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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경아 Sep 02. 2024

10화. 라일락 꽃향기 맡으며

연재소설 <아파트에게>

 209호에 사는 민정이가 올해 학교에 입학했습니다. 나는 아직도 그 사실이 믿기지가 않습니다. 꼬물꼬물 귀엽기만 했던 아기가 벌써 학생이 되었다니! 자기 덩치보다 큰 가방을 메고, 엄마와 함께 첫 등교를 하는 민정이를 보고 있자니 만감이 교차합니다. 평소에는 잘 몰랐는데, 민정이가 커가는 과정을 지켜보니 세월의 흐름이 선명하게 느껴집니다. 가슴팍에 개나리처럼 노란 이름표를 달고 민정이가 학교를 다니기 시작하자, 아파트 단지에도 노란 개나리가 활짝 피었습니다. 그렇게 계절은 변함없는 시간 속에서 머물다 가고 또 머물다 옵니다. 봄꽃의 퍼레이드가 아파트 단지를 한바탕 휩쓸고 지나가더니 어느새 녹음이 짙어지는 6월이 찾아왔습니다. 바쁜 출근 시간을 지나 시계 초침이 점심시간으로 달려갈 무렵, 오랜만에 아주 반가운 얼굴이 놀이터 벤치 앞에 나타났습니다. 바로 208호 아주머니 아들 현석이었습니다. 현석이는 요즘 208호 아저씨가 경영하는 공구 가게에서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매일 아침 208호 아저씨와 함께 출근을 합니다. 그런데, 오늘은 왜 현석이가 출근을 하지 않고 놀이터 벤치에 앉아 있는 걸까요?


 아직도 생각나는 몇 년 전 그날 208호 아주머니가 놓아둔 검은 가방을 메고 달아나던 현석이는 여기저기 도망을 다니다가 경찰에게 붙잡혔다고 합니다. 그 길로 현석이는 바로 군대에 끌려가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208호 아주머니는 현석이가 감옥에 가는 것보단 군대에 가는 게 나을 거라고 했지만, 503호 상수 어머니의 말로는 현석이가 끌려간 군대는 감옥보다 더 가혹한 곳이었습니다. 현석이가 군대에 끌려가고 난 뒤, 누구보다 걱정이 많았던 208호 아주머니는 좀처럼 집 밖을 나서는 일이 없었습니다. 208호 아저씨는 을지로에서 공구 장사를 하고 있기 때문에 아침저녁으로 드나들었지만, 208호 아주머니는 정말 하루 종일 꼼짝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105동 주민들은 감히 208호 아주머니의 안부조차 물을 수 없었습니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현석이는 다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문제는 정식으로 제대를 한 것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돌아온 탕자처럼 아파트 단지 내로 들어선 현석이는 형편없는 얼굴로 한쪽 다리를 절고 있었습니다. 물론, 다리를 절뚝거리며 들어서는 현석이를 가장 먼저 반긴 것은 208호 아주머니였습니다. 몇 개월 동안 도통 밖으로 나오지 않았던 아주머니는 현석이가 온다는 말에 한걸음에 아파트 105동 입구까지 달려 나왔습니다. 하지만 아주머니는 절뚝거리며 들어서는 현석이를 보자마자 그 자리에 주저앉았습니다. 현석이도 놀랐는지 주저앉은 208호 아주머니에게 절뚝거리며 달려갔습니다. 꿈에도 그리던 아들을 품에 안은 208호 아주머니는 애써 울음을 참으며 말했습니다.

 “아이고, 됐다. 이렇게 살아 돌아왔으면 그것으로 됐어.”

208호 아주머니는 현석이가 험한 군대생활을 하다가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에 그동안 집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던 겁니다. 그렇게 서로를 부둥켜안고 서럽게 우는 두 사람을 앞에 두고 208호 아저씨는 자꾸만 105동 아파트 꼭대기를 올려다봤습니다. 처음엔 아저씨가 왜 그럴까 궁금했는데 이제는 알 것도 같습니다. 208호 아저씨는 105동 아파트 꼭대기를 쳐다본 것이 아니라, 아저씨 눈에 고인 눈물을 들키고 싶지 않았던 겁니다.


 현석이가 놀이터 벤치에 앉아 멍하니 앉아있는 것을 알았는지 208호 아주머니도 놀이터 벤치로 나왔습니다. 놀이터 벤치에 나란히 앉아서도 아주머니는 현석이에게 왜 여기에 나와 있느냐고 묻지 않았습니다. 그저 사랑 가득한 눈빛으로 아들을 바라볼 뿐입니다.

 “아버지, 괜찮으실까요?”

 “걱정 마. 그 양반이 그래도 강단이 있는 사람이니까.”

 “저도 같이 갔어야 했는데.”

 “무슨 소리! 네가 가면 더 위험하지. 나이 드신 양반이니 오히려 괜찮을 거야.”

 “그래도 괜히 저 때문에.......”

 “꼭 너 때문만은 아니야. 자식 같은 애들이 바른말 좀 하겠다고 저렇게 들고일어났는데, 어른들이 모른 척하면 쓰나. 도울 수 있는 일은 도와야지.”

아무래도 시내에 또다시 큰일이 일어난 모양입니다. 며칠 전에 시내에서 큰 데모가 있었다는 뉴스를 얼핏 봤던 것 같은데, 아마도 208호 아저씨가 그 데모에 아들 대신 참석하신 모양입니다. 물론, 뉴스에서는 그 데모를 폭동이라고 칭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 일이 폭동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저렇게 착하고 좋으신 분들이 참여하는 일이라면, 분명 나쁜 일이 아닐 거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며칠 뒤, 208호 아저씨가 경찰서에 끌려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시위를 하다 도망치는 대학생들을 아저씨 가게에 잠시 숨겨 주었기 때문입니다. 208호 아주머니는 현석이 때처럼 세상을 다 잃은 것 같은 표정을 짓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아주머니 얼굴은 당당해 보였습니다. 때문인지 얼마 뒤 208호 아저씨는 초췌한 모습이었지만,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 208호 식구들의 노력 때문이었을까요? 얼마 뒤, 머리가 하얀 아저씨가 TV에 나타나 무슨 선언인가를 했습니다. 무슨 선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208호 현석이네 가족이 유독 기뻐하는 것을 보니 좋은 일인가 봅니다. 기뻐하던 208호 아주머니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오랜만에 외출도 했습니다. 그리고 몇 시간 뒤 아주머니는 커다란 박스를 이고 나타났습니다. 그 박스 안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시루떡이 한가득 들어 있었습니다. 이사를 온 것도 아닌데, 208호 아주머니는 뭐가 그리 좋으신지 집집마다 뜨끈뜨끈한 시루떡을 돌렸습니다. 105동 주민들은 그 떡의 의미가 정확히 무엇인지 알지 못했지만, 모두들 기쁜 맘으로 그 떡을 받아먹었습니다. 208호 아저씨와 현석이의 말로는 오늘 그 선언으로 세상이 조금은 좋아질 거라고 합니다. 세상이 얼마나 좋아질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105동 주민들은 208호 아주머니가 돌린 떡만큼은 행복해졌으면 좋겠습니다.


##


 이듬해 5월, 602호에 살던 서연이가 이사를 가게 되었습니다. 올해로 중학교 3학년이 된 서연이는 원래도 예뻤지만, 학년이 높아질수록 점점 더 예뻐지는 것 같았습니다. 덕분에 105동에 사는 같은 또래 남학생들은 서연이 때문에 종종 가슴앓이를 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서연이는 또래 남자아이들에게는 별로 관심이 없어 보였습니다. 맥가이버처럼 성숙하고 똑똑한 남자를 좋아하던 서연이는 이제 소방차라는 가수를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서연이의 책받침과 필통에 맥가이버가 사라지고 그 소방차 사진으로 도배되는 것을 보면 말입니다. 어쨌든, 맥가이버를 좋아하다가 지금은 소방차를 좋아하는 서연이가 이사 가는 것이 못내 아쉽습니다. 105동 남학생들도 그 소식을 듣고 적잖게 실망하는 눈치였습니다. 하지만, 대놓고 그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사춘기 소년 소녀들의 마음만큼 복잡하고 표현하기 어려운 것도 없으니까요.


 아쉬운 마음이 가득하던 5월의 어느 날, 낯선 남학생이 105동에 찾아왔습니다. 처음에는 그 남학생이 누군지 몰라 한참을 생각했는데, 남학생이 놀이터를 지나 벤치 바로 앞까지 걸어왔을 때 알았습니다. 그 남학생이 예전에 내게 몸을 기대며 서연이를 몰래 훔쳐보던 그 남학생이었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지 못했던 것은 그 남학생의 키가 훌쩍 자랐고, 남학생의 얼굴에 예전에 없던 붉은 여드름 자국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남학생이 누구인지 알고 나니, 어딘가 모르게 간질간질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남학생은 그날처럼 서연이를 보러 온 것일까요? 아니나 다를까 남학생이 벤치에 앉아 다리를 심하게 떨다가 105동 아파트 현관에서 서연이가 사뿐사뿐 걸어 나오는 것을 보자 벤치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서연이가 가까이 다가올수록 아파트 단지를 맴돌던 라일락 향이 더 아찔하게 짙어지는 것 같습니다. 남학생은 라일락 향에 취했는지, 갑자기 시선 둘 곳을 몰라 이리저리 방황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서연이는 웃고 싶지만, 왠지 웃으면 안 될 것 같은 새침한 얼굴로 남학생을 바라봅니다. 남학생은 서연이의 얼굴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고 깊은 한숨을 내쉽니다. 서연이가 놀이터에 들어설 때 까지도 남학생은 차마 고개도 들지 못합니다. 남학생의 발끝은 어디든 빨리 도망가고 싶은 모양입니다. 새침한 서연이도 부끄러운지 예쁜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자꾸만 귀 뒤로 쓸어 올립니다. 어느새 서연이의 얼굴에도 복숭아 빛이 돌기 시작합니다. 그래도 창백해 보이는 남학생보다 용기가 더 많은 서연이가 먼저 인사를 건넵니다.

 “안녕!”

 “어, 안녕!”

 “3반 반장 김 도윤 맞지?”

 “어, 맞아.”

 “근데, 무슨 일이야? 여기까지.”

 “어, 그게.......”

남학생은 대답 대신 주머니에서 네모난 물건 하나를 꺼내 서연이에게 내밀었습니다. 서연이는 깜짝 놀라며 그 물건을 받았습니다. 그 네모난 물건 표면에는 뜻 모를 글씨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네모난 물건은 손수 음악을 녹음한 카세트테이프였습니다. 테이프에 담긴 노래를 들을 수는 없었지만, 빼곡하게 적힌 글씨만 봐도 남학생이 얼마나 정성스레 그 테이프를 녹음했는지 알 것 같았습니다.

 “이걸 나한테 왜?”

 “전학 간다고 들었는데, 맞아?”

 “어, 내일모레.”

 “네가 좋아한다고 해서......”

 “우와, 소방차 노래도 있네?”

 “예전부터 주고 싶었는데......”

 “어? 근데 이건 뭐야?”

카세트테이프 케이스 사이로 삐져나온 쪽지를 발견한 서연이가 남학생에게 묻자, 남학생의 얼굴이 바로 터져버릴 폭탄처럼 빨갛게 변했습니다. 결국, 남학생은 화장실이 급한 사람처럼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더니 한마디를 겨우 내뱉습니다.

 “나중에. 꼭 나중에 읽어봐. 그럼, 안녕!”

서연이가 무어라 대답을 하기도 전에 남학생은 어느새 저만치 달아나 버립니다. 서연이는 피식피식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남학생이 완전히 보이지 않을 때까지 뒷모습을 지켜봅니다.


 602호 서연이네 이삿짐이 곤돌라를 통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정신없이 바쁜 어른들 사이에서, 서연이도 배낭을 메고 심부름을 하며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습니다. 그 와중에도 서연이 귀에는 이어폰이 꽂혀 있습니다. 요즘 아이들이 좋아하는 워크맨으로 음악을 듣고 있는 겁니다. 워크맨은 기존 오디오보다 획기적으로 작아서 걸어 다니면서 음악을 들을 수 있도록 만든 제품이라고 합니다. 그런 워크맨에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들으면 마치 다른 세상에 와 있는 것 같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문득, 지금 서연이가 듣고 있는 음악이 무엇인지 궁금해졌습니다. 짐작되는 바가 있기 때문에 더 궁금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때, 갑자기 뜨거운 누군가의 입김이 감지되었습니다. 오늘도 역시 서연이에게 카세트테이프를 줬던 그 남학생이었습니다. 짐작대로 남학생은 오늘도 내 몸뚱이에 기대어 서연이가 이어폰을 끼고 이사 준비하는 모습을 몰래 지켜봅니다. 맘 같아서는 남학생의 등을 떠밀어 서연이를 도와주라고 하고 싶었지만, 사정상 여의치가 않았습니다. 부끄럼 많은 남학생은 뜨거운 숨을 몰아쉬며 서연이네 이삿짐이 105동 아파트를 완전히 떠날 때까지 숨어 있었습니다. 아파트 단지가 조용해지고 나서야 남학생은 낮은 한숨을 길게 내쉬며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이어폰을 자신의 귀에 끼워 넣습니다. 나지막이 카세트테이프가 힘겹게 돌아가는 소리가 들립니다. 역시나 남학생이 무슨 음악을 듣고 있는지 알 길은 없었지만, 남학생의 이어폰 속에 안타까운 이별 음악이 흐르고 있으리라 짐작할 뿐입니다. 그날 이후 서연이와 그 남학생을 다시 볼 수는 없었지만, 라일락 꽃 향기가 코끝을 사로잡는 5월이 되면 어김없이 두 소년 소녀의 애틋한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꽃처럼 예쁘던 서연이도, 부끄럼 많던 그 남학생도, 라일락 향기를 문득 맡게 된다면 그날 그 설레던 순간들을 문득 떠올렸으면 좋겠습니다.


11화에서 계속......



#연재소설 #라일락 #라일락꽃향기 #라일락그늘아래서면 #아파트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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