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밀레니엄 :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연재소설 <아파트에게>
갓난아기였던 209호 민정이가 어느새 대학생이 되었습니다. 덕분에 날이 갈수록 시간의 흐름이 빠르다는 것을 새삼 깨닫습니다. 요즘 민정이는 남자친구를 사귀는지 화장도 시작하고 제법 멋을 내고 다니는데, 그런 민정이를 보면 기분이 이상해집니다. 나도 이렇게 이상한데 민정이 아버지와 어머니의 마음은 어떨까요? 어제는 한 남학생이 민정이를 바래다준다며 아파트 앞까지 따라왔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괜히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그래서 남학생이 얼른 집으로 돌아가기를 바랐습니다. 하지만, 남학생은 민정이를 집에 들여보내기 싫었는지 놀이터 벤치에 앉아 좀처럼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남학생은 민정이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내게 등을 기대고 서서 내 이파리들을 하나씩 뜯어내기까지 했습니다. 덕분에 나도 점점 더 골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내 이파리를 뜯어내서만은 아닙니다. 내게 기대거나, 내 나뭇가지에 매달리는 것을 허락한 사람은 민정이 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나와 민정이만 알고 있는 추억들은 너무나 특별했습니다. 물론, 민정이는 그것을 추억이라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민정이를 처음 만난 순간부터 나는 민정이와 함께 성장했다고 생각했습니다. 때문에 민정이와 함께 했던 특별한 순간들을 다른 말로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민정이가 유치원생이었을 때, 병아리를 키운 적이 있습니다. 민정이는 그 병아리를 무척이나 좋아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식으로 팔리는 병아리들은 하나같이 모두 일찍 죽는다는 슬픈 전설이 있었습니다. 슬픈 멜로드라마 속에 나오는 비련의 여주인공은 반드시 병에 걸려 죽는다는 진부한 공식처럼 말입니다. 민정이가 아꼈던 그 병아리도 예정된 운명을 거스르지 못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습니다. 병아리가 죽고 민정이는 하루 종일 방에서 울다가 해가 질 무렵이 돼서야 병아리를 품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두 눈이 퉁퉁 부은 얼굴로 민정이는 내 뿌리 근처에 조그만 구덩이를 파더니 병아리를 묻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꽤 오랫동안 나를 안고 울었습니다. 마치 내가 병아리라도 되는 것처럼. 덕분에 나는 너무도 행복했습니다. 그렇게 뜨겁게 나를 안아 준 사람은 민정이가 처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초등학생이 되어서도 민정이는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종종 내게 들리곤 했습니다. 처음에는 병아리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곧 다른 이유가 생겼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민정이는 하얀 우유를 싫어했는데, 민정이 엄마는 그런 민정이의 식습관을 고쳐 주고 싶어서 학교 급식으로 나오는 하얀 우유를 억지로 마시게 했던 모양입니다. 우유는 싫었지만 엄마한테 혼나기 싫었던 민정이는 학교에서 받은 우유를 가져와 내 근처에서 내용물을 버리고 빈 우유팩을 가지고 들어가 엄마에게 확인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우유 먹고 무럭무럭 자라야 돼!”
우유를 내 뿌리 근처에 부으면서 민정이는 내게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나 역시 우유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민정이가 주는 거라 괜찮았습니다. 안타깝게도 그런 민정이의 기행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우유를 붓다가 깐깐한 경비아저씨에게 걸려 혼쭐이 났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민정이와 나의 추억으로 가득한 이 공간에 그 남학생이 끼어든 것이 나는 무엇보다 못마땅합니다. 하지만, 그 남학생은 그 후에도 자주 내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언제나 민정이와 함께 내 공간과 시간을 나누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정말 일어나지 말았으면 좋았을 충격적인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거 알아? 오늘 밤이 지나면 지구가 멸망한다는 거.”
“에이. 그걸 진짜 믿어?”
“아냐, 그건 누구도 모르는 일이야.”
“그래도 난 안 믿어.”
“근데, 만약에 정말 오늘 밤 지구가 멸망한다면, 넌 뭘 하고 싶어?”
“글쎄, 진짜 그렇게 된다면 빨리 집에 들어가야지. 가족들이랑 마지막을 함께 보내야 하니까.”
“그럼, 나는?”
“너는 지금 만나고 있잖아.”
“좀 실망이네. 난 좀 더 로맨틱한 일을 할 줄 알았는데.”
“어떤 일?”
“인생의 마지막 밤이잖아!”
“그러니까 넌 뭘 하고 싶은데?”
“나 같으면 사랑하는 사람과 마지막 키스를 할 거야. 이렇게!”
남학생은 민정이에게 입맞춤을 했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첫 입맞춤이었는지 마지막 입맞춤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남학생과 민정이는 나를 방어막 삼아 꽤 오랫동안 입맞춤을 했습니다. 그 순간 나는 민정이와 나누었던 소중한 추억들을 몽땅 잃어버린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이 지구의 멸망보다 훨씬 더 안타까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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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레니엄 시대가 시작되었지만, 다행히 지구는 멸망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아쉽습니다. 예전보다 사람들의 여유와 낭만이 많이 사라진 것 같기 때문입니다. 세상살이도 팍팍한데 그런 여유가 대수냐고 묻는 다면 뭐 더 이상 할 말은 없습니다. 어쩌면 사람들은 여유가 없는 것이 아니라, 그럴 마음이 없는 것 같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하루 종일 TV를 보거나, 컴퓨터 모니터를 쳐다보거나, 휴대폰으로 문자를 보내거나, 전화를 거는 일에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열중합니다. 물론 나 역시 TV와 라디오에 빠져 현실을 잠시 잊고 살 때가 종종 있었지만, 요즘 사람들은 진짜 세상이 어디인지 헷갈릴 만큼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에 집착합니다. 왜 그런 걸까요? 왜 사람들은 자신들 앞에 놓여 있는 세상은 보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에 빠져 사는 걸까요? 상황이 이렇다 보니, 나처럼 볼품없는 나무들은 더 외로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다행히 301호 아저씨는 요즘도 가끔 주말이 되면 자신의 노트를 가지고 아파트 여기저기를 돌아다닙니다. 그러다 한눈에 들어온 나무를 발견하면 거의 한 달 이상은 그 나무를 면밀히 관찰하고 노트에 무언가를 적어 내려갑니다. 아저씨의 그런 행동들이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내겐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모릅니다. 엊그제는 301호 아저씨가 무슨 일인지 내 줄기와 이파리들을 꽤 오랫동안 쳐다봐 주었습니다. 내게는 처음 있는 일이라 몸 둘 바를 몰랐습니다. 아저씨의 작은 관심만으로도 20년 넘게 쌓아왔던 우울증이 단번에 사라지는 기분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기분은 그리 오래가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사는 아파트에 심어진 나무는 그저 그런 배경화면처럼 외롭고 고독하게 살아가야 하는 운명을 타고났기 때문입니다.
요즘 들어 무엇보다 나를 외롭게 하는 것은 105동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이 더 이상 놀이터에 나와 놀지 않는다는 겁니다. 어린아이들이 하루 종일 뭐가 그리 바쁜지 모르겠습니다. 덕분에 아이들의 손길과 발길이 닿지 않는 놀이터는 하루가 다르게 낡고 초라해져 갑니다. 물론,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아기들이 엄마 품에 안겨 놀이터에 놀러 나오는 경우는 종종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아가들은 모래 장난 한 번 하지 못하고 엄마 품에 안겨만 있다가 그냥 집으로 들어갑니다. 모래장난을 하던 아이들의 파릇하던 손길이 무척 그립습니다. 뛰어놀던 아이들의 땀방울도, 까르르거리던 아이들의 청량한 웃음소리도 그립습니다. 도대체 그 많던 아이들은 모두 어디로 사라진 걸까요? 이제와 생각해 보니 놀이터에서 아이들이 사라진 이유를 조금은 알 것도 같습니다. 모든 것이 아파트 단지를 뻔질나게 오가는 저 노란 버스 때문입니다. 초등학생(얼마 전까지는 국민학생이라 불렀던)들이 등교를 하고 나면, 아파트 단지에는 노란 유치원 버스가 여기저기 나타납니다. 엄마 혹은 할머니와 함께 나온 꼬마 아이들이 눈물겨운 인사를 하고 아이들은 그 노란 버스에 올라탑니다. 그렇게 아이들을 데려간 노란 버스는 점심시간이 지나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다 오후 3~4시가 되면, 그와 비슷한 또 다른 노란 학원버스들이 나타납니다. 학교에 다녀온 초등학생들은 이 노란 버스들을 타고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저녁 7시가 돼서야 노란 버스를 타고 다시 나타납니다. 그러다 10~11시가 되면 또 다른 미니버스들이 중고등학생들을 태우고 아파트 단지에 나타납니다. 그렇게 아이들은 하루 종일 노란 버스를 타고 사라졌다가 노란 버스를 타고 다시 나타나는 일을 매일 반복합니다. 덕분에 요즘은 105동에 사는 아이들의 이름을 알기도 쉽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뛰어놀지 않으니 서로의 이름을 부를 일도 없고, 이름을 부르지 않으니 그 아이의 이름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문득 뿌리 어느 구석에선가부터 서운함이 스멀스멀 올라옵니다. 놀이터를 제 집처럼 드나들던 아이들의 청량한 모습을 지금도 기억합니다. 물론 그 아이들은 이미 다 어른이 되어 버렸습니다. 209호 민정이는 이제 대학교 졸업반이 되었고, 202호 세찬이는 웹디자이너가 되어 직장에 다니고 있습니다. 503호 상수는 대학원에서 논문을 쓰고 있었고, 309호 쌍둥이는 이사를 가서 지금은 소식조차 알 수 없습니다. 이제 105동 아파트에는 아이들이 살지 않는 것 같습니다. 모두 어른이 되었거나, 노란 버스를 타고 사라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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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굳게 닫혀 있던 109호 집 베란다 커튼이 어느 날 갑자기 활짝 열렸습니다. 모르는 사람들은 별일 아니라고 하겠지만, 이 일은 정말 깜짝 놀랄 일입니다. 원래 109호에는 20대 후반의 여자가 혼자 살고 있었는데, 한 여름에도 베란다 두꺼운 커튼을 치고 창문을 닫고 있어서 105동 사람들은 그 집에 사는 사람에 대해 궁금해했습니다. 커튼뿐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창문에 철창이 있어서 다른 누군가는 감옥이나 요새 같다고 말하는 이도 있었습니다. 때문에 109호 커튼이 활짝 열렸다는 것은 아파트 사람들에게 꽤나 자극적인 뉴스거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109호에 낯선 남자가 드나들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남의 말을 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109호 여자가 남몰래 결혼을 한 게 아니냐고 했지만, 아무리 봐도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109호 거실과 안방에 결혼사진 같은 것을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뭐, 어쨌든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109호 여자의 어두웠던 얼굴이 열린 커튼 사이로 파고든 햇살처럼 화사하게 보였기 때문입니다.
“골인!”
늘 조용하던 아파트 단지에 천지가 개벽할 것 같은 소리가 들렸습니다. 크게 놀라지 않은 것은 비명이 아니라 함성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기쁨과 감격이 넘치는 함성 말입니다. 얼마 전에 세계적으로 아주 유명한 축구 행사를 우리나라에서 개최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 행사 때문에 105동 아파트 주민들이 이렇게 소리를 지르며 좋아할 줄은 몰랐습니다. 어쨌든 기분은 좋습니다. 고요하고 상막하던 아파트 단지에 오랜만에 활력이 넘치기 시작했으니까요.
함성을 처음 들었던 그날부터 아파트 단지 주민들의 TV 채널은 모두 스포츠 채널로 바뀌었습니다. 사실 그 부분이 나는 제일 안타까웠습니다. 사람들이 매일 똑같은 경기 장면을 반복해서 보느라, 다른 프로그램을 보기 힘들어졌기 때문입니다. 며칠이 지나자, 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이 모두 빨간 옷을 입고 거리를 활보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얼굴에도 빨간색 물감을 묻히고 다니기도 했습니다. 노란 버스를 타고 사라졌던 아이들도 요즘은 아파트 단지 놀이터에 빨간 옷을 입고 나타나 이리저리 뛰어다녔습니다.
“대~한, 민, 국!”
어느 집인지는 모르겠지만 누군가 우렁찬 목소리로 이렇게 외치기 시작하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사람들의 우렁찬 박수소리가 뒤따라 들립니다.
“짝짝, 짝짝짝! 짝짝, 짝짝짝!”
신기했습니다. 평소 대화도 별로 없었던 이웃들과 어떻게 저렇게 정확하게 합을 맞출 수 있는 걸까요? 마치 아주 오래전부터 그렇게 구호를 외쳐왔던 사람들 같습니다. 물론 가끔은 신음에 가까운 탄식이 쏟아지기도 합니다. 아마도 상대 팀의 공격이 성공했을 때인 것 같습니다. 어쨌든 약 한 달가량 105동 아파트 주민들은 마치 한 몸이 된 거 마냥 소리치고 움직였습니다. 아니, 이제 105동 아파트에는 축구를 보지 않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것 같습니다. 덕분에 바빠진 사람들은 치킨 집 배달원들이었습니다. 경기가 펼쳐지는 내내 치킨 배달 오토바이가 끊임없이 아파트 단지를 드나들었기 때문입니다.
며칠이 더 지나자 105동 뒤에 있는 초등학교 운동장 조회대 앞에 커다란 스크린 한 대가 놓였습니다.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그 TV 앞으로 모여들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곳이 마치 제 집인 거 마냥, 돗자리를 깔고 앉아 음식을 배달시키거나 집에서 싸 온 음식들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얼핏 보면 아파트 주민들의 단합대회가 열린 것 같습니다. 축구경기가 시작하자 사람들은 모두 입을 닫고 축구 경기에 몰두하기 시작했습니다. 축구경기의 흐름에 따라 똑같이 움직이고 똑같이 소리를 질렀습니다. 아무리 연습을 한다고 해도 2시간 이상 같은 타이밍에 같은 탄식을 내뱉거나 같은 응원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 생각했는데, 아파트 주민들은 그 어려운 일을 너무도 쉽게 해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언제나 즐겁고 신나는 일은 영원할 수 없다는 겁니다. 축구 행사가 끝나자, 언제 그랬냐는 듯 사람들은 무심한 일상으로 돌아갔습니다. 간혹 뜬금없이 박수를 치며 대한민국을 외치는 사람들이 있기는 했지만, 그때만큼 신이 나 보이지는 않습니다. 아무래도 나는 공 하나에 따라 발을 동동 구르며 기뻐하고 안타까워하던 사람들의 모습을 아주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14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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