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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경아 Sep 05. 2024

11화. 낭만에 대하여

연재소설 <아파트에게>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105동 주차장은 차를 주차해 놓는 곳이 아니라 그저 아스팔트 광장 같은 곳이었습니다. 간혹 아이들이 놀러 나와 술래잡기를 하거나 야구를 하기는 했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그냥 텅 비어 있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그래서 아파트 주차장을 왜 이렇게 쓸데없이 크게 만들어 놓았는지 궁금했습니다. 여름이 되면 아스팔트 바닥으로 만들어진 주차장은 숨이 턱턱 막히는 용광로처럼 변했고, 겨울이 되면 쌓인 눈이 제대로 녹지 않아 빙판이 되곤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텅 비었던 아파트 주차장이 잘 맞춰진 퍼즐처럼 자동차들이 빼곡히 채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집집마다 TV를 가지게 된 것처럼, 집집마다 자동차를 가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자동차들이 얼마나 늘어났는지 요즘은 밤이 아니라 낮에도 꽤 많은 자동차들이 주차장을 차지했습니다. 자동차를 가진 사람들이 퇴근하는 저녁 시간이면 오히려 자동차를 주차할 곳이 없어서 아파트 주차장을 빙빙 도는 차들도 생겨났습니다. 급기야 사람들은 주차장이 아니라 아파트 도로 옆에 차를 세우기도 했습니다. 덕분에 자동차에서 뿜어 나오는 매연은 언제나 우리 나무들이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처음 아파트가 만들어졌을 때만 해도 사람들은 이렇게 자동차가 많아질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모양입니다. 요즘은 202호를 제외한 거의 모든 집에 자동차가 한 대씩 있는 것 같습니다. 거기다 806호 대머리 아저씨네 집은 자동차를 2대나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는 점잖은 세단이었고, 하나는 짐을 싣고 다니는 봉고차였습니다. 봉고차는 주로 대머리 아저씨가 출근할 때 이용을 하고, 점잖은 세단은 가족들이 외출을 할 때 이용하는 것 같습니다. 806호 같은 집이 늘어나면서, 아파트 관리실에서는 형평성을 맞춘다는 이유로 자동차가 2대 이상 있는 집에서는 관리비에서 별도의 주차요금을 더 걷기로 했습니다. 그럼에도 자동차 수는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동차는 점점 더 커지고 점점 더 수가 늘어갔습니다.


 집집마다 자동차가 늘어나고, 자전거도 늘어나고, 각종 가전제품들도 늘어나면서 아파트라는 공간을 관리하는 아파트 경비 아저씨들의 역할과 책임도 늘어났습니다. 그 때문인지 얼마 전부터 교대로 근무하던 경비아저씨가 모두 바뀌었습니다. 물론 예전 아저씨들보다 훨씬 더 젊고 유능한 분들로 보입니다. 그중에서도 몸이 호리호리하고 입이 앞으로 많이 튀어나온 경비 아저씨는 부지런한 만큼 오지랖도 넓은 분이었습니다. 근무한 지 보름도 되지 않아 105동 아파트에 사는 모든 주민들의 호구조사를 끝내고, 주민들과 인사를 나누며 아는 체를 하는 걸 무척 즐기는 것처럼 보입니다. 조금 전 지나간 저 사람이 몇 호에 사는지 아이가 몇 명인지, 몇 학년인지, 식구가 몇인지, 어느 직장에 다니는지, 경비 아저씨는 모르는 게 없었습니다. 예전 경비아저씨들은 경비실에 앉아 라디오를 듣거나 꾸벅꾸벅 조는 일이 대부분이었는데, 새로 온 경비 아저씨는 부지런해서 그런지 그럴 틈이 없어 보입니다.

 “가을엔, 가을엔 떠나지 말아요, 차라리, 하얀 겨울에 떠나요.”

요즘 경비 아저씨가 자주 흥얼거리는 노래 한 구절입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 노래는 최백호라는 가수가 부른 노래라고 합니다. 처음에 TV에서 이 노래를 듣고, 경비아저씨가 부르던 노래와는 전혀 다른 노래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가사를 되짚어 보고 같은 노래라는 사실을 알고 얼마나 깜짝 놀랐는지 모릅니다. 항상 빈틈이 없고 완벽해 보이는 경비아저씨였지만, 노래를 부르는 것만큼은 인간적인 구석이 있는 모양입니다. 새로운 경비아저씨의 그런 인간적인 면을 잘 모르는 105동 아파트 주민들은 완벽주의자인 경비아저씨가 조금 부담스럽다는 반응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렇다고 차마 무어라 대놓고 불만을 표현하지는 못합니다. 경비 아저씨가 전에 아저씨들보다 훨씬 부지런하고, 맡은 바 책임을 다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얼마 뒤, 기존에 없었던 재활용 쓰레기 분리수거 제도가 우리 아파트에서 시범운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전까지 주민들은 재활용 쓰레기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모든 쓰레기를 하나의 쓰레기통, 혹은 쓰레기 봉지에 담아 버렸습니다. 하지만, 도시인구가 급격히 증가하면서 쓰레기 역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골칫거리가 되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나랏일을 하는 사람들은 재활용이 가능한 쓰레기와 그렇지 못한 쓰레기를 구분해서 버리도록 재활용 쓰레기 분리수거제도를 만든 것입니다. 모두에게 조금씩 귀찮은 일이었지만, 쾌적한 미래 환경을 위해서는 꼭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아파트 단지 사람들의 반응은 그리 좋지는 않아 보입니다. 때문에 분리수거가 하지 않고 여기저기 쓰레기 봉지를 투기하는 경우도 종종 발생했습니다. 이에 부지런하고 책임감 있는 105동 경비아저씨는 이를 간과하지 않고 맡은 바 소임을 다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거기 906호죠? 무단 투기된 쓰레기 봉지에 906호 우편물 봉투가 들어 있네요. 경비실에 있으니 이 쓰레기봉투 얼른 가져가서 제대로 버리세요.”

그랬습니다. 경비 아저씨는 몰래 버려진 쓰레기는 쓰레기 내용물을 뒤져서라도 무단 투기한 사람을 반드시 잡아냈습니다. 쓰레기차가 오는 날이면 105동 경비아저씨는 경비실 보다 분리수거함 앞에 서 보내는 시간이 더 많을 정도로 대단한 열정을 보였습니다.

 “저기요. 그 음료수 병은 거기에 버리면 안 돼요. 그리고 이 박스에 붙어 있는 비닐은 뜯어내고 따로 버리셔야죠.”

경비 아저씨의 잔소리는 하루 종일 멈추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105동 주민들은 감히 이의를 제기할 수도 없었습니다. 경비아저씨의 말이 틀린 말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비아저씨의 잔소리 덕분에 105동은 아파트 단지에서 가장 분리수거가 잘되는 동으로 선정이 되었습니다.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경비아저씨에게 걸리면 그 누구라도 예외가 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


 경비 아저씨가 재활용 쓰레기들과 씨름을 하는 동안, 제 키는 409호 거실 TV가 보일 정도로 자랐습니다. 덕분에 내가 볼 수 있는 TV도 하나 더 늘었습니다. 하지만, 추운 겨울이 오면 TV를 제대로 볼 수가 없습니다. 겨울이 되면 사람들이 베란다 문을 꽁꽁 닫고 커튼까지 치기 때문입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매일같이 놀이터 벤치로 모이던 사람들도 약속이나 한 것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겁니다. 덕분에 나는 겨울이 되면 세상과 사람들로부터 철저히 고립됩니다. 그래서 나는 겨울이 참으로 싫습니다. 겨울이라는 시간은 그저 추위를 이겨내는 시간이 아니라 고독과 외로움을 이겨내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겨울잠을 자는 동물들처럼 겨울 내내 잠이라도 잘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깨질 것 같이 추운 겨울 하늘에 먹구름까지 잔뜩 끼어 있습니다. 이렇게 우울하고 모진 날씨라면, 차라리 눈이라도 펑펑 내렸으면 좋겠습니다. 쏟아지는 눈을 쳐다보느라 간간이 고개를 드는 사람들의 얼굴이라도 한번 보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수피가 뜯겨나가는 고통이 느껴지는 봄이 찾아왔습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우울증에 걸릴 것 같은 겨울이 저만치 가버렸기 때문입니다. 두터운 커튼이 열리면서 다시 사람들의 다양한 일상이 봄처럼 찾아왔습니다. 겨우 몇 달이 지났을 뿐인데, TV 속 세상은 또 다른 세상이 되어 버린 것 같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많이 달라진 것은 대중가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발라드와 트로트가 일색을 이루던 가요계에‘서태지와 아이들’이라는 댄스그룹이 등장했기 때문입니다. 처음 들었던 그들의 음악은 가히 충격적이었습니다. 그들의 노래는 멜로디를 따라 부르는 노래 부분은 별로 없고, 빠른 말을 쉴 새 없이 주절거리는 부분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주절거림을 사람들은 랩이라고 불렀습니다. 어쨌든 그들의 등장은 가요계에 신선한 충격이 되었고, 그 신선한 충격은 가요계 판도를 완전히 바꿔버렸습니다. 제일 큰 변화는 가만히 서서 노래를 부르지 않고 춤을 추거나 랩을 하면서 노래를 부르다 보니 가수들은 뮤직비디오라는 것을 만들어서 노래를 홍보하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이제 가수들은 노래만 불러서는 살아남기 힘들어졌다는 얘깁니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발라드 노래가 더 좋습니다. 랩으로 하는 노래들은 좀처럼 가사를 알아듣기가 힘들어 가사를 음미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거기다 눈으로 듣는 음악은 금방 질리는 경향이 있지만, 귀로 듣는 음악은 들으면 들을수록 더 깊어지는 맛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빠르게 흘러가는 세월만큼 빠르게 변하고 그 변화를 아무런 저항 없이 받아 드립니다. 그런 면에서 나는 사람들이 아주 조금 부럽습니다.


 가끔 그런 생각도 합니다. 아파트 밖에서 지켜보는 105동 아파트 주민들의 삶은 TV 광고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행복해 보인다고. 사람들의 옷차림과 외모도 예전보다 화려해졌고, 사람들의 표정도 자신감이 넘치면서 밝아졌기 때문입니다. TV를 보듯 그들의 겉모습만 지켜보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한편으론 진심으로 궁금합니다. 보이는 것처럼 105동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정말로 늘 그렇게 즐겁고 행복한 걸까? 아니면, 내가 그들을 제대로 보지 못한 걸까?


 마냥 행복해 보이던 105동 아파트에 사는 개구쟁이 세찬이와 상수, 그리고 쌍둥이들은 어느새 고등학생이 되었습니다. 녀석들의 얼굴에는 어느새 거뭇한 수염과 함께 울긋불긋한 여드름이 보입니다. 이제와 아쉬운 것은 녀석들이 더 이상 아파트 놀이터에서 뛰어놀지 않는다는 겁니다. 녀석들은 공부할게 뭐 그리 많은지 매일 새벽에 나가서 늦은 밤이 돼서야 돌아옵니다. 아이들이 사라진 105동 놀이터가 오늘따라 무척 쓸쓸해 보입니다. 아이들이 자라 어른이 되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무척 설레는 일이지만, 또 한편으론 세월의 흔적을 있는 그대로 자각해야 하는 잔인한 일인 것 같습니다.


##


 요즘 들어 외부사람들이 아파트 단지 내를 산책하는 경우가 부쩍 늘어났습니다. 아마도 우리 아파트가 데이트 코스로 유명해진 모양입니다. 봄이면 황홀한 벚꽃 길이 만들어지고, 여름이면 울창한 플라타너스 나무 동굴이 생기고, 가을이면 개나리보다 눈부신 노란 은행나무 카펫이 저절로 깔리기 때문에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얼마 전부터는 자주 와서 눈에 익은 커플들도 생겨났습니다. 그중에는 결혼을 해서 이 아파트로 이사 온 커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사랑이 결혼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세상에는 이루어진 사랑만큼 이별도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천국이 있다면 지옥이 있듯이, 사랑이 있다면 이별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차피 정해진 시간 속에 사는 모든 존재들은 이별을 피할 수 없으니까요. 그저 그 이별의 시기가 빨리 다가오느냐 늦게 다가오느냐의 문제일 뿐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남녀 간의 사랑이 결혼으로 이어져야 사랑의 성공적인 결말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엇나간 인연을 결혼이란 결론으로 붙들고 사는 게 두 사람에게는 실패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 어쩌면 엇나간 인연을 놓아주는 게 아련하고 소중한 추억을 남길 수 있는 성공적인 기회일지도 모릅니다.


 그런 의미에서 내 기억 속에 누구보다 아련하게 남은 커플이 있습니다. 처음 그들이 눈에 들어온 것은 다른 커플들과 남다른 면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개 두 사람이 다정하게 손을 잡고 걷거나 이야기를 하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인데, 그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 커플은 다정하게 산책을 하다가도, 작은 말 한마디에 원수가 된 것처럼 과격하게 싸우는 커플이었기 때문입니다. 재밌는 것은 그들이 가장 치열하게 싸웠던 장소가 바로 105동 놀이터 앞 벤치였다는 겁니다. 싸우다 보니 벤치 앞에 오게 되는 것인지, 벤치 앞에 와서 싸우게 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그 커플은 마치 105동 앞 벤치가 자신들의 싸움터라도 되는 것 마냥 정말 열심히 싸웠습니다. 덕분에 나는 그들의 싸움을 아주 적나라하게 들여다볼 수 있었습니다. 신기한 것은 그들이 아무리 적나라하게 싸워도, 그들이 싸우는 이유를 정확히 알 수 없었다는 겁니다.

 “정말 지겹다. 우리 이제 그만하자!”

그들의 싸움은 항상 이런 말로 끝이 났습니다. 오늘도 이 신기한 커플은 이 말을 남기고 105동 앞 벤치를 각자 떠났습니다. 처음에는 그들이 정말로 헤어진 줄 알고 걱정하고 안타까워했습니다. 하지만, 봄이 지나 플라타너스 잎들이 무성 해지는 여름이 오면, 그들은 다시 나타났습니다.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또 그렇게 두 손을 꼭 잡고 아파트 단지를 거닐었습니다. 하지만, 105동 놀이터 벤치에 앉기만 하면 그들은 다시 맹렬하게 싸웠습니다. 덕분에 이제 나는 그들이 아무리 맹렬하게 싸워도 헤어질까 걱정하지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은행나무가 노란 옷으로 갈아입게 되면, 그들은 또 두 손을 꼭 잡고 이곳에 나타날 거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노란 은행나무 잎이 함박눈처럼 뚝뚝 떨어지던 어느 가을밤, 두 사람은 예상대로 다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분위기가 사뭇 달랐습니다. 두 사람이 예전처럼 손을 잡고 다정하게 걷거나, 벤치에 앞에서 싸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처음 만난 사람처럼, 벤치에 나란히 앉아 어색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제 두 사람은 서로 싸우지 않는 법을 깨우친 걸까요? 아니면, 더 이상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 걸까요?

 “택시 잡아 줄까?”

 “아냐, 괜찮아. 그럼 나 먼저 갈게.”

 “그래, 조심히 들어가.”

그렇게 여자는 남자를 홀로 벤치에 남겨두고 먼저 일어났습니다. 여자는 뒤도 한번 돌아보지 않고 곧장 앞으로만 또박또박 걸어갔습니다. 여자는 떠났지만, 남자는 한참 동안 벤치에 혼자 앉아 있었습니다. 여자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 때쯤, 남자도 벤치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여자가 걸어갔던 그 길을 따라 남자 역시 터벅터벅 걸어갔습니다. 안타깝게도 그날 이후, 그 남자와 여자는 두 번 다시 볼 수 없었습니다. 해가 바뀌고 계절이 여러 번 바뀌었지만, 그들의 비슷한 뒷모습도 구경할 수 없었습니다. 아마도 두 사람은 그날, 진짜로 이별을 한 것 같습니다. 물론, 그들이 사라진 후에도 아파트 가로수 길에는 데이트를 하다 싸우는 커플들이 종종 있었습니다. 그때마다 나는 너무도 덤덤하게 헤어졌던 그 두 사람이 떠오릅니다. 그리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그 두 사람은 더 이상 싸울 이유를 찾지 못해 헤어졌을지도 모르겠다고.  




**[ 1992년 11월 어느 가을 헤어지는 연인들을 위하여   ]**


“오랜만이다, 여기. 근데 일찍 왔네?”

“아냐, 나도 좀 전에 왔어.”

“뭐 타고 왔는데?”

“그냥 걸어서.”

“잘 지냈지?”

“나야 뭐, 언제나 똑같지. 너는?”

“나도 뭐.”

“실은, 네 전화받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더라.”

“왜?”

“너 시집간다는 줄 알고.”

“하하. 말도 안 돼.”

“그냥, 넌 그렇게 갈 수도 있을 거 같아서.”


“참, 나 취직했어. 지난달에.”

“우와, 잘 됐네. 축하해!”

“축하할 일 까지는 아니고.”

“어쨌든, 잘 된 거잖아.”

“지금으로선 그렇지. 가고 싶었던 곳은 아니지만.”

“그래도 취직한 게 어디야.”

“그런가?”

“응, 그런 거야.”

“......”

“......”

“왜?”

“아냐, 먼저 말해.”

“아냐, 할 말 없어. 네가 먼저 말해.”

“그냥, 네 얼굴 한번 보고 싶었다고.”

“그래. 내가 좀 보고 싶은 얼굴이긴 하지.”

“여전하네. 너는.”

“그럼, 여전해야지.”

“근데, 너 요즘 다이어트하냐?”

“왜? 그래 보여?”

“응. 근데, 하지 마라. 아파 보인다.”


“우리, 3개월 만에 만난 건가?”

“아마도?”

“미안해. 괜히 바쁜 사람 불러내서 실없는 소리만 했네.”

“아니야. 오랜만에 네 얼굴 봐서 좋았어.”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근데, 그거 알아?”

“뭐?”

“예전엔 항상 내가 먼저 연락했던 거.”

“그랬었나?”

“응, 그랬어.”

“내가 잘못한 게 많아서 그럴 거야.”

“괜찮아. 이젠 뭐.”

“그렇지. 이젠 뭐.”

“밥은 먹었어?”

“어, 먹었지. 너는?”

“나도 대충. 근데, 내가 전에 줬던 비타민은 다 먹었어?”

“아니. 조금 남았어.”

“빼먹지 말고 잘 먹어. 넌 담배 피우는 사람이라 그런 거 먹어 줘야 해.”

“참, 나 그 노트북 샀어.”

“그때 그거? 좋겠네.”

“어. 무지 좋아.”


“근데, 하늘 보니까 비 올 것 같다. 그지?”

“그러게. 우산 가지고 왔어?”

“아니. 너는?”

“나도 없어.”

“그럼, 이만 일어날까? 비 내리기 전에.”

“그래, 그래야지.”

“근데, 뭐 타고 갈 거야?”

“택시 타고 갈 거야.”

“너 원래 택시 잘 안타잖아?”

“오늘은 택시가 타고 싶네.”

“올 때 걸어와서 그런 가?”

“응, 그런 가봐.”

“택시 잡아 줄까?”

“괜찮아. 그럼, 나 먼저 갈게.”

“그래, 조심히 들어가.”


그것이 우리의 마지막 이별이었다. 지난 십 년 동안 헤어짐과 만남을 지겹게 반복했던 우리 두 사람이었다. 그때마다 우리는 한 번도 눈물 없이, 싸움 없이 헤어진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랬기에 우리는 다시 만났고, 이별했고, 또다시 사랑했다. 그런데 정작 우리가 헤어진 오늘은 너무도 덤덤했다. 너무도 덤덤해서 그게 이별이었는지도 몰랐다. 다 타버린 양초처럼 그렇게 우리 두 사람의 이별은 조용히 사그라졌다. 어쩌면 진짜 이별은 더 이상 타 오를 것이 없을 때 찾아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지금 나는 그때, 그 시절이 문득문득 그립다. 그때의 우리, 아니 그때의 시간들이. 더 솔직히 말하면 정확히 무엇이 그리운지 모를 정도로 모든 게 그립기만 했다. 아낌없이 사랑했던 그였는지, 사랑할 수 있던 그 순간의 나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지금의 나는 그때처럼 누군가를 사랑하고, 미워하고, 아파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때가, 그 순간들이 이토록 그리운지도 모르겠다. 사랑이 이별보다 아파도, 이별이 사랑보다 슬퍼도, 그 어느 것도 할 수 없는 지금의 나는 그렇게 메마른 가슴을 안고, 지나간 순간들을 그리워하고 있다.




 그림자가 뉘엿뉘엿 바닥에 길게 깔릴 무렵, 벌써 고3이 된 세찬이가 아주 오랜만에 105동 놀이터 벤치에 앉아 있습니다. 세찬이는 교복만 입지 않았다면 어른이라고 해도 믿을 만큼 키가 크고 의젓한 모습입니다. 벤치에 앉아 있던 세찬이가 커다란 가방에서 스케치북을 꺼내더니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사실 놀랐습니다. 세찬이가 저만치 놓여 있는 쓰레기 분리수거함을 꽤 근사하게 그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세찬이는 그림 그리는 사람이 되고 싶은 모양입니다. 작년부터 세찬이가 스케치북을 가지고 다니는 것을 보고 짐작만 했었는데, 오늘 보니 그림 실력이 상당합니다. 내 숫자 선생님이었던 꼬마 세찬이가 이만큼 자라 이렇게 멋진 그림을 그리게 되다니, 새삼 기특하고 뿌듯합니다.


 해가 꼴딱 넘어가더니 어느새 사방에 어둠이 먼지처럼 내려앉습니다. 그럼에도 세찬이는 그림 그리는 것을 멈추지 않습니다. 보름달처럼 둥근 수은 가로등이 부끄러운 소녀의 볼처럼 발갛게 달아오르고 있습니다. 사실, 나는 하루 중에 지금 이 시간을 참 좋아합니다. 어둠이 내리고 수은 가로등이 서서히 밝아질 무렵이면, 마치 밤의 여왕이 마법의 가루를  뿌리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그림 그리는 세찬이 덕분에 오늘 밤은 조금 더 낭만적인 밤이 될 것 같습니다. 세찬이가 어느 정도 그림을 완성했을 무렵, 어둑어둑한 주차장 입구에 세찬이 어머니 모습이 보입니다. 세찬이 어머니는 벤치에 앉아 있는 세찬이를 발견하고, 한 걸음에 달려옵니다.

 “세찬아!”

 “뭐 하러 뛰어 와. 힘들게.”

 “열쇠, 정말 못 찾았어?”

 “응, 아무리 찾아도 없네.”

 “어디서 잃어버렸는데?”

 “그걸 모르겠어.”

 “얼른 들어가서 저녁 먹자. 엄마가 양념불고기 사 왔어.”

세찬이와 세찬이 어머니가 아파트 현관으로 들어서는데, 현관 앞에 105동 통장 아주머니의 노한 얼굴이 불쑥 나타납니다. 그 뒤로 105동에 사는 아주머니 몇이 따라붙습니다. 어디선가 비밀 모의를 하다 나온 사람들처럼 비장한 얼굴입니다. 세찬이와 세찬이 어머니는 목례만 하고 바로 아파트로 들어갑니다. 결연한 의지가 보이는 아주머니들은 경비실을 에워싸더니, 통장 아주머니가 대표로 경비아저씨를 찾습니다. 아주머니들 중에는 503호 상수 어머니의 상기된 얼굴도 얼핏 보입니다.


 “경비 아저씨! 잠깐만 나와 보세요!”

 “무슨 일이 신가요?”

 “이걸 좀 먼저 보고 말씀하시죠?”

 “아니, 이게 왜?”

 “이거 정말 너무하신 거 아니에요? 아무리 우리가 버린 옷이라고 해도 아저씨가 함부로 가져가시면 안 되는 거잖아요?”

 “아, 그게.......”

 “설마, 이거 모아두었다가 어디 가서 파시는 거 아니에요?”

105동 통장 아주머니의 속사포 같은 항의에 퇴근을 하던 105동 주민들도 하나둘씩 경비실 앞으로 모여듭니다. 아주머니의 말인즉, 105동 경비 아저씨가 주민들이 재활용 수거함에 버려둔 옷들을 임의로 모아 둔 것을 청소 아주머니의 제보로 알게 되었다는 겁니다. 어쩌면 평소 경비아저씨에게 온갖 잔소리를 듣던 105동 아주머니들의 불만이 이런 식으로 표출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상한 것은 경비아저씨의 태도였습니다. 평소 하고 싶은 말을 거침없이 하던 경비 아저씨가 오늘따라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통장 아주머니를 비롯한 아주머니들의 원성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경비아저씨에게 그럴싸한 변명을 듣지 못한 105동 아주머니들은 다음날 아침에도 결연히 모여 아파트 관리소장을 찾아갔습니다. 이러다가 정말 경비아저씨에게 무슨 일이 생길 것만 같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저희는 그런 줄도 모르고.......”

아파트 관리소장을 만나고 돌아온 105동 아주머니들은 다음 날 경비실에 모여 경비아저씨에게 이렇게 사과했습니다. 알고 보니 경비아저씨는 관리사무소에 양해를 구하고 버려진 의류와 신발을 따로 모아 두었다가 직접 세탁해서 가까운 고아원이나 노인정에 보내는 일을 하고 계셨던 겁니다. 그런 사실을 전혀 몰랐던 통장 아주머니와 아파트 주민들은 경비 아저씨가 의류와 신발을 빼돌린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오지랖 넓고 잔소리하기 좋아했던 원칙주의자였지만, 105동 경비아저씨는 누구보다 따뜻한 마음을 가진 분이었습니다. 그런 소동 아닌 소동이 일어난 후, 아파트 관리사무소에서는 각 동에 의류 분리수거함을 따로 만들어 경비아저씨가 하던 방식대로 따로 모아두었다가 가까운 고아원과 노인정에 보내는 일을 공식적으로 시작했습니다. 경비아저씨가 많이 놀라셨을 테지만, 어쨌든 마무리는 참으로 훈훈하게 끝나서 다행입니다. 미안한 마음에 며칠째 경비아저씨 눈치만 보던 통장 아주머니가 오늘은 불쑥 나타나 카세트테이프 하나를 내밀었습니다. 경비아저씨는 기분 좋은 표정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통장 아주머니도 부끄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그날 이후, 경비실에서는 하루 종일 최백호 노래가 흘러나왔습니다.

“이제와 새삼 이 나이에, 시련의 달콤함이야 있겠냐마는.......”

여전히 경비아저씨의 노래는 원곡과 많이 달랐지만, 마음 깊이 파고드는 도라지 위스키 같은 가사 덕분에 어느새 나도 최백호의 열렬한 팬이 되어버렸습니다.


12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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