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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경아 Sep 09. 2024

12화. 편의점 달팽이

연재소설 <아파트>

 오늘은 조금 특별한 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파트 단지가 생겨 난지 올해로 딱 20년이 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인지 아파트 관리소에서는 20년이 된 아파트 전체 외벽에 도색작업을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니까 20년 만에 아파트가 새 옷으로 갈아입게 된 것입니다. 처음 이곳에 끌려와 105동 아파트를 처음 봤을 때, 그 당당한 위압감에 기가 눌렸던 기억이 납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나는 점점 키가 크고 덩치가 커졌지만, 위풍당당했던 아파트는 점점 낡고 초라해져 갔습니다. 빈틈 하나 없어 보이던 아파트 외벽 여기저기에 페인트가 벗겨지고, 베란다 새시에 녹이 슬어 보기 흉한 녹물 자국들이 여기저기 흉터처럼 남기도 했습니다. 아파트 바로 옆에 서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 누구보다 변해가는 아파트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지켜볼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나보다 키가 크고 덩치가 큰 아파트를 견제하느라 신경을 곤두세우기도 했었지만,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아파트를 보고 있자니 측은한 생각까지 듭니다. 부디, 새로운 옷을 입고 아파트가 예전의 멋진 모습으로 돌아오기를 바랍니다. 그런 바람과는 상관없이 아파트 외벽을 도색하는 일은 사람들이 옷을 갈아입는 것처럼 간단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먼저 아파트 구석구석에 들떠 있는 페인트 껍질을 칼로 긁어내고, 여기저기 실금이 난 외벽에 방수처리 약품을 발라주는 사전 작업만 해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런 작업들을 하기 위해 인부들은 끈 하나와 널빤지에만 몸을 의지해 작업을 해야 했는데, 그들은 마치 곡예사처럼 아파트 여기저기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곰팡이처럼 피어난 외벽 상처들을 하나씩 지워갔습니다. 대단하단 생각과 함께 그 아찔한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가지가 덜덜 떨리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809호 아주머니, 베란다 문 좀 닫아 주세요!”

다음날 아침, 경비아저씨가 아파트 구석구석을 단속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도색작업이 끝난 103동은 예쁘장한 옷을 입고 새치름하게 서 있습니다. 흉물스러웠던 아파트가 하루 만에 저렇게 예쁘게 단장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마냥 신기했습니다. 나 같은 나무들은 적어도 한 계절을 보내야 옷을 갈아입을 수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아이고, 냄새!”

경비아저씨의 잔소리에도 베란다 창문을 닫지 않았던 809호 아주머니가 페인트칠을 시작하자마자 바로 베란다 창문을 닫았습니다. 고약한 페인트 냄새 때문입니다. 세찬이가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페인트칠이 마냥 즐겁고 신기한 일인 줄 알았는데, 페인트에서 이렇게 지독한 냄새가 날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뿐만이 아닙니다. 105동 외벽에 페인트칠을 한다는 이유로, 아파트 주변에 서 있던 일부 나무들은 가지치기까지 당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습니다. 모욕적인 가지치기를 당하고, 새똥처럼 뚝뚝 떨어지는 페인트 덕분에 내 이파리들은 아파트 외벽과 같은 색깔로 변하기도 했습니다. 무언가를 아름답게 만드는 일은 주변의 말 못 할 희생을 필요로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안타까운 희생자들을 남기고 105동 아파트는 무사히 도색 작업을 마쳤습니다. 그날 밤 내내 지독한 페인트 냄새에 시달렸지만, 다음 날 아침 햇살에 비친 105동 아파트의 말끔한 모습을 보니 그래도 참을만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게 모든 것이 깔끔하게 끝났다고 생각했을 무렵, 도색작업을 했던 분들이 페인트 통을 여러 개 들고 다시 105동 앞에 나타났습니다. 어제와 같은 작업을 다시 하게 되는 건 아닌지 잠시 긴장했는데, 다행히 도색 공들은 놀이터로 향했습니다. 아마도 놀이터 놀이기구와 벤치에 페인트칠을 하려는 것 같습니다. 예상대로 도색 공들은 그림 그리는 화가처럼 놀이기구와 벤치 위에 페인트를 거침없이 칠하기 시작합니다. 시간이 갈수록 선명하게 예뻐지는 놀이기구들을 확인하는 일은 무척 재미있는 일이었지만, 도색공들의 마스크를 뺏고 싶을 만큼 숨이 막히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끝날 것 같지 않았던 인고의 시간을 지나, 105동 공중전화박스에 정신이 번쩍 들 것 같은 빨간색이 입혀지는 것을 마지막으로 도색작업은 모두 끝났습니다. 물론 페인트가 다 마를 때까지 안심할 수는 없습니다. 누군가 예쁘게 칠한 페인트를 망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도색 공들은 도색을 마친 벤치와 놀이터 여기저기에 사용을 금지한다는 종이를 붙여두었지만, 사람들은 개의치 않았습니다. 페인트 냄새가 그렇게 나는데도 불구하고, 페인트를 여기저기에 묻히는 실수를 반복했기 때문입니다. 105동 앞 공중전화를 지나던 107동 아저씨는 삐삐가 울렸다는 이유로 방금 페인트칠을 했던 공중전화박스로 뛰어 들어가 회색 양복 끄트머리를 빨갛게 물들이기도 했습니다.


##


 페인트 냄새는 일주일 정도 지나고 나서야, 겨우 가셨습니다. 어제 내린 시원한 소낙비 때문인 것도 같습니다. 비가 내리고 난 다음 날이라서 그런 걸까요? 오늘은 왠지 기분도 상쾌해지는 것도 같습니다. 무엇보다 오늘은 208호 현석이가 장가를 가는 날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현석이의 절뚝거리는 다리 때문에 맘고생이 많았던 208호 아주머니와 아저씨의 얼굴에도 오늘만큼은 환한 웃음꽃이 피었습니다. 현석이의 사랑스러운 신부는 208호 아저씨 가게에서 5년 동안 일했던 경리 아가씨라고 합니다. 사실, 나는 208호 아주머니 아저씨보다 먼저 현석이의 결혼을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현석이가 참하고 다부진 아가씨와 종종 놀이터 벤치에 앉아 이야기 나누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사람 좋은 208호 식구들에게 경사스러운 일이 생겨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208호 식구들은 아침 일찍 집을 나섰고, 209호 민정이네, 503호 상수네, 그리고 202호 세찬이네 식구들도 오랜만에 멀끔하게 차려입고 집을 나섭니다. 현석이 결혼식을 축하해 주러 가는 모양입니다. 대학생이 된 세찬이와 상수는 멀끔하게 정장을 차려입으니 갓 입사한 신입사원 같은 느낌이 납니다. 재수학원에 다니며 삼수를 하고 있는 쌍둥이들은 늦잠을 잤는지 좀처럼 외출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습니다. 궁금한 마음에 309호 베란다를 들여다보니, 쌍둥이들은 지금 TV를 보며 사이좋게 라면을 끓여 먹고 있습니다. 항상 장난기가 가득했던 녀석들이었는데, 오늘은 왠지 어깨가 축 처져 있는 것 같아 보입니다. 삼수라는 것은 천하의 장난꾸러기들도 저렇게 풀 죽어 보이게 만드나 봅니다.  


##


 한동안 아무 일도 일어날 것 같지 않았던 105동 아파트가 요즘 이상하게 들썩이고 있습니다. 우선, 105동 아파트 주민들의 이사가 부쩍 늘었습니다. 105동뿐만이 아닙니다. 아파트 단지 전체적으로 그런 것 같습니다. 세상 밖에서 내가 모르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503호 상수 어머니가 사랑방 같은 105동 벤치 앞에서 주민들과 하소연하는 얘기를 듣고 나니 더욱 그렇습니다.

 “에고, 우리가 그동안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데 어떻게 하루아침에 나라가 망할 수가 있어요?”

 “도대체 윗분들은 뭘 한 건지. 대기업들도 뻥뻥 쓰러져 나가고 있다면서요?”

 “이렇게 가만있을게 아니라, 우리라도 금 모으기 운동에 참여해야 하는 거 아닐까요?”

얼마 전부터 뉴스에서 IMF라는 단어가 자주 나오기는 했지만, 그게 나라가 망했다는 소리인 줄은 몰랐습니다. 누군가 자세히 설명해 주진 않았지만, 나는 대충 지금의 상황을 짐작할 뿐입니다. 도대체 무슨 일을 어떻게 하면 그렇게 빚을 많이 질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이 사는 세상은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20년 넘게 인간들과 함께 살았다 해도 햇빛과 땅, 그리고 물만 있으면 살 수 있는 나무들이 인간세상을 온전히 이해하기엔 한계가 있나 봅니다. 물론 그동안 사람들의 세상을 지켜본 바가 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이해는 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가지면 가질수록 더 부족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저 답답하기만 합니다. 도대체 사람들은 얼마를 더 가져야 만족할 수 있을까요?


 어쨌든 IMF덕분에 105동 아파트 주민들의 일상도 많은 부분 달라졌습니다. 오랫동안 105동에 살았던 주민들이 이사를 가게 되었고, 새로운 입주민들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새로 이사를 들어온 사람들은 예전처럼 이웃주민들에게 살갑게 인사를 나누거나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프라이버시를 존중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이제 사람들은 더 이상 옆집에 누가 사는지에 대해 알고 싶지 않은 것 같습니다. 기존에 살고 있던 주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과적으로 105동 주민들의 친목을 도모했던 반상회 참석률도 형편없이 떨어졌습니다. 그 때문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오랫동안 불문율처럼 지켜왔던 아파트 반상회는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습니다. 이런 안타까운 현상은 105동 아파트 터줏대감 208호 식구들이 이사를 가면서 더 심하게 느껴졌습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의 형편이 어려워지면서 을지로 3가에서 공구가게를 하던 208호 아저씨도 어려워진 겁니다. 결국 208호 아저씨는 가게와 집을 정리하고, 외곽 신도시 쪽으로 이사를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208호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이사를 가던 날, 209호 민정이 엄마는 하루 종일 눈물을 흘렸습니다. 아파트 입주 초기부터 옆집에 살면서 정을 나누고 민정이가 태어나는 날도 함께해 준 208호 아주머니와 헤어지는 것이 못내 아쉬웠던 겁니다.


 아파트 주민들의 변화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매일 아침 전쟁을 하듯 직장으로 출근하던 가장들이 갈 곳을 잃고 아파트 단지 여기저기를 배회하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덕분에 105동 아파트 주민들의 사랑방 역할을 했던 놀이터 벤치 역시 출근을 하지 못하고, 하루를 버텨 내야 하는 가장들의 안식처가 되었습니다. 안타깝게도 그런 가장들 중에는 209호 민정이 아버지도 있었습니다. 민정이는 벌써 고등학교 3학년이 되었고, 민정이 동생도 중학생이 되었기 때문에 민정이 아버지의 한숨은 더 깊고 무거웠습니다. 오늘도 민정이 아버지는 아침부터 아파트 단지를 한 바퀴 돌더니, 105동 놀이터 앞 벤치에 자리를 잡고 앉았습니다. 민정이 아버지는 그곳에서 몇 번은 읽었을 것 같은 신문을 읽고 또 읽습니다. 그렇게 민정이 아버지는 하루의 반나절을 놀이터 벤치에서 보냅니다. 어느 날엔가는 민정이 어머니가 베란다 창문으로 민정이 아버지가 우두커니 앉아 있는 모습을 보고 눈물을 흘린 적도 있습니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민정이 아버지는 다시 출근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예전처럼 멋진 양복을 입고 승용차를 타지는 않았지만, 다시 출근하는 민정이 아버지의 뒷모습은 누구보다 행복해 보였습니다. 뒷모습만 보고 그걸 어떻게 아냐고요? 글쎄요.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그냥 그런 능력이 생겼습니다. 어쩌면 항상 벤치 뒤에 서 있는 관계로 사람들의 뒷모습을 많이 봤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의 뒷모습은 생각보다 많은 것을 알려줍니다. 아니, 어쩌면 사람들의 뒷모습은 앞모습보다 더 정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 사람이 함께 있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의 기분은 물론 그 사람들의 관계, 혹은 관계의 깊이까지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사람들의 앞모습보다 뒷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더 편한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사람들의 뒷모습을 지켜보는 일이 마냥 좋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의 뒷모습에는 언제나 그들만의 외로움과 쓸쓸함이 묻어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어떤 사람의 진심을 알고 싶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그 사람의 뒷모습을 지켜보라고 말해 주고 싶습니다. 사람의 뒷모습은 절대로 거짓말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


 105동에 새로 이사 온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사람들과 상관없이 그들의 얼굴을 익히고 신상을 파악하는 일에 재미를 붙이고 있습니다. 하루 종일 아파트 옆에 우두커니 서 있는 일은 지루한 일이지만, 오가는 사람들의 단편적인 모습과 스치는 말 몇 가지를 가지고 그 사람 신상을 추측해 보는 일은 참으로 흥미진진한 일입니다. 또한 그들을 통해 나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습니다. 특히 요즘 들어 부쩍 느끼는 세상의 변화는 가족의 형태가 무척 다양해지고 있다는 겁니다. 예전에는 부부를 중심으로 가족이 구성되어 그 아이들의 숫자로 가족의 구성원이 달라지는 경우가 일반적이었지만, 요즘은 여러 가지 이유로 다양한 형태의 가족 혹은 가구가 생겨나고 있습니다. 세상이 변했기 때문인지 사람들이 변했기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분명한 것은 사람들도 세상도 변하고 있다는 겁니다.


 현석이네 식구들이 이사를 가고, 208호에는 50대 후반으로 보이는 중년부부가 새로 이사 왔습니다. 부부의 아이들은 이미 모두 독립해 나가고, 두 부부는 고령의 할머니를 모시고 사는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그 집에 나이 드신 할머니가 계시다는 것을 몰랐는데, 어느 날엔가 베란다 창문을 열고 할머니가 소리치는 것을 보고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 살려! 이 나쁜 년이 나를 여기에 가둬 놓고 죽이려고 한다!”

처음에는 할머니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할머니가 정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요구르트 아주머니 말에 의하면, 치매가 심한 편이라 그 며느리가 지금 엄청나게 고생을 하고 있다는 겁니다. 할머니는 70대 후반임에도 불구하고 힘이 너무 좋아서 꼬챙이처럼 마른 며느리가 감당하기 어렵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어쨌든 그날 이후로 208호 베란다 문은 굳게 닫혔고, 두꺼운 커튼까지 쳐져서 좀처럼 집안 사정을 파악하기 힘들었습니다.


 109호에는 젊은 아가씨 한 명이 혼자 이사 왔습니다. 105동 아파트에 이런 일은 처음이라 주민들은 물론, 나조차도 109호 아가씨의 정체에 대해 무척 궁금했습니다. 하지만, 109호 아가씨는 가족도 없고 말도 별로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어떤 사연이 있는지 좀처럼 파악하기 어려웠습니다. 109호 아가씨는 직장 생활을 하느라 평일에는 주민들과 어울릴 시간이 없었고, 주말에도 집안에서 꼼짝하지 않아서 더욱 그랬습니다. 아무래도 109호 아가씨는 105동 아파트에 살지만, 살지 않는 사람이 된 것 같습니다.


 403호에는 홀어머니와 함께 사는 아들 3형제가 이사 왔습니다. 눈치를 보아하니 얼마 전 3형제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 같습니다. 403호 큰 아들은 졸업을 앞두고 직장을 구하면서 아파트 근처에 있는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기 시작했고, 둘째는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군대에 갔습니다. 막내가 아직 고등학생인 관계로 403호 아주머니는 동생네 가게에서 일을 도와주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조금은 어두운 구석이 있지만, 어쨌든 403호 식구들은 열심히 살아가는 단란한 가족으로 보입니다. 그러다 동네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403호 큰 아들이 깔끔하게 옷을 차려입고 새벽 출근길에 나섰습니다. IMF의 여파로 모두가 어려운 시절임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힘들다던 취업을 했다는 사실이 참으로 대견했습니다.


 403호 큰 아들이 출근을 한 지 3개월이 지났을 무렵, 늦은 밤까지 집으로 귀가를 하지 않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별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텐데, 워낙에 자기 자신에게 엄격하고 성실한 청년이었기에 걱정이 되었습니다. 새벽녘이 되어도 403호 큰 아들은 귀가를 하지 않았습니다. 덕분에 내 걱정은 두 배로 늘어났습니다. 해가 희미하게 비추며 경비아저씨들의 교대시간이 막 끝났을 무렵, 아파트 입구에서 403호 큰 아들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달려 나가고 싶은 마음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403호 큰 아들이 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놀이터 벤치 쪽으로 걸어왔습니다. 더 이상한 것은 403호 큰 아들의 한쪽 손에 까만 비닐봉지가 들려 있었다는 겁니다. 수상한 까만 비닐봉지 속에는 초록색 병 하나가 삐죽 얼굴을 내밀고 있었습니다. 누가 봐도 소주병이었습니다. 사실 놀랐습니다. 소주병과 403호 큰 아들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벤치에 털썩 주저앉더니 까만 봉지에서 초록색 소주병과 은박지로 통조림 입구가 싸여있는 골뱅이 통조림을 꺼냈습니다. 잔도 없이 소주를 홀짝홀짝 마시던 403호 큰 아들은 허전했는지 깡통에서 은박지를 벗기고 골뱅이 하나를 꺼내 먹었습니다.

 “야옹!”

놀이터 옆 수풀에서 아기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렸습니다. 403호 큰 아들도 그 소리를 들었는지 잠시 동작을 멈췄습니다. 아마도 아파트 단지에 사는 길고양이가 골뱅이 냄새를 맡은 모양입니다. 403호 큰 아들은 마술사처럼 까만 비닐봉지에서 또 다른 깡통을 꺼내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갔습니다. 고양이가 숨어 있는 것을 확인한 403호 큰 아들은 조심스럽게 깡통을 따서 수풀 앞에 놓고 살금살금 물러났습니다. 아마도 고양이에게 먹이를 주려는 모양입니다.


 얼마 후, 길고양이가 통조림 냄새를 맡았는지 수풀에서 살금살금 기어 나왔습니다. 고양이는 경계심 가득한 눈망울로 403호 큰 아들을 말갛게 쳐다봅니다. 403호 큰 아들이 자신을 해칠 것 같지 않다고 판단했는지, 고양이는 허겁지겁 통조림 내용물을 먹기 시작합니다. 그제야 403호 큰 아들은 낮은 한숨을 내쉬며 남아 있는 골뱅이 하나를 집어 먹습니다.

 “야옹!”

 “하하, 귀신이네. 어떻게 알았냐? 통조림 유통기한이 지났다는 거.”

 “야옹!”

 “미안. 나도 얻어 온 거라서. 근데, 그거 먹어도 괜찮을 거야. 통조림이니까.”

 “야옹!”

 “이거 봐. 지금 나도 유통기한 지난 거 먹고 있잖아.”

 “야옹!”

 “알아, 나도. 먹고 실기 힘들다는 거.”

혼잣말인 듯 혼잣말 같지 않은 말을 하며 403호 큰 아들은 남은 소주를 마셨습니다. 얼핏 보면 따뜻하고 정이 넘치는 장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습니다. 유통기간이 지난 통조림을 고양이와 나눠 먹고 있는 403호 큰 아들의 마음이 지금 누구보다 서럽고 슬프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냐고요? 사람들의 뒷모습은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는 법이니까요.




**[  1998년 9월 어느 날 유통기한 지난 골뱅이를 먹는 달팽이 ] **


 “그럼, 저는 이만 들어가겠습니다!”

내 씩씩한 목소리에 나도 깜짝 놀랐다. 아니나 다를까 쥐 죽은 듯 조용하던 사무실 사람들이 놀란 눈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하지만, 누구도 대답을 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너무 했다 싶었는지 팀장님이 그동안 수고했다는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순간 나도 모르게 감정이 울컥 올라왔다. 이러다간 눈물도 왈칵 쏟아질 것 같아서 나는 화가 난 사람처럼 자리를 박차고 뛰쳐나왔다. 눈물이 자꾸만 흘러내려 엘리베이터를 탈 수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16층 계단을 차곡차곡 걸어 내려갔다. 덕분에 나는 그 계단에서 담아 두었던 내 눈물을 모두 소진할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나의 첫 인턴 생활은 그렇게 끝이 났다.


 처음부터 정직원이 될 거라 기대했던 것은 아니었다. 인턴제도로 정규직이 될 수 있는 사람은 보통 낙하산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을 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일에 대한 욕심이 생겼다. 정규직도 계약직도 아르바이트도 아닌 어정쩡한 인턴 나부랭이였지만, 일을 배우는 속도가 남들보다 빨랐던 나는 누구보다 그 일을 잘 해낼 자신이 있었다. 내게 관심이 없던 선배들도 일을 잘한다는 소문을 들었는지 언제부터인가 나를 찾기 시작했고, 꽤 비중 있는 일들을 서슴지 않고 맡기게 되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그들은 내가 떠날 사람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나 같은 소모품 인턴들을 수도 없이 만났고, 또 앞으로도 계속 만날 것이기 때문이다. 시한부 인생 같은 인턴 생활이 얼마 남지 않았을 무렵, 선배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다시 침묵했고, 내게 그 어떤 일도 맡기지 않았다. 나는 그런 선배들이, 아니 그런 내 신세가 서러웠다. 하지만, 서러움만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전혀 서운하지 않은 듯 아주 쿨하게 떠나 주는 일밖엔 없었다. 그래서 환송회를 해주겠다는 팀장님의 제안도 단칼에 거절했다. 다른 회사 면접이 있다는 거짓말까지 해가면서 말이다. 덕분에 떠날 사람도, 남겨진 사람들도 모두 어색해졌다. 3개월 동안 함께 일했던 직원들은 감히 수고했다는 말을 건네지 못했고, 나 또한 고마웠다는 말을 남기지 못했다. 그제야 알았다. 쿨한 이별은 절대 쿨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오늘따라 너무 멀게만 느껴졌다. 3개월을 매일 같이 지나던 길이었지만, 그런 생각이 든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겨우 집 근처에 있는 지하철에 내렸다. 하지만 이대로 집으로 바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 결국 자주 드나들던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편의점에 들어가자마자 나는 주류 냉장고 앞으로 향했다. 거침없이 소주를 하나 꺼내 벌컥벌컥 마셨다. 맥주도 아닌 소주를 시원하게 마시고 나니 그제야 멍했던 머리가 뻥 뚫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 누군가 다가와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돌아보니 편의점 주인아저씨가 골뱅이 통조림을 하나 들고 서 있었다.

 “빈속에 마시지 말고 이거라도 먹으면서 마셔.”

방금 마신 술 때문일까? 아니면, 골뱅이 통조림 때문일까? 나는 엄마 잃은 아이처럼 그 자리에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사실 이 편의점은 내가 인턴을 하기 전에 간간히 야간 아르바이트를 하던 편의점이었다. 들어오자마자 소주를 마실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편의점 아저씨는 엉엉 우는 내 등을 토닥이더니, 바로 카운터로 달려갔다. 손님이 왔기 때문이다. 나도 울음을 그쳤다. 머쓱해진 마음에 아저씨가 건네줬던 골뱅이 통조림을 물끄러미 쳐다본다. 공교롭게도 통조림의 유통기한이 한눈에 들어왔다. 예상했던 대로 통조림의 유통기한이 오늘까지였다. 눈물을 훔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통기한이 다된 통조림을 따서 골뱅이 하나를 꺼내 먹었다, 몰캉몰캉 골뱅이가 씹혔다. 맛은 나쁘지 않았다. 손님이 나가고 편의점 아저씨와 나 이렇게 둘만 남았다. 나는 이런 일이 일상인 것처럼 담담하게 물었다.

 “내일 몇 시부터 나오면 되나요?”

 “오늘 밤부터 해주면 좋겠는데, 괜찮겠어?”

편의점 주인아저씨의 부탁에 나는 소주를 한 모금 더 마시려다 그만두었다. 대신, 골뱅이 하나를 더 꺼내 먹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오늘은 정말 집으로 가는 길이 너무 멀다고.



13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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