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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경아 Aug 22. 2024

7화. 하얀 목련이 필 때면

연재소설 <아파트에게>

  무심하게 4계절이 또 지나갔습니다. 그러는 사이 나는 309호도 들여다볼 수 있을 만큼 키가 자랐습니다. 309호에는 귀여운 쌍둥이 형제가 살고 있었습니다. 10살 정도 되는 쌍둥이 형제는 너무 똑같이 생겨서 처음에는 구분하기 힘들었는데, 지금은 쌍둥이를 거뜬히 구분할 수 있습니다. 형이라고 불리는 동민이는 오른쪽 이마에 흉터가 있었고, 말을 할 때마다 코를 문지르는 버릇이 있습니다. 반면에 동생 경민이는 이마 흉터 대신 턱 밑에 흉터가 있었고, 눈을 많이 깜박 거리는 독특한 버릇이 있습니다. 쌍둥이 녀석들은 둘 다 엄청난 개구쟁이였는데, 어떤 날은 서로 레슬링을 하다가 텔레비전 브라운관을 박살 내기도 했습니다. 그날 쌍둥이 형제는 반나절 내내 베란다에서 벌을 서야 했습니다. 덕분에 나는 오후 내내 아주 재미난 구경을 할 수 있었습니다. 벌을 서고 있는 와중에도 녀석들이 장난을 멈추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녀석들 덕분에 며칠 동안 텔레비전을 볼 수 없어 답답하기는 했습니다. 109호엔 항상 커튼이 쳐져 있었고, 209호 민정이네 집은 민정이가 태어난 이후, 좀처럼 텔레비전을 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며칠 뒤, 309호 쌍둥이네 집에 커다란 박스가 하나 배달되었습니다. 기대했던 대로 새로 산 텔레비전이었습니다. 문제는 기존에 보았던 텔레비전과는 완전히 다른 텔레비전이었다는 겁니다. 

 “우와, 이게 그 유명한 총 천연색 컬러 TV란 말이지?”

 “저것 봐. 진짜 사람이랑 똑같아.”

 “얘들아, 그러니까 이런 TV는 가까이에서 보면 안 돼. 눈 나빠진다.”

 “아빠, 근데 이거 진짜 사람이 들어가 있는 건 아니지?”

 “아니지. 그러니까 이번엔 절대 깨 먹으면 안 돼. 인석들아!”

쌍둥이 녀석들이 총 천연색 컬러 TV 앞에 딱 달라붙어 있어서 나는 좀처럼 그 신기한 TV를 볼 수 없었습니다. 정말 궁금해서 미칠 것 같습니다. 도대체 뭘 보고 쌍둥이들이 저렇게 난리가 났는지. 쌍둥이들이 어머니한테 질질 끌려 나와 앉은 후에야 나는 텔레비전, 아니 총천연색 컬러 TV를 제대로 볼 수 있었습니다. 컬러 TV를 보자마자 아이들처럼 나도 뒤로 자빠질 뻔했습니다. 쌍둥이들보다 백배는 더 감탄하고 놀랐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그동안 보았던 텔레비전은 진짜 TV가 아닌지도 모르겠습니다. 컬러 TV는 지금과 똑같은 세상을 품고 있는 것 같습니다. 텔레비전을 보지 못해 원망했었는데, 이젠 텔레비전 브라운관을 날려 먹은 쌍둥이들이 고맙기까지 했습니다. 컬러 TV로 내가 좋아하는 드라마‘수사반장’과‘전원일기’를 볼 수 있다니! 이미 터뜨린 꽃망울을 다시 터뜨리고 싶을 정도로 기운이 넘쳐납니다.


**


 하루하루가 너무 빨리 지나가는 것 같습니다. 그만큼 세상의 변화가 빠르다는 얘깁니다. 쌍둥이네 집을 시작으로 총천연색 컬러 TV가 105동 집집마다 연이어 들어왔습니다. 얼마 전부터는 매일 밤마다 울리던 자정 사이렌 소리도 사라졌습니다. 사람들 말로는 야간 통행금지가 풀렸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통행금지가 풀렸다고 해서 무슨 영향이 있겠냐 싶었는데, 상당한 변화가 생겼습니다. 야간 통행금지가 풀리고 사람들의 귀가시간이 늦어지면서 아파트 불빛이 오래도록 꺼지지 않아 잠을 설치게 되었습니다. 또한, 밤늦게 아파트 외진 곳을 찾아다니는 연인들의 숫자가 늘어나 밤이 깊어도 나는 항상 긴장이 되었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야릇한 연인들의 애정행각을 지켜보는 재미도 쏠쏠했습니다. 하지만 밤마다 일어나는 일들이다 보니 이젠 피로감이 더 많이 쌓이는 것 같습니다. 덕분에 요즘은 야간 통행금지가 있던 그 시절이 문득문득 그립습니다. 


 얼마 전에는 프로야구라는 것도 생겼습니다. 간혹, TV에서 야구하는 것을 보기는 했지만, 큰 흥미를 느끼지 못했는데, 언제부터인가 105동 꼬마 녀석들이 야구 모자와 잠바, 그리고 커다란 장갑을 한쪽에 끼고 아파트 단지를 이리저리 몰려다니 것을 보게 됩니다. 귀여운 곰이 그려진 어느 야구 구단에서는 어린이 회원에 가입하면 야구 모자와 잠바를 나누어주었는데, 덕분에 105동 남자아이들 대부분은 그 곰돌이 유니폼을 입고 다닙니다. 309호 쌍둥이 형제와, 503호 상수, 그리고 202호 세찬이도 똑같은 모자를 눌러쓰고 놀이터 옆 주차장 구석에 자주 모였습니다. 야구에 빠진 녀석들 덕분에 나는 야구게임의 룰도 익힐 수 있었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야구는 한 사람이 공을 던지고, 또 한 사람은 그 공을 받고, 그 앞에 서 있는 또 다른 사람은 그 공을 받기 전에 방망이로 쳐내면 되는 게임이었습니다. 생각보다 단순한 게임인 것 같은데, 녀석들은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두 볼이 빨개질 정도로 게임에 몰두했습니다. 제대로 던지는 공도, 제대로 쳐내는 공도 별로 없었지만 게임을 하고 있는 아이들의 얼굴에는 이상하게 생기가 돌았습니다. 특히,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놀이터에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던 세찬이가 놀이터에 나와 뛰어노는 것을 보니 무척 반가웠습니다. 그렇게 신나게 뛰어놀다 지친 아이들은 어느새 내 앞에 있는 벤치에 모여들어 재잘재잘 떠들기도 합니다.

 “나 이번 주말에 아빠랑 야구장 간다!”

 “우와, 정말? 진짜 좋겠다.”

 “우리 사촌 형이 지난주에 갔다 왔는데, 경기장이 어마어마하게 커서 선수들이 개미만큼 보인다고 하더라.”

 “뭐야, 그럼 그냥 TV로 보는 게 나은 거 아냐?”

 “아냐, 그래도 응원하다 보면 엄청 신난대. 사촌 형 친구가 일찍 가서 내야석에 앉았었는데, 거긴 진짜 끝내준다고 했어.”

 “경민아! 우리도 아빠한테 야구장 같이 가자고 졸라 볼까?”

 “근데 울 아빠는 타이거즈잖아.”

 “그럼, 어때? 타이거즈랑 베어스랑 경기할 때 가면 되지.”

 “그래, 그거 좋은 생각이다!”

 “그럼 넌 이제 아빠 구두를 닦아. 나는 안마를 해볼 테니까.”

 “오케이!”

가만히 입을 다물고 아이들의 얘기를 듣기만 하던 세찬이가 조용히 벤치에서 일어납니다. 그리고는 커다란 야구 장갑을 벗어 동민이에게 건넵니다.

 “난 그만 들어가야겠다. 빌려줘서 고마워.”

 “벌써 들어가?”

 “엄마 심부름을 깜빡했어.”

 “야, 아직 3회도 안 끝났는데 벌써 가버리면 어떻게 해?”

 “미안. 담에 또 하자!” 

힘없이 돌아서서 걸어가는 세찬이의 뒤통수를 바라보며 동민이가 509호 상수에게 슬그머니 물었습니다.

 “저 자식, 갑자기 왜 저래? 야구라면 환장하면서.”

 “난 왜 그러는지 알 거 같아.”

 “뭔데?”

 “울 엄마가 그러는데, 세찬이 아버지가 없대.”

 “정말? 돌아가신 건가?”

 “글쎄 나도 몰라.” 


**


 209호에 태어난 민정이는 올해로 꽉 찬 4살이 되었습니다. 햇수로 따지면 5살이라는 말도 있지만, (*사람들의 나이 계산법을 아직도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어쨌든 민정이는 날이 갈수록 예뻐졌고, 하루가 다르게 귀여워졌습니다. 그 조그만 얼굴에 눈, 코, 입이 다 들어 있다는 것도 신기한데 민정이는 벌써부터 말도 똑 부러지게 잘합니다. 하얀 목련이 흐드러지게 피던 어느 봄날, 민정이는 엄마 손을 꼭 잡고 놀이터에 놀러 나왔습니다. 앙증맞은 민정이가 엄마와 소꿉장난을 하며 한껏 귀여움을 발산하고 있을 때, 한 아주머니가 105동 아파트 앞쪽으로 걸어오는 것이 보였습니다. 아주머니는 한동안 햇빛은 구경도 못한 것 같은 창백한 얼굴로, 가는 다리와 팔을 휘저으며 천천히 걸어왔습니다. 딱 봐도 105동 아파트에 사는 분은 아니었습니다. 아무래도 아주머니는 산책을 하시다가 105동 놀이터에  놓여있는 벤치를 보고 잠시 쉬어가려는 것 같습니다. 겨우겨우 위태롭게 걸어온 아주머니는 병약한 할머니처럼 조심스럽게 벤치에 앉습니다. 길고 깊은 한숨을 조심스럽게 내쉬던 아주머니는 엄마와 신나게 놀고 있는 민정이를 유독 유심히 지켜봅니다. 민정이는 사랑스러운 얼굴로 지금 엄마에게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결국, 사랑스러운 민정이의 말에 민정이 어머니는 민정이 손을 잡고 상가 슈퍼로 향했습니다. 양쪽 머리에 방울 사탕을 달고 뒤뚱뒤뚱 걸어가는 민정이의 뒤통수가 너무 귀여워서 웃음이 절로 납니다. 그런데 벤치에 조용히 앉아 있던 아주머니가 갑자기 울음을 터뜨립니다. 당황스러울 정도로 놀랐습니다. 아주머니의 갑작스러운 울음이 무엇 뜻하는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주머니의 야윈 어깨가 흐느낌으로 들썩일 때마다, 눈치 없는 봄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옵니다. 위로조차 할 수 없는 나는 뜻 모를 슬픔이 잦아지기를 기다리며, 아주머니의 쓸쓸한 뒷모습을 그저 가만히 보듬을 뿐입니다.  




**1983년 3월 민정이를 보고 울음을 터뜨린 수연 이야기**


 겨우내 집안에 틀어박혀 있던 수연은 따스한 봄 햇살 덕분에 외출할 용기를 얻었다. 집 밖을 나서자, 향긋한 꽃향기보다 매캐한 먼지 냄새가 먼저 났다. 그럼에도 수연은 뿌연 하늘사이로 쌓이는 봄 햇살을 받기 위해 아주 오랜만에 한참을 걷고 또 걸었다. 얼마를 걸었을까? 수연은 동네에서 조금 떨어진 낯선 아파트 단지 내에 자신이 와 있는 것을 발견했다. 너무 멀리 왔네. 후회보다 피곤함이 먼저 밀려왔다. 수연은 사방을 둘러보다 가장 가까워 보이는 벤치를 찾아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엄마, 엄마!”

 “왜?”

 “저기 저거 꼭 아이스크림 같다. 그지?”

 “하하하, 그러네. 바닐라 아이스크림.”

5살 정도 되었을까? 꼬마 숙녀가 머리 양쪽에 커다란 알사탕을 달고 엄마와 함께 소꿉놀이를 하고 있었다. 수연은 그 꼬마 숙녀가 쳐다보고 있던 나무를 함께 쳐다봤다. 하얀 목련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마른 나뭇가지 위에 탐스럽게 핀 목련이 꼬마 숙녀의 말처럼 바닐라 아이스크림처럼 보였다. 수연은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꼬마 숙녀의 상상력이 너무 귀엽고 대견했던 것이다.

 “우리 민정이 아이스크림 먹고 싶구나?”

 “음, 어떻게 알았어?”

 “하하, 엄마는 네 얼굴만 보면 다 알아. 그럼, 우리 마트에 갔다 올까?”

 “이야, 우리 엄마 최고!” 

그렇게 꼬마 숙녀는 엄마의 손을 잡고 동네 마트로 폴짝폴짝 걸어갔다. 꼬마 숙녀의 알사탕처럼 동그란 뒤통수를 바라보며 수연은 생각했다. 

‘소연이가 살아 있다면 지금쯤 저만큼 컸을까?’

소연이를 가슴에 묻고, 집으로 돌아오던 그날도 지금처럼 목련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하지만, 그날의 봄은 수연에게 봄이 아니었다. 아니, 그날 이후 수연에게 봄은 봄일 수 없었다. 그날 이후 수연은 집 안에 틀어박혀 2년을 보냈다. 그리고 오늘 2년 만에 집 밖으로 나와 산책을 했다. 어쩌면 수연은 오늘 봄을 느끼며 살아도 되는지 확인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안타깝게도 꼬마 숙녀의 귀여운 뒤통수를 바라보며 수연은 다시 무너졌다. 감당하기 힘든 상처를 가진 사람에게 아름다운 봄날도, 귀여운 꼬마의 뒤통수도, 잔인한 슬픔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엄마, 엄마!”

 “왜요, 공주님?”

 “너무너무 슬프다.”

 “갑자기 왜?”

 “아이스크림이 자꾸만 녹아서.”

하염없이 울다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귀여운 꼬마 숙녀가 다시 놀이터에 돌아와 있었다. 하지만 수연은 이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그 꼬마숙녀의 얼굴을 쳐다볼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수연은 탐스러운 하얀 목련만 쳐다볼 뿐이다. 흐드러진 하얀 목련은 꼬마 숙녀의 아이스크림처럼 툭툭 하얀 꽃잎을 떨어뜨리며 처참하게 녹아내린다. 수연에게도, 하얀 목련에게도 봄은 그래서 잔인한 계절이었다.




8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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