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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잘린송 Jun 29. 2021

기억 조각 모음 12

6월의 마지막 날입니다. 한 달 내내 거의 회색빛 하늘만 본 기억밖에 없네요. 푸른 하늘이 보고 싶습니다. 



푸른 하늘이 반사되어 보석같이 빛나는 바다와 수영장이 있는 섬으로 떠나고 싶습니다. 

Swimming Pool, Tamuning, Guam, 2013.


오늘은 정말 여행엘 가고 싶습니다. 그래서 내가 남태평양 가운데 있는 작은 섬에 있다고 상상할 것입니다. 상상 속이지만 나와 함께 떠나봅시다.  




나는 지금 뜨겁게 달궈진 백사장 위를 걷습니다. 그러다 파도가 치면, 발목까지 물이 찹니다. 옷이 젖어도 괜찮아요 왜냐하면 곧 바다에 들어갈 거니까요. 

와이키키에서, 그림자 나, 2020. 


나는 수영을 잘 못하지만 그냥 물 위에서 둥둥 부유합니다. 시선은 하늘 쪽으로 가 있으니, 태양도 보이고 구름도...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데도 눈이 부시네요. 그냥 눈을 감아봅니다. 



물결이 칠 때마다 일렁이는 소리가 다채널 스테레오 스피커에서 나오듯 입체적입니다. 귀 가까이에서도 들리고, 저 멀리서도 들립니다. 물 위에 파장이 일 때마다 미약하게 흔들리는 내 몸. 물이 아직은 무서워 걱정됩니다만 그래도 이 순간만큼은 자유롭습니다. 

물의 윤슬은 마치 크리스마스 전구가 처럼 반짝반짝 빛이 납니다. 바닷가에 있는 모든 이들도 하나하나 빛이 나네요. 


플루메리아, 괌, 2015. 

열대지방 특유의 식물에서 나는 냄새가 바람을 타고 옵니다. 플루메리아와, 재스민의 향기가 납니다. 땅에서 올라오는 미네랄 냄새와 정확한 좌표는 잘 모르겠지만 언젠가 몇 번이라도 마주쳤던 것들의 냄새도 섞여있습니다. 그 바람과 냄새가 얼굴과 몸에 맺힌 물방울을 식힙니다.  


그렇게 물놀이가 끝나면 근처에서 식사를 합니다. 김밥도 좋고, 햄버거도 좋아요. 식당에서 흘러나오는 기분 좋은 타악기 소리가 들어간 보사노바가 들립니다. 맥주 한잔을 청해야겠군요. 대낮부터 맥주를 즐기다니, 이제야 정말 휴가 같습니다. 긴장의 연속이었던 일상을 벗어난 것만으로도 힐링이 됩니다. 


식사를 마치고 근처 공원에 가서, 나무 밑 그늘에 앉아 책도 읽고, 셀카도 찍다가 친구들에게 영상통화도 걸어봅니다. 쇼핑센터에 가서 기념품도 사 봅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보면 어느새 저녁이죠. 

노을이 지는 타무닝, 괌, 2016. 

저녁이 오기 전의 해는 하루 중 그 어느 때 보다 더 붉게 타오르는 것 같습니다. 행성의 수명이 다 하면 그런 색이 난다고 하죠. 하루의 일과를 다 마친 해는 마치 죽은 별처럼 빨갛습니다. 하지만 지구가 나머지 거리를 회전하다 보면 내일이 올 것이고 태양은 막 태어난 별과 같이 밝게 빛나겠지요. 




노을이 아름다웠군요. 나는 이 노을을 앞으로 살면서 몇 번 볼 수 있을까 생각해 봅니다. 2016년의 방문이 마지막 여행은 아니었지만 그 후에 만났던 노을은 그때 마주했던 것과 다르더군요. 정말 그때뿐이었습니다. 비슷한 상황이 온다고 해도, 같을 수가 없는 것은 조금 슬픕니다. 따라서 매 순간을 소중히 여겨야 하는 것 같습니다. 


여행을 자유롭게 다닐 수 있었을 때가 그립습니다. 지금 이렇게 방 한 구석에서 예전 사진을 들여다보면서 아름다운 섬나라의 모습을 다시 떠올릴 줄은 그땐 상상도 못 했답니다. 돈이 더 들어도 여기도 가보고 저기도 가보고, 이것도 해 보고 저것도 해 볼걸 그랬네요. 행복하게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불행이라고만 여겼던 그때의 내 일상이 남긴 건 후회로군요. 하지만 이렇게 지나간 날의 흔적이 사진이라는 이미지로 남아 내 일상 속에 비집고 들어와 잠시나마 이 권태로움에서부터 해방시켜줍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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