이 먼저 긴 여행을 떠나게 될 줄을 말이다.
카드를 쥔 손끝에 엄마의 온기가 남은 듯해 한참을 가만히 앉아 있었다. 기억의 필름이 흑백 영화처럼 천천히 돌아가기 시작했다.
설날이면 나란히 앉아 예쁜 주름을 잡아 빚던 엄마의 정갈한 만두, 고사리 같은 손을 잡고 매주 함께 걷던 피아노 레슨 길, 그리고 멀리 미국까지 날아와 좁은 부엌에서 서툴게 살림하던 딸에게 김치 담그는 법을 가르쳐주던 고단한 손길까지. 그 장면들이 선명하게 다가왔다가 이내 희미한 안갯속으로 멀어졌다.
사람들은 시간이 흐르면 그리움도 무뎌진다고 말한다. 하지만 내게 엄마와의 추억은 마르는 샘이 아니라 내 안을 유유히 흐르는 강물 같았다. 때로는 잔잔하게, 때로는 거세게 출렁이며 내가 길을 잃을 때마다 삶의 방향을 비추는 윤슬이 되어주었다.
창가에서 내려온 오후의 햇살이 손바닥 위 분홍색 카드 위로 따스하게 내려앉았다. 그 온기가 꼭 엄마의 나직한 음성 같아서 나는 한참 동안 대답 없는 대화를 나누었다.
“혜경아, 잘 지내지? 늘 행복하길 바래.”
나는 오늘도 엄마가 정성스레 써 내려간 그 문장들을 마음의 이정표 삼아 하루를 살아간다. 비록 당신은 곁에 없지만, 엄마의 사랑은 39년 전 그날의 붓글씨처럼 여전히 내 삶에 선명하게 번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