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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경아 Sep 16. 2024

14화. 투명인간도 흔적을 남긴다.

연재소설 <아파트에게>

 언제부터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105동 아파트에 부동산 아저씨와 함께 집을 보러 다니는 사람들이 부쩍 많아졌습니다. 지난번처럼 다시 나라가 망한 게 아닌가 걱정이 되었는데,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 보니 그런 건 아니었습니다.

 “뭘 그렇게 망설이세요? 여기 아파트 가격이 작년에 비해 얼마나 올랐는지 아시잖아요?”

 “그렇게 많이 올랐는데 또 오를까요?” 

 “아이고, 사모님! 무슨 그런 말씀을. 제가 장담합니다. 이 아파트 정도면 지금 가격에서 2배는 거뜬히 오를 겁니다. 그러니 지금 빨리 잡으셔야 해요. 아니면, 나중에 후회하신다니까!”

 “에이, 지은 지 30년 다 된 아파트가 설마 그렇게까지?”

 “모르시는 말씀입니다. 보세요! 일단, 근처 학원가 때문에 요즘 학부모들이 이 아파트를 얼마나 군침 흘리는지 몰라요. 그래서 새 학기가 시작되는 2월이면 사람들이 그렇게 이사를 들어옵니다. 물량이 부족하니, 전세라도 들어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줄을 서니까요. 제가 여기서 복덕방을 오래 해서 누구보다 잘 알잖아요. 더군다나 이 아파트 위치 좀 보세요. 이 앞에 지하철이 바로 있고, 버스 정류장도 많아서 서울은 물론 경기도 근처까지 안 가는 노선이 없고, 자가용으로 어디 가려고 해도 여기 앞에 올림픽대로 타고 가면 시내든 외곽이든 바로 갈 수 있으니 금상첨화죠. 그리고 이건 정말 사모님한테만 말씀드리는 건데, 이 아파트 재건축 이야기가 벌써부터 나오고 있어요.”

 “그래요? 여긴 고층이라 재건축되기 힘들다고 하던데?”

 “요즘은 주상복합이 있잖아요. 여기는 주상복합으로 40층 넘게 지으면 게임 끝입니다. 워낙에 위치가 좋으니까 건설사 입장에서도 나쁘지 않은 선택인 거죠. 한마디로 이 아파트 사두시면 완전 장땡이라는 겁니다. 사실, 저도 몇 년 전에 이리로 이사를 해서 재미를 쏠쏠하게 보고 있어요. 그리고 여기는 전세만 내놔도 며칠 못 가서 바로 계약이 성사된다니까요.”

 부동산 아저씨는 마치 십 년 동안 말을 못 했던 사람처럼 쉬지 않고 했던 말을 또 하고 또 했습니다. 아저씨 말대로라면 아파트 값이 올랐으니 105동 주민들에게는 엄청나게 좋은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런 부동산 아저씨의 말이 저에게는 왠지 모르게 서늘하게 다가왔습니다. 누구보다 든든하던 105동 아파트가 어느새 재건축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나이를 먹었다는 것도 믿기 어려웠습니다. 어제는 105동 아파트 키를 절반이나 따라잡았다고 우쭐했었는데, 오늘은 왠지 105동 아파트에게 미안한 마음까지 듭니다. 사람들이 이 아파트를 많이 좋아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야 아파트 값이 오르지 않을 테고, 그래야 이곳에서 내가 더 오래 머물 수 있을 테니까요.


##


 202호 세찬이네 집에 커다란 변화가 생겼습니다. 세찬이 아버지가 30년 만에 집으로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105동 주민들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세찬이 아버지가 아주 오래전에 돌아가셨다고 생각했었는데 어떻게 된 일일까요? 아파트 소식통인 요구르트 아주머니 말로는 세찬이 아버지는 젊은 시절 세찬이와 세찬이 어머니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살림을 차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제와 몹쓸 병에 걸렸다는 이유로 그 집에서 쫓겨났고, 갈 곳이 없어진 세찬이 아버지는 어쩔 수 없이 세찬이네 집으로 다시 돌아왔던 겁니다. 요즘 세찬이의 얼굴이 예전보다 더 어두웠던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미대를 졸업한 세찬이는 웹디자인 회사에서 몇 년을 일하다가 그만두고, 얼마 전부터 웹툰 작가로 활동하고 있었습니다.


 “미안하다, 세찬아.”

 “엄마가 왜 미안해? 미안해야 할 사람은 따로 있는데.”

 “어쨌든 엄마는 너한테 제일 미안해.”

 “근데, 엄마는 정말 괜찮아?”

 “어쩌겠니. 다 죽게 생긴 사람을 쫓아낼 수도 없고.”

 “아니, 그 집 사람들은 어떻게 저런 사람을 내쫓을 수가 있냐고.”

 “그러게. 그나저나 어떡하니? 너 집에서 작업도 해야 하는데.”

 “신경 쓰지 마. 당분간은 친구 작업실에서 하면 되지.”

 “그냥 불쌍한 사람 도와준다고 생각하자. 엄마도 그렇게 생각할 테니까.”

 “그래. 이제 와서 아버지라고 생각한다고 바뀌는 것도 없고.” 

놀이터 벤치에 앉아 세찬이와 얘기를 나누고 있는 세찬이 어머니 머리카락에는 새하얀 눈이 내려앉아 있는 것 같습니다. 저렇게 하얀 머리카락이 내려앉을 동안, 세찬이 어머니는 얼마나 많은 인고의 세월을 보냈을까요? 상상조차 되지 않습니다. 세찬이와 세찬이 어머니는 그렇게 서로를 위로하며 한참을 놀이터 벤치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렇게 1년이 지난 어느 날, 202호 세찬이네 집에 살던 그 불쌍한 사람이 죽었습니다. 세찬이와 세찬이 어머니는 평소와 다름없이 담담하게 그 불쌍한 사람을 떠나보냈습니다. 죽을 때가 되면 태어난 곳으로 다시 돌아오는 연어처럼, 그 불쌍한 사람은 그렇게 자신의 진짜 집으로 돌아와 죽었습니다. 하늘도 불쌍한 이의 죽음을 슬퍼했던 걸까요? 그 불쌍한 사람이 죽고 난 뒤, 꽤 오랜 시간 동안 하늘에서 엄청난 비가 쏟아졌습니다. 서울 어느 지역에는 홍수가 나서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었다는 소식도 들었습니다. 다행히 오늘은 엄청났던 그 장맛비가 그치고 어느 때보다 청량한 하늘이 얼굴을 내밀었습니다. 오랜만에 받아보는 청량한 햇살에 축축한 이파리를 말리고 있는데, 오랜만에 보는 세찬이가 슬리퍼를 질질 끌고 놀이터 앞으로 걸어 나왔습니다. 그런 세찬이 모습이 영락없는 백수 같았지만, 세찬이는 요즘 그래도 꽤 잘 나가는 웹툰 작가라고 합니다. 물론 나는 세찬이의 웹툰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말입니다. 

 “네, 김 대리님! 조금 전에 작업 끝내고, 서버에 올려두었습니다. 본의 아니게 늦게 올려서 죄송합니다. 네네. 덕분에 상은 잘 치렀습니다.”

전화 통화를 마친 세찬이가 아직 덜 마른 벤치 위에 털썩 주저앉았습니다. 그리고는 한참 동안 멍하니 놀이터를 바라봅니다. 그런데 가만히 있던 세찬이의 등짝이 아주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세찬이의 등짝을 보고 있자니, 문득 잊고 있던 꼬마 세찬이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할머니를 잃고 혼자 놀이터에 나와 쭈그리고 앉아 울던 꼬마 세찬이의 뒷모습이 지금의 모습과 너무도 닮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     2004년 7월 폭우가 쏟아지던 어느 여름날     ]** 

 

 며칠째 꾸역꾸역 구름이 차더니 오늘은 아침부터 꾸덕꾸덕 비가 내리고 있다. 뉴스에선 마른장마라고 호들갑을 떨었는데 막상 비가 오니, 이번엔 장마대비를 잘하라고 호들갑을 떨고 있다. 다행히 나는 이런 호들갑 속에서도 촉박한 일정을 차분하게 맞춰 나갈 수 있었다. 이대로라면 내일모레쯤 끝낼 수 있을 것이다. 오늘 분량을 겨우 끝내고, 오랜만에 침대에 누웠다. 잠시라도 잠을 청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상하게 잠이 오질 않았다. 사방이 너무도 조용해서 그런가? 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다가 문득, 작년 여름 생각이 났다. 작년 이맘때도 오늘처럼 하늘이 뚫어진 것처럼 비가 내렸다. 우리 집은 지은 지 30년 가까이 된 오래된 아파트였기 때문에 비만 오면 베란다 새시가 들썩거리곤 했다. 마치 아래위로 틀니를 한 노인의 잇몸처럼. 더군다나 강수량이 조금만 많아져도 어김없이 베란다 안쪽에 물이 들어찼다. 너무 낡고 오래돼서 비틀어진 베란다 새시 틈새로 빗물이 들어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년 여름에도 나는 삐걱거리는 베란다 새시 소리 때문에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런데,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오늘 밤은 비무장지대처럼 모든 것이 너무 아늑하고 조용했다. 도대체 이유가 뭘까?


##


지난해 초여름, 기억도 없는 아버지라는 사람이 집으로 돌아왔다. 말이 아버지지 30년 동안 나는 아버지라는 존재를 거의 모르고 산 사람이다. 그래서 낯선 모습으로 돌아온 아버지라는 늙고 병든 남자를, 나는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낡은 사진으로만 보던 모습과 지금의 모습이 너무도 달랐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그 낯선 남자를 집에 들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흉한 몰골로 문 앞에 서 있는 남자를 내쫓을 용기도 없었다. 그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모습으로 어머니 이름을 부르며 문 앞에 서있었다. 어머니는 그 늙은 남자를 보자마자 자리에 주저앉았다. 결국, 부처님처럼 자애로운 마음을 가진 내 어머니는 탕자가 되어 돌아온 그 좀비 같은 남자를 집으로 들이고 말았다. 


늙고 병든 남자는 다용도실 옆에 있는 작은 쪽 방을 차지했다. 처음엔 그가 시체처럼 며칠을 앓아누워있어서, 이 집에 누가 왔는지 좀처럼 실감하지 못했다. 그렇게 한 달을 보냈다. 몸이 많이 좋아졌는지 좀비 같던 그 남자는 겨우 사람 모습을 하고 집 안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그 남자를 아는 척하고 싶지 않아 투명인간 취급을 했다. 30년 동안 철저히 버리고 살았던 가족에게 너무도 당당하게 가족행세를 하는 그 남자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그 남자도 더 이상 눈에 거슬리는 행동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 집에는 어머니와 나, 그리고 투명인간이 함께 살았다. 하지만, 그 이상한 동거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얼마 전 그 투명인간이 죽어버렸기 때문이다. 처음 우리 집에 찾아왔던 것과 비슷한 몰골로 투명인간은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어머니와 나는 투명인간에 걸맞은 장례식을 조용히 준비했다. 물론 그 투명인간을 위해 한 방울의 눈물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렇게 투명인간은 아침 이슬처럼 흔적도 없이 우리 집에서 사라졌다.


##


궁금함 때문에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결국,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작년과 달라진 점이 무엇인지 궁금했기 때문이다. 바로 베란다로 나갔다. 여전히 베란다밖엔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 집 베란다 새시는 임플란트를 해 넣은 것처럼 튼튼해 보였다. 또한, 베란다 새시 틈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빗물도 찾아볼 수 없었다. 베란다 창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나를 보고 어머니가 뭐 하고 있냐고 물었다. 작년과 달라진 베란다 이야기를 꺼내자 어머니는 낮은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그 사람이 고쳐 놓은 거야!"

어머니가 말한 그 사람은 투명인간이었다. 한때, 우리 집에 머물렀던 그 투명인간이 베란다를 고쳐 놓은 것이다. 그제야 나는 투명인간이 살아생전에 이런 일을 해서 밥을 벌어먹고 살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비는 그치지 않고 계속 내렸다. 이제는 비바람까지 불었지만, 튼튼해진 우리 집 베란다 새시는 이 정도쯤은 문제없다며 의연하게 버티고 있었다. 그렇게 비가 내리는 창밖을 바라보고 있자니 문득, 투명인간이 보고 싶어 졌다. 물론, 내가 그 투명인간을 보고 싶어 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치지 않는 빗줄기처럼 내 눈물은 계속 흘러내렸다. 이제 빗물이 아니라 내 눈물 때문에 베란다에 물이 차오를 것 같았다. 그런 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장대비는 쉴 새 없이 베란다 창문을 두드리고 또 두드렸다. 



 

 길었던 장마가 끝나고 기다렸다는 듯이 쏟아지는 뜨거운 여름 태양은 105동 아파트를 어느새 화로처럼 달구고 있습니다. 광합성을 해야 하는 나는 그런 105동 아파트 한편에 서서 이 호사를 마음껏 누립니다. 반면에 105동 아파트 사람들은 녹아내릴 것 같은 태양의 축복에 모두들 지쳐있는 것 같습니다.

 “아휴, 오늘은 여기도 덥네. 한강둔치나 가면 좀 나을까?”

105동 아파트 주민들은 저녁마다 밖으로 나와 벤치에 앉아 있거나 한쪽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 있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모기떼의 습격도 참아가면서 말입니다. 그럼에도 이런 잔인한 여름도 비켜간 집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109호입니다. 얼마 전에 활짝 열렸던 109호 집 커튼이 어느 날부터인가 다시 닫히더니 지금은 다시 장막 같은 커튼이 베란다 창문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109호 여자에겐 또 무슨 일이 생긴 걸까요? 왜 그녀는 다시 세상과 소통을 끊고 스스로를 가둬 버린 걸까요? 이제는 궁금함 보다 걱정이 더 앞섭니다. 그저 나는 그녀의 고립이 그녀를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데려가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내 바람이 그녀에게 전해졌는지 얼마 후 109호 여자가 대낮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새벽에 나가 저녁 늦게 들어오던 그녀가 대낮에 외출을 하다니! 놀라움보다, 반가운 마음이 더 컸습니다. 그런데 그녀는 도대체 어디를 가려고 했던 걸까요? 평소와 다른 외출을 감행했던 그녀가 그다음 날도, 또 그다음 날에도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부디 그녀가 긴 여행이라도 갔던 것이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라도 그녀가 자신의 고립을 극복할 수 있다면 말입니다. 


 “아이고, 깜짝이야!”

경비아저씨가 며칠 만에 집으로 돌아온 109호 여자를 보고 깜짝 놀라 낮은 비명을 질렀습니다. 나 역시도 그녀의 모습을 보고 그런 비명을 지를 뻔했습니다. 그녀는 챙이 아주 긴 모자까지 쓰고 얼굴엔 커다란 반창고를 미라처럼 붙어 있었습니다. 경비아저씨의 반응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한순간도 멈칫거리지 않고 바로 경비실을 지나 자신의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놀란 경비아저씨는 머리를 갸우뚱거리더니 그녀를 따라 아파트로 들어갔습니다. 얼굴이 다 가려져 있어서 혹시나 그녀가 105동 거주자가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잠시 후 경비아저씨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다시 경비실에 나타났습니다. 아마도 아저씨는 그녀가 109호에 들어가는 것을 보고 나서야 그 여자가 109호에 살았던  그 여자임을 깨달았던 모양입니다. 짐작컨대 109호 여자는 실연의 아픔을 극복하기 위해 성형수술을 했던 것 같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그녀의 성형수술이 그리 잘 된 것 같지 않았다는 겁니다. 병원에서 돌아온 그날 이후, 109호 여자는 이제 출퇴근조차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그녀는 세상과 완전히 등을 지기로 작정한 모양입니다. 


##


 여름이 뒷걸음질 치던 어느 날, 105동 아파트로 이사 온 208호 아주머니의 간절한 소원이 이루어졌습니다. 치매에 걸린 그녀의 시어머니가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상식적인 이야기는 아니겠지만, 208호 아주머니의 소원은 진심으로 치매 걸린 자신의 시어머니가 하루라도 빨리 죽는 것이었습니다. 208호 아주머니는 그동안 매일 밤 시어머니를 재우고 베란다로 나와 진심으로 그렇게 기도를 했었습니다. 208호 아주머니의 상황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 기도소리를 듣고 끔찍한 패륜행위라고 욕을 했겠지만, 평소 아주머니가 시어머니 때문에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아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시어머니 상을 치르고 나자 208호 아주머니의 얼굴은 하얀 목련처럼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습니다. 화장을 곱게 하고 외출을 할 때면, 10년은 젊어 보인다는 소리도 들었습니다. 자식들은 모두 독립을 했고, 두 내외만 남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아주머니는 이제 더 이상 걱정거리가 없어 보였습니다. 덕분에 아주머니는 처음으로 주어진 자유를 제대로 누리기 시작했습니다, 주민 센터에서 하는 인문학 강의들도 들었고, 지난주부터는 요가 수업도 받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208호 아주머니의 자유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왜요? 208호에 무슨 일이 또 났어요?”

 “아이고, 박복한 사람......”

 “무슨 일인지 알면, 얘기 좀 해 봐요.”

 “208호 아주머니가 치매 걸린 시어머니 10년 넘게 모셨던 건 알고들 계시죠?”

 “네, 그럼요. 그 시어머니 아주 고약했잖아요.”

 “그 시어머니 장례 치르고 그이가 얼마나 좋았겠어요. 꼭 회춘한 것처럼 볼도 불그스름해지고 예뻐졌었잖아요.”

 “아휴, 그니까 빨리 본론을 말해 봐요.”

 “아, 글쎄. 그 남편이 또 치매 판정을 받았대요.”

 “세상에! 어쩌다가.”

 “그 아주머니 충격을 받았는지 며칠 동안 멍하니 있다가.......”

 동네 소식통인 요구르트 아주머니는 차마 말을 다 하지 못하고 눈을 감았습니다. 105동에 사는 아주머니들 차마 놀라지도 못하고 소리 없는 탄식만 내뱉었습니다. 남편의 치매 판정은 208호 아주머니에게 너무나 가혹한 일이었을 겁니다. 지난 10년 동안 자신이 해야만 했던 일들을 또다시 반복해야 한다는 것이 무엇보다 끔찍했을 테니까요. 하지만 그 충격과 공포가 자기 자신을 죽일 만큼 엄청난 것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솔직히 나는 아직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거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나무에게 그런 일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어떤 절망이 내려앉으면 자기 자신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걸까요? 일일이 다 열거를 할 수는 없었지만, 그동안 나는 105동 아파트에서 꽤 많은 죽음을 목격했던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오늘은 다른 어떤 날 보다 더 슬펐고, 아팠습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어내는 일이 바람직하지 않은 이유는, 아마도 본인은 물론 남겨진 사람들에게 너무도 큰 상처가 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208호 아주머니의 발인이 있던 날, 105동 아파트에는 또다시 비극적인 일이 벌어졌습니다. 


 “아휴, 이러다가 아파트 집값 떨어지는 거 아니에요?”

 “왜요, 또 무슨 일이래요?”

 “119 출동한 거 모르셨어요?”

 “그러니까, 왜 출동한 거래요?”

 “208호 아주머니 발인 끝내고 자식들이 집에 돌아왔는데, 그 사이에 그 남편이 또 자살을 했다지 뭐예요.”

 “세상에!”

정말 믿기지 않는 이야기였습니다. 신은 사람들에게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시련을 준다고 하던데, 아무래도 시련이라는 것은 사람을 가려서 오지는 않나 봅니다. 세상에 뿌려진 시련이 모두 다르듯, 그것을 견뎌내야 하는 사람들의 상황도 하나같이 다르기 때문일까요? 정말 모르겠습니다. 왜 그런 선택을 해야 했는지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의 비극적인 운명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슬퍼해주는 것 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각자의 생이 다르듯, 각자의 죽음도 다를 수 있는 거라고 그렇게 위로하며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한 두 분의 명복을 빌어봅니다.


##


 아파트단지 내에서 며칠 동안 이상한 기운이 돌더니, 갑자기 아파트 정원수를 특별 관리한다는 공고가 떴습니다. 그동안 아파트 정원수가 잘 자라게 한다는 이유로 이른 봄마다 잔가지 쳐내기 작업은 종종 있었지만, 이번 가지치기는 평소와는 아주 많이 다른 이유가 있어 보입니다. 이번 정원수 특별 관리는 아파트 주민들의 일조권 확보를 위해 시행되었기 때문입니다. 아파트가 30년 이상 되다 보니 아파트 정원수들이 너무 울창해 집안으로 햇빛이 잘 들지 않는다는 아파트 저층 사람들의 민원이 많았던 것입니다. 그런 입주민들의 불만을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이유가 서운한 것만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는 존재가 하루아침에 일조권 확보를 방해하는 주범이 되었다는 사실이 자꾸만 서러워집니다.  


 소름 끼치는 기계 소리가 산발적으로 들리더니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옵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대로변에 있는 은행나무와 플라타너스가 너무도 부럽습니다. 대로변 울창한 가로수들은 아파트 전체 경관을 멋지게 만들어 준다는 이유 때문에 이번 특별관리 대상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입니다. 또다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나무가 된 것 같아 서러움이 밀려 올라옵니다. 그러는 사이 어느새 105동 주변 정원수들의 가지치기가 시작되었습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자라던 메타세콰이아는 아파트와 맞닿는 곳만 가지치기를 당하는 수모를 제일 먼저 겪었습니다. 슬프고 우습게도 가지치기가 끝난 메타세콰이아 수형은 누군가의 입에 베어 물린 고깔모자처럼 보입니다. 물론 웃을 일이 아닙니다. 나 역시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역시나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특정한 모양도 없이 사방으로 퍼져있다는 이유로 나는 메타세콰이아보다 훨씬 더 우스꽝스럽게 잘려나갔습니다. 무엇보다 안타까운 것은 당분간 105동 아파트 주민들의 창문을 들여다보기 어려울 정도로 가지들이 잘려나갔다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냄새지?”

 “나무 진액냄새 같은데?”

 “아, 오늘 여기 가지치기해서 그런가 봐.”

 “근데, 저 나무는 너무 짧게 자른 거 아닌가?”

 “그러게. 바로 군대 가도 되겠어. 하도 짧게 잘라서.”

301호 부부의 슬프고 웃긴 대화를 듣고 있자니 잘려나간 가지들이 떠난 자리가 더 쓰라립니다. 아픔도 아픔이지만, 이렇게 우스꽝스러운 모양을 하고 사람들 앞에 서 있다는 것 자체가 너무 창피합니다. 301호 아저씨 말대로 군대라는 곳에 갈 수만 있다면 바로 가버리고 싶을 만큼 창피합니다. 훤하게 드러났던 속살들이 진액으로 뒤덮여 거친 수피들로 다시 거듭날 무렵이면, 지금의 이 치욕스러운 아픔을 잊을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아픈 상처가 치유될 거라는 희망조차 없어진다면 어떤 마음이 들까요? 조금도 나아질 희망 없이 그저 반복되기만 하는 이 처절한 고통을 견뎌내는 수밖에 없다면? 어쩌면 나도 살아갈 의욕을 잃고 이대로 죽어버리고 싶을지도 모르겠습니다. 208호 아주머니와 아저씨처럼 말입니다. 문득, 그들의 안타까운 선택에 대해 함부로 생각하고 판단했던 나 자신이 부끄러워집니다. 또한 이렇게 아팠던 경험은 또 다른 이해와 배려를 만들어 낸다는 사실도 깨달았습니다. 아픈 만큼 누군가를 이해하는 마음은 조금 더 넓어지기 때문입니다.



15화에서 계속.......


#rain #그럼에도불구하고 #투명인간 #아파트 #베란다 #흔적 #과연아픈만큼성숙해지는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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