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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경아 Aug 30. 2024

9화. 벙거지모자를 쓴 새댁

연재소설 <아파트에게>

 하얗게 드러났던 상처들이 나무껍질과 비슷한 색깔로 변해갈 무렵, 시끌벅적했던 그 대단한 행사도 끝이 났습니다. 여린 속살들은 어느새 단단해졌지만, 흉측한 상처들은 온몸에 화석처럼 남았습니다. 흉한 상처를 보듬은 나무들은 숨 돌릴 틈도 없이 겨울 준비를 하기 위해 지난 계절 굳건하게 지켜왔던 이파리들을 몽땅 떨어뜨려야 하는 시기를 맞이했습니다. 꽃을 피우는 것만큼 그 작업 역시 힘에 부치는 일이지만, 계절이 오고 가는 것처럼 이 또한 지나가리라 믿으며 그 힘든 시간들을 묵묵히 이겨냅니다. 단풍나무는 벌써부터 최선을 다해 빨간 옷으로 갈아입고 있습니다. 은행나무는 또 얼마나 힘을 썼는지 이파리들이 노랗게 변하고 있습니다. 이름도 모르고 볼품도 없고 매력도 없는 나는 그저 누렇게 변한 내 속마음을 이파리로 드러낼 뿐입니다. 그렇게 나무들이 겨울준비를 하느라 고군분투하고 있을 무렵, 105동 아파트에 미스터리한 일이 생겼습니다.


 701호 부부는 그냥 보기에도 아주 사이가 좋은 부부였습니다. 결혼한 지 4년이 넘어서 신혼부부라고 하기는 좀 이상했지만, 부부가 아파트를 드나들 때 보면 영락없이 사이좋은 신혼부부로 보입니다. 하지만, 그런 701호 새댁에게 남모를 고민이 하나 있었습니다. 결혼을 한지 벌써 몇 년이 지났지만, 민정이처럼 예쁜 아이가 아직 없기 때문입니다. 105동 아파트 통장님인 509호 상수 엄마의 말에 따르면 부부가 금슬이 너무 좋으면 아이가 생기지 않을 확률이 높다고 합니다. 물론, 근거가 전혀 없는 말입니다. 어쨌든 아파트 주민들이 다 알 만큼 아이가 없어 걱정이 많았던 701호 새댁이 얼마 전부터 이상한 벙거지 모자를 쓰고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하루도 빼놓지 않고 말입니다. 덕분에 궁금한 것이 많은 105동 주민들은 미스터리에 빠졌습니다.


 물론 701호 새댁에게 왜 그 이상한 벙거지 모자를 쓰고 다니는지 물어보면 간단한 문제입니다. 하지만, 105동 주민들은 차마 701호 새댁에게 그 이유를 물어볼 수가 없습니다. 여러 가지로 새댁에게 실례가 될 거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민들은 나름대로 여러 가지 추측을 해 봅니다. 그중에서 가장 수긍이 가는 추측은 701호 새댁이 그 무섭다는 암에 걸렸을 거라는 추측입니다. 꽤 많은 사람들이 그럴지도 모른다고 수긍했지만, 얼마 가지 않아 그 추측은 저절로 수그러들었습니다. 그런 모자를 쓰고 다니는 701호 새댁의 얼굴이 너무도 활기차고 행복해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쯤 되자 105동 주민들도, 나도 궁금해 미칠 지경이 되었습니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새댁의 이상한 모자 미스터리가 밝혀졌습니다. 덕분에 새삼 깨달았습니다. 때로는 무심한 위로의 말 한마디 보다, 배려 깊은 침묵이 한 사람을 더 든든하게 지켜 줄 수 있다는 것을.




**1986년 어느 가을 701호 새댁의 비밀**


 “축하드립니다. 임신입니다."

순간, 기쁨보다 울컥 눈물이 먼저 눈앞을 가렸다.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리던 아이가 우리에게 찾아온 것이다. 내 오랜 주치의였던 김 박사님의 얼굴에도 함박웃음이 가득했다. 남들보다 조금 늦은 결혼을 하고, 부모님의 걱정 속에 5년을 보냈다. 기쁨의 눈물보다 그간 겪어내야 했던 설움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나 자신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너무 울어서 김 박사님과 간호사 선생님들에게 미안할 정도였다.


 병실을 나서자마자 신랑에게 이 감격스러운 소식을 전했다. 전화였지만, 신랑의 목소리는 나처럼 떨리고 있었다. 겨우겨우 마음을 진정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세상은 빨갛고 노란 단풍들이 구석구석을 빈틈없이 아름답게 채우고 있었다. 병원에 오기 전에는 몰랐는데, 임신소식을 듣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모든 게 아름다워 보였다. 그렇게 나는 세상이 주는 모든 기쁨을 만끽하며 동네 마트에 도착했다. 기쁜 소식을 듣고 신나게 일을 하고 있을 남편을 위해 저녁 반찬거리를 사러 온 것이다. 두 손 가득 장을 보고 상가 마트를 나서는데, 상가 끝에 있는 미용실 간판이 보였다. 그 앞을 지나다가 나도 모르게 걸음이 멈췄다. 미용실 유리문에 쓰여 있는 문구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기 때문이다.

 ‘새치머리 염색합니다!’

그동안 막연히 걱정만 했던 일이 현실로 다가왔다. 사실 나는 큰 고민거리가 하나 있었다.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머리에 새치가 많다는 것이다. 아니, 많은 정도가 아니라 거의 반백에 가까웠다. 그래서 그동안 줄 곳 새치머리 염색을 해왔다. 결혼 전에는 머리를 밝은 톤으로 염색하는 것만으로 커버가 되었지만, 지금은 부모님들이 사용하는 흰머리 염색약을 써야만 했다. 물론, 그 사실은 그 누구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은 나의 치부 같은 것이 되었다.


 다른 누군가에게는 반백이 된 머리를 염색해야 한다는 것이 그리 큰 상처가 아닐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에게 검은 머리는 젊음과 여성성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항상 새치머리 염색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했다. 남편에게 청혼을 받자마자, 대답 대신 내 반백 머리에 대한 고백을 먼저 했을 정도였다. 다행히 남편은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웃어넘겼지만, 나는 아직도 내가 염색을 해야 하는 사람이라는 것이 부끄러웠다. 그래서 결혼을 한 후에도 열심히 염색을 했고, 남편에게 염색하는 모습을 한 번도 보여준 적이 없었다. 그게 여자로서 마지막 자존심 같은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때문에 지금 이 상황이 참으로 난감했다. 염색은 화학약품을 머리에 발라야 하기 때문에 임산부에게는 금해야 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누군가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어떻게 한 임신인데 고작 머리염색 때문에 고민을 하냐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내게는 이 일이 무척 중요한 일이었다. 염색을 하지 못해 반백이 된 채, 산발을 하고 다니는 내 모습을 상상하기조차 싫었다. 더구나 염색을 하다가 멈춘 머리는 그 어떤 모습보다 추할 것이다.


 어떻게든 이 난감하고 불편한 상황을 해결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임산부에게 완전히 안전한 염색 방법은 없었다. 물론, 이런 고민을 하고 있는 나 자신이 한심했다. 어렵게 찾아온 내 아이에게도 미안했다. 여자로서 가질 수 있는 마지막 자존심을 내려놔야 한다는 것은 그렇게 힘든 일이었다. 무엇보다 내 추한 모습을 고스란히 지켜보게 될 남편의 시선이 두려웠다. 세상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을 얻었지만, 결국, 나는 그 행복을 지키기 위해 정말 지키고 싶었던 내 마지막 자존심을 버려야 하는 것이다.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가을을 지배하던 단풍이 눈처럼 떨어지던 11월의 어느 날. 나는 미용실 거울 앞에 앉아 있었다. 친절한 미용실 원장님은 내게 다시 한번 물었다. 정말로 머리를 삭발해도 되냐고. 그랬다. 지금 나는 염색을 포기하는 대신 내 머리카락을 포기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누군가 이 이야기를 들으면 미친 짓이라 할지도 모르겠지만, 이 방법만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사실 남편은 오늘 아침까지도 내 삭발을 말렸지만, 끝내 나를 설득하지 못했다.  


이제 삭발을 하고 나면, 내 소중한 아가를 만날 때까지 나는 계속 모자를 쓰고 다닐 것이다. 머리카락을 잃겠지만, 그만큼 다양한 모자를 얻게 될 것이다. 미용실 원장님은 이미 배려 가득 담은 가위질을 시작했다. 서걱서걱 잘려 나가는 내 머리카락의 비명이 아득하게 들렸다. 괜찮았다. 정말 괜찮았다. 모자를 쓰고 낙엽이 서걱서걱 밟히는 거리를 걸어도 정말 괜찮을 것 같았다. 그렇게 하루가 가고, 또 1년이 가고, 또 다른 가을이 오면 나는 내 머리카락보다 수만 배는 더 소중한 내 아이의 건강한 미소를 만날 수 있을 테니까.




10화에서 계속...


#벙거지모자의비밀 #가을이오면 #연재소설 #아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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