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아파트에게>
컬러 TV 시대가 시작되면서 방송 프로그램에도 큰 변화가 생겼습니다. 특히나 예전에 비해 외화시리즈가 많아졌습니다. 덕분에 나는 다양한 머리색과 눈동자 색을 가진 사람들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중에서도 나는 외계인의 침공을 다룬 ‘브이’와 인공지능 자동차와 함께하는 ‘전격 Z작전’처럼 현실세계와 많이 다른 차원의 세상 이야기를 좋아했습니다. 언젠가 나무의 일상도 이처럼 재밌게 만들어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헛된 기대도 해봅니다. 물론, 나무의 일상은 너무 지루해서 작품화될 확률이 거의 없겠지만 말입니다. 어쨌든, 이렇게 멋진 외화시리즈를 흑백텔레비전이 아닌 컬러 TV로 볼 수 있어서 너무 행복합니다. 만약, 이런 프로그램들을 흑백으로 봤다면? 주인공이 외국인인지, 외계인인지 구분하기 힘들었을 것 같습니다.
그런 외화시리즈 중에서 단연코 가장 좋아하는 프로그램은 ‘맥가이버’ 시리즈입니다.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벌써부터 인기가 아주 좋은 것 같습니다. ‘맥가이버‘라는 주인공은 엄청나게 똑똑해서 그 어떤 상황에서도 어려운 문제들을 척척 해결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또한, 그 재주로 나쁜 짓을 한 사람들에게 합당한 벌을 주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좋은 것은 맥가이버가 시작할 때 나오는 시그널 음악입니다. 그 음악을 들으면 왠지 모르게 내가 맥가이버가 된 것 같은 착각도 듭니다. 309호 쌍둥이 녀석들도 내 맘과 같았는지 다른 짓을 하다가도 맥가이버 시그널 음악만 들리면 TV 앞으로 앞 구르기를 하며 달려옵니다. 나도 가끔은 쌍둥이 녀석들처럼 앞 구르기라도 하고 싶지만, 뿌리가 땅속 깊숙이 박혀 있는지라 안타까울 뿐입니다.
나만큼은 아니겠지만, 105동 아파트에는 맥가이버를 좋아하는 소녀가 또 한 명 있습니다. 바로 602호에 사는 서연이입니다. 서연이가 조금 긴 단발머리를 나풀거리며 학교에서 돌아올 때쯤이면, 나도 모르게 설렙니다. 서연이가 오늘은 어떤 맥가이버 사진을 가지고 올지 기대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오는 서연이의 발걸음이 오늘은 왠지 모르게 무겁습니다. 맥가이버 사진을 구하지 못한 걸까요? 가까이서 보니 서연이의 표정은 더 심각합니다. 아니나 다를까, 두 볼이 빨개진 서연이가 놀이터 벤치에 털썩 앉더니 두 무릎을 올려 얼굴을 파묻은 채 울기 시작합니다. 어쩔 줄 몰라 당황하고 있는데, 뒤늦게 따라온 서연이 친구가 조용히 서연이 옆에 앉습니다. 그리고는 말없이 서연이 등을 토닥여줍니다. 무슨 일이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친구의 위로 덕분인지 서연이는 무릎에 파묻었던 고개를 들고 친구에게 울먹이며 얘기합니다.
“오늘 맥가이버 사진 새로 나온다고 해서 떡볶이도 안 사 먹고 가지고 있던 돈인데, 흑!”
“괜찮아. 그 언니들 몇 반인지 내가 다 알아 뒀어.”
“진짜?”
“3학년 2반이야. 알지? 학주가 담임인 거.”
“괜히 일렀다가 앞으로 더 괴롭히면?”
“누가 일렀는지 모르게 하면 돼. 당한 애들이 한둘이 아니니까. 그리고 학주가 담임인데 지들이 어쩔 거야?”
“그래, 나만 당한 게 아니니까.”
“당연하지. 그러니까 이제 기분 풀어.”
그제야 서연이가 중학생이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예전에는 중학생이 되면 모두들 교복을 입고 다녔는데, 교복 자율화가 되면서 중고등학생들도 모두 평상복을 입고 다니니 좀처럼 구분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서연이 또래 아이들은 교복보다 사복을 입은 것이 훨씬 더 보기 좋은 것 같습니다. 교복을 입던 아이들을 보다가 사복을 입은 아이들을 보니, 마치 흑백텔레비전을 보다가 컬러 TV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서연이는 기분이 좀 나아졌는지 친구에게 집에 가서 놀자고 말합니다. 어느새 서연이의 빨간 볼은 사르르 녹아내려 복숭아 빛으로 변했습니다. 친구와 팔짱을 끼고 집으로 걸어 들어가는 서연이의 뒷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봅니다. 그때, 누군가 내 몸뚱이에 몸을 기대는 것이 느껴집니다. 서연이 또래 남학생이 내 몸뚱이에 자신의 몸을 가린 채, 숨을 헐떡이며 서 있습니다. 누구지? 처음 보는 얼굴인데. 분명한 것은 그 남학생의 뜨거운 시선이 저만치 걸어가는 서연이에게 향해 있었다는 겁니다. 내게 몸을 완전히 기댄 남학생의 심장은 마치 모터를 달아 놓은 것처럼 빨리, 그리고 크게 뜀박질 치고 있습니다. 아마도 남학생은 내가 보기에도 예쁜 서연이를 무척 좋아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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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단지 곳곳에 걸린 플래카드들을 보니, 올 가을에는 국제적으로 큰 행사가 열리는 것 같습니다. 덕분에 며칠 전부터 아파트 단지가 무척이나 부산스럽습니다. 큰 행사 때문에 외국에서 손님들이 많이 찾아오니, 거리든 아파트든 단정해야 한다고 뉴스에서 본 것도 같습니다. 특히, 우리 아파트 단지는 국제적인 행사가 열리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아파트이기 때문에 더 부산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며칠 전에는 아파트 단지 내 소독을 한다고 일주일에 두 번이나 소독차가 다녀갔습니다. 덕분에 신이 난 것은 아이들뿐입니다. 아이들은 구름 방귀 같은 연기를 내뿜으며 달리는 자동차 뒤를 죽어라 쫓아다닙니다. 정작 나는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은데, 아이들은 도대체 뭐가 좋다고 저리 뛰어다니는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덕분에 내 몸 여기저기 달라붙어 있던 각종 진드기와 벌레들이 어느 정도 떨어져 나갔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사람들의 부산스러움이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아파트 정원수를 관리해야 한다는 명목 하에 며칠 전부터 아파트 정원수 가지치기를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아파트 입구에서부터 시작된 가지치기는 그 소리만으로도 나를 질리게 만들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일반적인 가위 치기 소리로 들리겠지만, 나무들에겐 끔찍한 비명으로 들리기 때문입니다.
아파트 정원수 중에서도 가장 멋대가리 없이 생긴 나는 다른 나무보다 훨씬 더 긴장할 수밖에 없습니다. 미적으로 아름답지 못하다는 것은 그래서 참 슬픈 겁니다. 팔다리가 잘리는 아픔을 겪더라도 예뻐지기만 한다면야 뭐가 문제겠습니까? 나 같은 나무는 이런 가지치기를 통해 아름다워지기는커녕 더 흉측해지기만 합니다. 머리카락을 자르러 미장원에 갔는데, 머리카락을 자를 때마다 팔다리 잘리는 고통을 느껴야 한다면 어떻겠습니까? 그런 고통을 감내하며 겨우 머리를 잘랐는데, 그 몰골이 그전보다 형편없는 수준이라면? 참혹하고 참담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이가 없는 것은 그런 일이 지금 내 앞에서 바로 일어나고 있다는 겁니다. 비명이 점점 더 가깝게 들립니다. 사람의 팔과 다리와도 같은 내 가지들이 잘려나갈 시간이 가까워졌다는 얘깁니다.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에 나무들의 진액 냄새가 풀풀 피어납니다. 사람으로 따지면, 피 비린내와도 같습니다. 눈이라도 있으면 울고 싶고, 입이라도 있으면 비명을 지르고 싶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울지도 못하고, 소리 지를 새도 없이 그렇게 끔찍한 일을 당하고 있습니다.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고요? 팔자 좋은 누군가가 뭘 모르고 하는 개소리입니다. 아픈 건 그냥 아픈 거고, 성숙해지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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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정말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잘려나간 가지들을 떠나보내고 남겨진 상처는 바람이 불 때마다 쓰리고 아립니다. 그 와중에 건진 것이 있다면 내 속살이 이렇게 하얀 줄 처음 알았다는 것뿐입니다. 내 주변에 있는 다른 나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어제의 참극을 이겨낸 나무들이 패잔병처럼 늘어져서 피비린내 같은 진액 냄새를 뿜어내고 있습니다. 어느새 쓰라린 오후 햇살도 길게 누울 자리를 만들고 있습니다. 게으른 오후 햇살이 만들어준 내 그림자 역시 아주 흉측하면서도 우스꽝스럽습니다. 그저 하루라도 상처들이 빨리 아물기를 바라며 버티고 있었는데, 그날 저녁 나는 더 끔찍한 소식을 들었습니다.
“아휴, 시내가 정말 깔끔해졌어요.”
“그러게요. 이런 행사가 자주자주 있으면 좋겠네요.”
“내후년엔 올림픽이니까, 더 대단하지 않을까요?”
“암요. 아시아가 아니라 전 세계 사람들이 온다니까.”
맙소사, 2년 후에는 지금보다 더 큰 행사를 하게 된다니! 이런 끔찍한 일을 또다시 반복해야 한다니! 원망스러운 마음에 괜히 가지치기에서 제외된 소나무에게 심통이 납니다. 저렇게 우아한 소나무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런 소나무가 너무 부럽고 질투나 미칠 지경입니다.
이런 내 기분과는 상관없이 오늘도 서연이는 학교 수업을 마치고 사뿐사뿐 집으로 돌아옵니다. 요즘 한껏 멋을 부리고 다니는지, 서연이 앞머리가 닭 벼슬처럼 높이 솟아 있습니다. 아마도 저런 머리스타일이 요즘 유행인가 봅니다. 희한합니다. 나는 아무리 봐도 예쁜 줄 모르겠는데, 요즘 사람들은 저런 머리가 예뻐 보인다니. 물론, 서연이는 그 어떤 머리를 해도 예쁘지만 말입니다.
“야, 김 서연!”
서연이가 놀이터 가까이 왔을 때 누군가 서연이 이름을 크게 불렀습니다. 서연이가 드라마 주인공처럼 천천히 뒤돌아봅니다. 한 남학생이 작고 예쁜 종이 가방을 들고 서 있습니다. 지난번 내 뒤에 숨어서 서연이를 홈쳐보던 그 녀석과 같은 녀석인지 아닌지 한참을 살펴봅니다. 분명, 다른 녀석입니다. 서연이를 불러 세운 남학생은 서연이와 짧은 대화를 나누더니, 그 종이가방을 서연이에게 던지듯 건넵니다. 서연이는 잠시 망설이는가 싶더니, 결국 그 종이가방을 받아 듭니다. 남학생은 서연이가 가방을 받자, 뒷걸음을 치며 저만치 달아납니다. 마치 못 볼 것을 본 사람처럼 그렇게 냅다 뛰어갑니다. 서연이가 뒤돌아 서 있었기 때문에 표정은 짐작할 순 없지만, 남학생에게 받은 가방을 살랑살랑 흔들며 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니 아마도 기분이 나쁘진 않은 모양입니다. 사람이든, 나무든, 정말 예쁘고 볼 일입니다. 그런 생각이 들자, 아물지 않은 상처가 또 쓰려옵니다.
9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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